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3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시편 145:14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 된 자를 자유하게 하시며, 갇힌 자의 놓임을 선포하신다. 이 예언의 말씀을 가까운 훗날에 예수님께서 나타내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선포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
이사야 본문의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를 7백여 년이 지나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이루셨고 전파하셨다. 저들은 한 본체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오늘 이를 읽고 묵상하며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오늘 이사야서 첫 구절의 표현과 같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로써 가능한 일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3).”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에 우리로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다 이루게 하려 하심이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곧 오늘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메시아를 예언하는 말씀이면서 우리로 그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문제적으로 곤고하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일컬으나 그와 같이 곤궁한 영혼으로 주를 바라는 자를 의미한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밖에는 채울 수 없는 궁핍으로 주를 바라는 마음이다. 결핍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주를 바라며 “다만 가슴을 치며” 아뢰는 심정이다. 세리는 그럴 리 없는 사람이다. 결국 저의 남모를 결핍이 저로 인정하게 하였다. 나는 죄인이다! 이 말도 안 되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9).
우리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무궁하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하여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라.’ 하신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하여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 나의 삶에서 나의 이야기로 들리고 나타날 때에 회복의 날은 실현되고 있었다. 곧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신다.’ 문자적으로 ‘은혜의 해’라 희년으로 실제 모든 빚을 탕감해주는 날로 정하신 때이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레 25:9-11).”
하지만 이 날은 성경 어디에서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은혜의 해’를 성취하셨다.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함을 아셨다.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렘 34:14).” 심지어는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16).” 이것이 우리 사람의 본색이고 본연의 성품이다. 결국,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07:14-16).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오늘 우리의 이 놓임과 자유와 고침은 모두가 주의 은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하여,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30:11).
나는 살면서 이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그 현장에 있던 것에 감복한다. 누구의 어떤 사정을 들을 때, 또는 아픈 가운데 여전히 곁에 생수를 두고 다른 데 터진 우물을 파는 것을 볼 때면, 뭐라 이르고 말해주어도 들을 수 없는 저의 상태를 안타까워한다. 한때는 내가 그러하였고 누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게 가소롭기만 하였다. ‘기도할게, 힘내’ 하는 권면을 듣기 싫어했고,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 한데 돌이켜 보면 나는 저들의 기도에 빚진 자이다. 그와 같은 기도들이 나를 살렸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그 어떤 사랑도 기도하는 것보다 강하지 못하다. 이제 나는 확신하기를 누구 이름을 한 번 아뢸 때마다 성령은 달려가신다. 내가 저를 위해 기도할 때에 성령은 일하신다.
어릴 때 나의 부친은 항상 듣기 싫을 정도로 ‘하나님이 너를 남다르게 사랑하신다. 특별히 사랑하신다.’ 하는 말을 하였는데 나는 그 소리가 참 싫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인 ‘2월 10일’에 나는 큰 수술을 했고 반 년 가까이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오른 팔을 남기고 몸통과 한 어깨와 팔을 깁스하고 한 다리는 뻗치게, 한 다리는 발목을 깁스하고 있었으니 어린 나이에 그 심정이 어땠을까? 여수 애양원이라 부모님은 교회 일로 와 있지는 못하고 교회 권사님과 같이 생활했던 기억도 있다. 놀라운 역사는 하필 그 곳이 나환자촌이었고 그 유명한 ‘손양원 목사’의 교회 옆이었다. 더 우연하고 이상하고 희한한 일은 퇴원 후 돌아갔을 때 아버지의 목회지도 경기도 양주에 있는 모 교회 나환자촌이었다. 일부러 그런 계획을 세웠을 리는 없고, 돌아와 3년 반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늘 누군가의 기도로 살았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 기도에 능력이 있음을 내가 확신하는 것은 특정한 그 시절 외에도 나의 평생은 기도 덕에 살았음을 안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것, 이 놀라운 역사는 경험한 사람만 경험하며 살 수 있다. 한 번 경험한 자는 없다. 이 경험은 한 번 해보면 수시로 느낀다. 농담처럼 이제 아내는 무슨 일만 있으면 ‘기도해줘’ 하고 조른다. 이 놀라운 경험을 곁에서 느끼고 보고 함께 체험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두고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에는 능력이 있어서 기도하게 하시는 이의 열심과 실제 우리 삶이 한데 맞물린다.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21:13).” 하시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22).” 하신 주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26:41).” 하시며,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하셨다. ‘이런 종류’ 이를 눈으로 귀로 직접 그 삶으로 사는 자의 복이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7).” 이에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이는 나의 일이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누구의 사연을 듣다, 나의 어떤 일을 두고… 나로서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리 살았고, 살게 되었고, 살고 있다. 그때는 알지 못하였던 어떤 이들의 기도로 내가 살았고, 주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게 하심으로 살게 되었고, 나로서는 할 수 없고 해줄 게 없어 그리 살고 있다. 문득 십자가 앞에 서서, 화장실에 가다가, 멀리 시선을 놓고 서서 창밖을 보다, 주님! 하고 부르며 누굴 위해 기도한다. 이 아침 주 앞에 엎드리며 말씀 위에 얼굴을 대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나의 기도는 요란하지 않고, 내색도 없이, 길을 걷다가 또는 어디에서 시선을 놓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 4:5).” 그리하여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
이는 모두 너와 나의 일이다. 맡기신 사명이며 삶이다. 누가 어떤 어려움을 겪을 때 어디 용한 누굴 찾아가 기도받길 원한다고 할 때 나는 저를 말린다.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으로 ‘나’와 일대일로 만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하여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오늘 우리의 기도는 주 앞에 다다른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4).”
오늘 이사야는 큰 소리로 외쳐 전하기를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사 61:6).”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10).” 우리 안의 평안과 기쁨은 주로 인함이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130:4).
사유(思惟)란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일련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실은 우리의 속량을 위함인데, 세상을 사랑함에 따른 소욕에서 성령을 사모하는 소욕으로의 속량(贖良)을 위함이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7-8).
이를 우리는 기다리며,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
‘깊은 곳’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진 영혼으로 ‘가난하여서’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2).
하고 기도할 때에,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사 61:11).” 주가 이루신다. 그리하여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2).
왜냐하면,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3-4).
우린 결국 그럴 수 있는 자들이다. 그렇게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이를 앎으로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5).
이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8-9).
우리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대하여,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아무도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못하도록 주의 은혜는 한결같으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14).
하물며,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20).
그러므로,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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