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그에게 이르라

전봉석 2023. 6. 18. 05:33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45:4-5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편 45:1

 

 

 

바벨론의 침략이 임박하였던 여호야김 4년(B. C. 588-586)에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이 글을 기록하고 있다. 임박한 심판을 고민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위로와 심판 가운데 생명을 보존하심을 알리고 있다. 바룩은 시드기야 시대 유다의 고위 관료로 지낸 스라야의 형제다. 저는 예레미야의 말을 글로 옮겨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알리며 예레미야의 조력자로 사명을 다했다.

 

본문은 글의 구성상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렘 36:4).” 하는 내용 다음에 오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여하튼 성도의 모든 사명은 하나님의 경륜에 찬 역사이다. 여기서도 문득 알 수 있듯이 말씀을 붙들 때만이 어두운 시절에 소망의 날을 맞을 수 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믿음은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나 이를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란 결코 이를 임의로 강제하지 않으심으로 또한 하나님의 오랜 기다림도 그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누군가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푸르른 만물의 소성함을 더하시고 정원사는 그 나무와 풀과 꽃을 가꾸고 장식한다. 이에 수고와 그에 따른 인내는 성도로서 그 삶에 필연적이다. 오늘 본문 3절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이를 전하고, 기다리고, 그릇 행하는 이들을 지켜보며 민족의 최후를 같이 맞는 마음은 괴롭기만 하다. 이는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말로 전하여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야 하는 심정은 어렵고 두렵다.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는 붙잡혔으므로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으니 너는 들어가서 내가 말한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읍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렘 36:5-6).” 할 때의 바룩의 심정이나 이에 순종하여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에게 명령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성전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니라(8).” 할 때의 그 난처함과 두려움은 상상이 간다.

 

이를 듣고 환영하는 것도 아니고,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23).” 하나마나 한, 오히려 화로 돌아올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 그 슬픔과 고뇌는 참담할 정도이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 받을 것을 아시었다. 훗날 베드로도 전하길,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온전히 주를 믿고 주를 바란다는 일은 그리하여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겠으나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13).” 하는 이 말씀을 이제는 안다.

 

어릴 땐 그게 그렇게 싫었다. 심지어 내 속에는 만일 목사가 되려면 혼자 살고 가족을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무려 십여 차례 전학을 다녀야 했고, 그때마다 아버지의 목회지는 열악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어느 교회에서는 사택이 없어 세든 교회 건물 옥상에서 살아야 했고, 어느 때는 예배당 바닥에서 또는 지하 단칸방을 전전긍긍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나환자촌 교회로 갔을 때는 어린나이에 어떤 두려움과 우울감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기도 하였다. 늘 공납금은 밀려 교무실로 불려가기 일쑤였고 준비물은 열에 아홉이 빈 손일 때가 많았다.

 

‘어떤 어려움’이 어린 나의 영혼을 병들게 한 줄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엇나갔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뜻에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피했다. 오늘에도 형제들이 어렵게 목회를 하고, 동기들이 어렵게 이 길을 가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하다. 어제는 딸애와 같이 점심을 먹다 친구 누구도 목사와 사귀는데 서로 사랑하면서도 결혼은 꺼린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들어보니 그 목사의 가정이 가관이라.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저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대견하면서도 ‘그런 가정’에 시집을 보내야 한다면 나 역시 반대하거나 꺼렸을 것이란 짐작을 하며 들었다.

 

현실과 이상이 다르듯 신앙과 삶은 다르다. 그와 같은 역경을 감내하며 이 길을 가야 한다고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이에 그러한 상황에서도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하는 말씀 앞에 굴복하게 된다. 나의 유년 그 암울하였던 기억이 오히려 이제는 버팀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11:28).”

 

오늘 본문에서 나는 바룩을 짐작한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하실 때 그 엄연한 현실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5).” 이를 가감 없이 전하여야 할 때… 나의 부친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교회에서 쫓겨나듯 다른 목회지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때는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릴 길 없어 서럽고 원망스럽게만 여겼다.

 

그럼에도 전하여야 하는 사명자로의 삶은,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3-5).” 곧 우리가 주의 뜻대로 산다는 일은 어떤 어려움을 스스로 자처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7-8).”

 

고로 우리가 사는 길은 “주 안에 굳게 선즉 … 이제는 살리라.” 하시는 말씀이 새삼 마음속을 울린다. 우리가 염려하고 어찌 하려한들, 나름 요령껏 저들의 방식으로 목회하였던 이들의 결과를 종종 전해들을 때는 모래 한 줌을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할 말을 잃는다. 이에 오늘 시편으로 위로를 삼아,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 45:1).

 

내가 자주 묵상하는 시편으로,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나는 이 말씀의 수혜자다. 어릴 때 일을 글로 쓴 적이 있다. 그때는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내가 나를 분석하듯 들여다보는 심정으로였고, 또 하나는 특이한(?) 소재로 소설보다 소설 같은 현실을 표현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였을까? 신대원을 하고 그 직후였던 것 같은데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다 자판을 부수고 컴퓨터를 걷어차는 억눌린 감정을 마주하기도 했었다.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린 격으로 꺼이꺼이 울며 하나님 앞에 대들듯 마구 써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마주한 시편이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었다. 이에,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나의 억울함이 주를 바라는 발판이 되고 그 노여움이 주를 찬송하게 하실 줄이야!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씩 또래 친구들에게 놀림당하고 괴롭힘 당했던 때를 꿈꾸면 울면서 깼다. 그런 청소년 이야기나 어떤 영화를 보면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는 한다. 하나,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2).

 

오늘의 이 말씀이 내게 향하는 느낌은 그렇기 때문일까?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6-7)

 

그리하여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17).

 

오늘의 시편이 나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심은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