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예레미야 2: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우리의 죄에 대하여는 가차 없고 은혜와 구원과 회복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이시다. 때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어 마음이 어렵다. 어려워 고개를 저으려는데 또한 그 사랑이 나를 붙드신다. 오늘 본문은 주의 사랑으로 징계하시고 또한 용서하심이 절절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배도 행위를 두고 보실 수만은 없어서, 그러나 또 아예 없이 하실 수도 없어서 그 사랑과 보호를 회상하게 하신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배반하나 하나님은 또 다시 찾아오시고 불러 세워 주를 바라게 하심인데… 주가 말씀하신다. “…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2).” 척박하고 더는 희망이 없는 곳에서 주를 따랐음을. 그래놓고는 어찌 주 아닌 것을 더 사랑하는지를.
그 사랑이 내게 임하였다는 것은 나로 그 사랑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말씀도 사랑도 순환하듯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누구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저의 처지에서 그럼에도 주를 바라는 것을 볼 때에 우린 저로 인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한다. 곧 우리는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빛과 같고 죄에 저항하는 소금과 같으며 이로써 산 위의 동네도 드러나게 한다. 드러남으로 더러는 누추하고 남루한 몰골로 비춰지지만,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누구는 저의 사는 모습이 별로 달갑지 않아 교회 다닐 마음이 없다는 어떤 이의 소리에 낙심하여 전화하였다. 잘 사는 모습, 남부럽지 않게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도 주신 삶에 최선을 다하느라 두 아이를 키우며 대학원을 마저 하고 기어이 자기 분야의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다. 그렇다고 안 믿는 자가 교회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안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반감만 생겨 은혜를 당연한 삯으로 받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누구는 쓰러지면 쓰러지는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현실에서 주를 바라였다. 저는 주를 바람이 누구로 교회 다니게 하려고, 또한 믿게 하려 스스로 애쓰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주신 삶을 사는 데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났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무얼 잘 하려고 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열심을 다하는 신앙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냉정하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러니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나무를 내 아버지라 하고 돌을 내 어머니라 부른다.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27).” 어쩌면 우린 하나님을 믿기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자신을 믿는다.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바란다.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은혜를 구한다.
그것으로 현실을 저울질하고 좀 나은 게 있나 없나 평가하듯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달아본다. 대체 하시는 게 없는 것 같다. 내가 살면서 내가 열심으로 일구어 오늘의 성과를 낸 것이고 그러한 나의 공로를 어찌 모르신단 말인지…. 우리 안의 분노나 원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러실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 다닌다고 별로 나은 게 없고 도리어 더 궁상스럽다는 저 역시 한 때는 신자였다. 젊을 때는 한참 교회를 열심히 다녔고 나름은 ‘주를 위하여’ 살았다. 한데 돌아오는 것이 결국은 자기 노력이었던 것만 같아서 이내 저는 주를 떠났다. 그리고 믿을 것은 역시 돈이라 여겨 건물이 몇 채에 운영하는 약국도 몇 곳이 된다. 여러 곳에서 세를 받고 또 어디 물건이 나오는지, 주식은 어떤 변동을 보이는지…. 저의 열심이 저로 주를 멀리하게 한다.
남부러울 게 없는 것 같은데, 들춰보니 이건 ‘터진 웅덩이’였다. 이혼하여 아이는 어디 외국에 국제학교를 다니는데 그 돈이 수 억이라! 줄줄이 또 대출에 대출이 맞물려 그 날짜를 서로 잘 돌려막으려 안간힘을 쓴다. 분에 넘치는 집들을 소유하고 약국을 경영하면서 들고나는 돈은 엄청난데 이게 늘 부자거지라! 어디가 제 몸은 슬슬 아프고, 늙으신 부모에게 드는 병원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는다. 눈만 뜨면 돈돈거리다 잠들기 전에도 돈 걱정으로 술을 찾고 수면제로 잠을 청한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사 58:1).” 그럼에도 저는 듣지 못하여,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40:10).
