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전봉석 2023. 5. 4. 05:16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66:22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신앙은 생활이다. 관념이나 신념이 아닌 항상 돌봄이 필요한 일상이다. 오늘 본문은 그 회복을 위한 선민의 복된 미래를 그려준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예언으로 이를 소망하며 ‘근신하고 깨어’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사는 일이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상 전반을 둘러보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1).” 시대적으로는 유다가 아직 망하기 전이다. 저들의 종교적인 형식주의가 문제다. 꼬박꼬박 제사는 드리면서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사는 데 따른 경고다.
 
우리가 지어져 가는 성전은 일상이다. 지긋지긋한 생활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대하 2:6).” 곧 이 땅 위의 외형적인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리하여 먹고 사는 일 자체가 성스러운 주의 일인 것을.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다 아신다는 사실이 두렵고, 든든하고, 참 다행이다. 전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불편하기만 하였는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젠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어떤 어려움이 맥락도 없이 터지고 주의 길을 가는 데 있어 역경뿐인 것 같을 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우리가 그럼에도 주를 바라며 살아내는 일 자체가 우리로 드려질 영적예배이었다.
 
누구의 어려움을 듣는다. 혈육이라도 어찌 도울 길이 없다. 저는 주를 알고자 씨름한다. 바로 믿고 주와 온전하기를 애쓴다. 한데 그 삶이 녹록하지가 않다. 같이 속상하고 답답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로 주 앞에 통회하고 바라며 구하게 하시려는 현실 앞에 승복한다. 오늘 본문 2절을 주목하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우리가 주 앞에 승복함이란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주를 바라고 주께 아뢰는 것.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도대체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나? 싶을 때도 묵묵히 발을 떼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도 무던히 그 말씀을 의지하며 ‘하던 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주가 바라시는 것을 주목하는 삶으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4:18).
 
동생은 재판으로 일시 정지된 목회 여정에서 별의 별 것을 다 경험하는 것 같다. 어찌 그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어느 공장에서 일하다 사장의 막돼먹은 짓거리에 더는 견디기 어려워, 동생은 말을 하다 울먹한다. 결국 마음만 상해 그만두었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저의 겪는 그 길이 나는 숭고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를 바라며 주의 길을 가는 것,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6-7).” 그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으로도 나는 경이롭다. 그것으로 우린 무얼 할 수 있을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5).” 주를 바라며 살면 살수록 알 수 있다.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주께 마음을 다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렘 13:10).”
 
이와 같을까 두려워 떨 줄 아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바울의 신앙이 우리의 가는 길에서 표지가 된다.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게 신앙이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로 선다는 것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3:3-4).
 
‘나의 큰 기쁨 하나님’께 향해 나아가는 것.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지 않고 오직 주만 바라며 말씀으로 살길 원하는 것.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곧 오늘 우리가 겪는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 우린 오히려 주를 더욱 바란다.
 
친구는 아내의 약한 몸을 두고 슬퍼한다. 주 앞에 구한다. 안쓰럽고 속상하다. 저 혼자 푹, 쓰러져 어지럼을 호소하고 항상 몸이 약해 맡은 일이 버겁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 대안학교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념으로 가는 그 길에서, 매순간 주께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는 저이의 고백이 경이롭게 들린다. 그저 먹고 사는 문제였다면 이제 그만해도 됐을 것을, 주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미래를 열어가는 데 그 사명을 다하는 일이어서… 나는 일련의 소식을 들을 때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한다. 왜 하나님은 …  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 알 수가 없어 덩달아 속상하여 기도하다보면 절로 가슴이 뭉클하여진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오직 이와 같은 말씀으로 이 길을 다하는 게 아니겠나? 적당히 타협하고 그만해도 될 법한 일을 두고, 무던히 방주를 지었던 노아와 같이… 또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하며 오히려 이를 자처하였던 바울과 같이… 왜들 그러나 싶을 정도로 성경의 사람들은 그러하였고, 그러하였던 것은 세상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걸어갔던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그런 중에도 ‘나의 큰 기쁨 하나님’을 우린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과정을 보면서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신 4:32-33).” 하는 주의 은혜를 알기에, 그런 가운데도 기도로 견디며 산다.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 주께로 나아가는 길. 결국,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주가 이루실 것이다. 주께서 행하실 것이다. 고작 한 영혼을 위하여도 말씀을 준비하게 하시고, 한 생을 위하여도 주의 사랑을 나타내게 하시는 일,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이는 우리에게는 약속된 나라가 있음이었다. 새 예루살렘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이에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2).
 
이때에 세상 그 무엇도 아이에게서 어머니 품과 바꿀 수 없다. ‘젖 뗀 아이’에게 그 품은 온 우주 전부와 다를 게 없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가르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이는 상징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우린 결국 하루하루 ‘오늘의 말씀’에서 만난다.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사 66:13-14).”
 
이에,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22).”
 
우리로 말씀 붙들고 기도로 견디어 이 길을 가게 하시는 힘은,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150:1).
 
현실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찬양이었다. 우리로 주를 찬양하게 하는 것, 이는 단순히 입술로 노래하는 찬양의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를 경계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 15:8-10).” 곧 우리는 말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145: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지어졌음을 알게 하시고, 오늘을 더 사는 이유인 것을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참으로 희한하고 신기한 것은 어려움 중에 있을 때 주를 더욱 찬송한다! 내 곁에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보면 저가 친구이든지 형제이든지 부모이든지 모두는 그러하였다. 그런 저들을 보며 나의 마음은 오히려 배운다. 말로 어찌 위로하려다 주가 행하시는 일이 경이롭다. 어떻게 그런데도 주를 바랄까? 하고 서로 놀랄 때, 오히려 저를 통하여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 누가 잘 되고 누가 형통한 것보다 주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커진다. 말도 안 되는,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을까? 하는 상황에서 그 어려움으로 우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의 뜻을 바란다. 나는 이들로 감격한다. 하여,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150:2).
 
우리의 찬양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이율배반적이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4).” 어느 훗날 모든 성도들이 주 앞에 모여 서로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고백하며 놀라워할 것을 상상한다. 하여 나는 저들을 보고 이 길을 간다. 다시 힘을 내고 걷던 곳으로 나아간다. 내가 위로하려다 저들로 위로를 받는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3-5).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숭고하였던 날들은 주를 찬양하였던 것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하여,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