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8 주일
시 133편
공동체의 노래
시 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들어가는 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8-9).”
이 땅을 사는 동안 족한 줄 알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잘살든지 못살든지 저마다는 부족하다. 적절하지는 않으나 이를 불교용어로 보면, 아귀(餓鬼)라 하는데 ‘서로 같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할 것을 두고 끝 간 데 없이 다투며 덤벼든다.’ 저들이 사는 곳은 아귀도(餓鬼道)다. 서로 더 먹겠다고 물고 뜯고 다투는 것을 아귀다툼이라 한다. 오늘 우리 사회 현상과 다를 게 없다.
지혜자는 이르기를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그렇듯이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잠 30:15-16).” 곧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우리의 욕구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유다의 12대 왕 아하스와 14대 왕 므낫세는 자식을 불살라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제물로 바쳤다. “아하스가…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대하 28:1-4).” “므낫세가…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33:1-6).”
이와 같이 오늘 우리도 거침없이 자신의 허영과 권세와 명예를 위해 자식을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끌고 가 불사른다. 학벌로, 좋은 직장과 지위로, 돈벌이와 안락한 삶으로… 모두는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하려고 한다지만. 이를 위해 목사들 자녀는 물론 재직자나 성도들이나 자식들이 교회를 등한히 하고 하나님을 소홀히 섬길 때도 ‘어쩔 수 없이’ 입시준비로 또는 직장생활을 위해 또는 저를 인격적으로 인정한다며 불사른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렘 18:12).”
누구 말도 듣지 않는 아귀 같은 저들에게 지혜자는 말한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그럼에도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29:1).” 그에 따른 결국을 알려주는데도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며 듣지 않는다.
오늘 본문은 이에 반기를 들듯 ‘형제의 연합과 동거가 선하고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곧 우린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 가정과 교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있다. 바울은 소리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러다보니 다들 산다고 사는데 사는 게 지옥 같다. 지옥은 헬라어로 ‘게헨나’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의미인 히브리어 ‘게 힌놈’이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단순하게 지명이 아니다. 자식을 산 채로 세상 제물로 바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왜들 그럴까? 아귀처럼 먹고 또 먹어도 배고프기 때문이다. 그에 따른 결론이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민 11:33-34).”
방법은 하나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를 명심하며 본문으로 들어가자.
본문이해
열다섯 편의 <순례의 시> 가운데 마지막 한 편을 남겨둔 오늘 시편은 교회와 가정을 이루고 믿는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의 노래’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길에 ‘홀로 독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연합하여 서로 동거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오늘날 비혼주의는 성경적이지 못하다.
오늘 시편은 세 구절로 나뉜다. 시적구성은 두 연으로, 1연(1절)은 ‘형제의 연합’에 대하여 그 일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선언한다. 2연(2-3절)에서는 대제사장 아론의 실명과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가장 높은 산맥의 줄기인 헐몬 산을 지칭하며 직유적이고 직설적으로 우리의 복인 여호와가 명령하신 복, 영생을 일깨운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기 위한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는 형제의 연합과 동거가 곧 교회와 가정과 우리의 일터와 일상에서 함께 하는 공동체가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가를 일깨운다. 둘째는 그에 따른 필수적인 요건이 하나, 서로가 서로에게 ‘아론’이 되어 제사장적인 사명 곧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과 둘, 각각의 그 독특하고 신기하고 기이한 체험 곧 간증으로 젖어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말’에서 우린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축복, 곧 그가 명령하신 영생에 대하여, 이는 우리가 결국 저 천국에서도 나누어야 하는 ‘친밀한 사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공동체의 선하고 아름다움에 대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
실은 형제의 연합이 거의 어렵다. 성경은 이를 감추지 않는다. 처음 형제들인 가인과 아벨의 경우, 결국은 살인으로 끝장났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 결국 반목하고 대립으로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하물며 예수님의 형제들도 더디 믿었고 주의 사역을 알지 못했다. 곧 우리의 혈연적인 관계에서뿐 아니라 교회, 신앙 공동체에서도 다를 게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리어 두고두고 싸웠다.