우리가 사는 이유는 따로 있다. 건강해도 병이 들어도, 돈이 있어도 혹은 없어도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5).” 가끔은 온전히 주를 바란다는 게 무얼까? 하는 원론적인 질문에 빠진다. 누구의 말할 수 없는 어려운 현실이 가슴 아프다. 들으면서도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할 말이 없어 한숨 속에 주를 부른다. 그럼에도 굳이 주의 일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하지 마!’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려는 것을 도로 삼킨다. 그야말로 주의 일만 아니면, 그저 저들 하나 잘 살자고 들면 못할 것도 없는 형편인데… 그럼에도 어려운 몸을 끌고 왜 그 고생을 사서하는지.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우리로 갈 길을 알게 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삶이다. 신자가 있고, 성도가 있고, 제자가 있다면 각각의 생은 다른 모양으로 그 신앙을 보인다. 신자는 믿는 자로 부르심에 응하여 교인 수준을 이제 막 벗어난 자이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이를 주의 일로 알고 거룩하게 여기는 자로 성도가 된다. 어쩌면 성장 과정이지만 더러는 그 머무는 시기가 유난히 길다. 어떤 이는 교회 문턱을 넘어온 수준에서 살다 간다. 어떤 이는 성도로까지 자랐다고 하나 그게 전부이다. 늘 수동적이며 자기 것을 우선으로 하기도 한다. 교회 직분을 소홀히 여기지는 않지만 그건 교회 안에서의 특수한 관계에서만이다. 직장으로 돌아가서는 또는 가정에서도 이 몫을 다하지 못한다. 그만한 능력이 없다. 이런 이들이 종종 교회 욕을 먹인다.
한데 제자가 되어 주를 따른다는 것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 부인(否認)이 먼저다. 자신을 부정한다는 게 말이 쉽지, 남들처럼 살고자 하는 욕망을 어찌 뭐라 하겠나? 예수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 좀 더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나쁘다고 하겠나? 수많은 자들이 예수 앞으로 왔다. 어떤 소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예수를 불러 세웠다. 문둥병자 열 명은 남들 시선도 겁내지 않고 예수 앞으로 나왔다. 중풍병자는 그 가족들이 필사적으로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 앞에 저를 보였다. 삭개오도 염치 불구하고 채신머리없이 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를 보려고 했다. 어느 창녀는 자신의 전부를 바쳐 준비한 향유를 예수의 몸에 부었다. 저마다 주 앞에 나오나 모두가 삭개오나 마리아처럼 돌이켜 예수를 따르지는 않는다.
‘제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모하다. 남들의 질시와 멸시가 따를 수 있다. 그때에 “내가 너를 위하여 …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렘 2:2).”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허물은 잊으시고 우리의 작은 헌신을 기억하신다. 오늘은 몸이 안 좋다. 어제는 좀 괜찮았는데, 지금은 앉아 있기도 힘들어 엉덩이를 들썩이고 허리를 비틀면서 통증을 덜하게 하고 이 글을 쓴다. 이런 날이 있고 저런 날도 있다. 그러할 때 나는 주께 바라는 것은 할 수 있는 정도이다.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할 일이다. 분에 넘치는 헌신은 더 이상 헌신이 아니다. 희생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이다. 억지로 힘에 겨운데 억울해하면서도 아리마데 요셉은 구경하다 얼결에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들고 골고다로 갔다. 저의 결국은 그 온 가족이 구원을 입었다. ‘억지로라도’ 하게 하시는 이의 능력도 내게 주시는 능력이라면, 나는 종종 억지로라도 한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45:10-11).
주가 주시는 마음이란 참으로 묘하고 기이하여서, 굳이 그런 지경인데도 해야 하나? 할 때에 그 판단은 우리 것이 아니다. 주가 원하시는 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2:7).
우리가 이 땅에 날 때도 또한 떠날 때도 그러하듯이 살 때도 주의 권능으로 산다. 억지로라도 해야 할 때가 있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 할 때가 있고, 할 수 있는데도 하지 말아야 하는 때도 있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9).” 하나님은 우릴 상대하신다. 돌이켜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11).” 우린 참 염치없이 산다. 하나님을 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허투루 산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6).” 어쩌면 우린 너무 겁 없이 산다. 그러나 성경은 일러,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2:11).
이는 각각이나 하나여서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단 9:7).” 우리로 먼저는 죄를 돌이켜 회개하게 하시고, 주의 뜻을 알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하려 하심인데,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나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의 날들이 모두 그러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9).”
하여 이것이 끝이면 더는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한데 나로 이를 알고 인정하고 회개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려고, 우리로 ‘삭개오야!’ 내려오라, 하심은 주가 내 집에 유하시겠다 하심이다. 내가 주를 따른다는 일은 주가 내 안에 거하심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이런 와중에도 감사가 나온다.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능력은, “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사 35:1-2).”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도리어 교회를 생각하고 어떤 이의 아픔을 두고 기도하다 헌금을 보내온다. 그러한 과정을 들을 때면 나는 눈물겨워 이 자리가 황송할 따름이다. 날씨 탓이려니… 온 몸을 뒤틀어가며 이 글을 쓰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 47:9-11).”
주가 이루신다. 나는 이제 바랄 게 없다. 주가 하실 것이다. 나는 다만 그의 아들이라, 그의 낳음이라. 하면 무던히 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때론 억지로라도. 그리하면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2:7).
이를 알면 알수록 몸은 죽겠고, 마음은 어렵고, 감당할 수 없는 일로 힘에 겹다가도, '어느 날 나는 죽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
내게 구하라…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1, 8,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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