오늘날 교단은 수도 없이 갈라지고 와해되고 반목하고 서로 다투기 일쑤다. 같은 총회에서도 총회장 한 번 뽑으려면 조폭들의 세계와 다를 게 없이 ‘아귀다툼’을 한다. 일반 교회에서도 목사와 장로가 집사와 집사 사이가 갈리고, 각각 끼리끼리 갈려 하나 되기가 어렵다. 그럼에서 오늘 시편은 우리가 천성을 향해 가는 데 있어 서로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선언한다. 그럼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곧 우리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으로는 하나될 수 있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행 5:12-13).” 모이기에 힘쓰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이를 오늘 시인은 ‘연합하여 동거함’으로 표현함으로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럼 이와 같은 공동체를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두 가지를 각각 나누어 다루도록 하겠다.
2. ‘아론’이 되어 말씀을 선포는 사이에 대하여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2).”
보배로운 기름은 하나님의 권위요 성령의 임재다. 머리에 부어짐은 부르심으로 소명에 해당한다. 구약시대 왕과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를 상징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가졌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고로 우린 누구나 제사장 ‘아론’이 되었다. 이 사명은 기름, 성령으로 부어져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같다. 곧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 우리로 각자의 일상에 투신하게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성령의 강에 뛰어드는 삶’이어야 한다. 즉 먼저는 나 자신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음은 내 곁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한다. 누구는 ‘지식의 말씀’으로 누구는 ‘지혜의 말씀’으로 각각 우리에게 주신 바 그 은사에 따라 이를 행해야 한다. 곧 누구의 어떤 사연이나 사건을 두고 우린 기도로, 말씀으로 저에게까지 흘러가야 한다.
3. 각각의 은혜에 대하여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3a).”
헐몬 산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레바논 산맥으로 해발 270미터에 가깝도록 높아 만연설로 덮였다. 기온 차가 커서 밤새 이슬이 흠뻑 내린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렸다. 이는 우리 성도들 개개인이 겪은 독특하고 이상하고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간증 하나쯤 없는 성도는 황량하다. 몰라서 그렇지 간증거리가 없는 성도는 없다. 이를 느끼고 감격하는 강도가 달라서 그렇지 어느 은혜이든지 받을 자격이 있어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는 성도마다 독특하고 기이하다. 누구의 체험이 더 크고 귀한 게 아니다. 개별적인 고백은 저마다의 가슴을 뜨겁게 하여 이슬이 맺히듯 우리를 적신다. ‘헐몬의 이슬’ 곧 하나님의 은총은 방울방울 더해져 교회를 이루고 가정을 변화시키며 우리 곁의 사람들을 적신다. 우리는 저마다 ‘시온의 산들’이다. 우리는 남다른 성령체험을 간직하고 산다. 개별적이나 개체적이지 않고 계통적이나 일률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궁하여서 누구는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고, 누군 아이 문제로, 누군 사업이… 곧 우리 일상에서까지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흘러내려 개개인의 실개천이 강줄기가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이와 같은 독특한 경험을 서로 나누면서 우리는 깨닫는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나오는 말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3b)”
‘거기서’ 곧 우리의 개별적인 은혜의 체험이 헐몬의 이슬처럼, 아론의 머리에 부음 바 된 기름처럼 흐르고 흐른 거기에서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는 우리에게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으니 곧 영생이로다.” 이 놀라운 명령이면서 약속이면서 구원이고 축복인 영생에 대하여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하고 사무엘은 작심하였고, 바울 또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고 결연하게 말씀을 선포하였다. 곧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결국 이는 영적 싸움이다. 개인적인 내적 갈등만이 아니다. ‘이 길이 아닌가?’ 싶을 때, ‘그만할까?’ 하는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서로에게 ‘아론’이 되어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자신에게는 물론 내 곁의 수많은 아론의 선포에 귀를 기울인다. 성령의 임재는 그렇게 흘러 ‘아론의 수염’을 적시고 ‘옷깃까지 내림 같이’ 오늘 우리에게까지도 흐르고 흘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무던히 천성을 향해 나아간다.
오늘 우리는 공동체의 노래로 이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이 끊어지지 않도록 첫째, 서로의 ‘아론’이 되어야 한다. 둘째, 각자의 ‘헐몬의 이슬’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러할 때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실 우리 주님의 영광을 확장하게 된다. 이에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20: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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