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전봉석 2023. 6. 25. 04:34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예레미야 52:16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시편 52:8-9

 

 

 

오늘 예레미야서는 열왕기상 24장 18절-25장 30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특히 오늘 기록에 있어 3차에 걸쳐 예루살렘 주민이 포로로 끌려가는데 B. C. 605년, 느브갓네살 7년에 1차 3023명, 2차 때인 597년, 느브갓네살 18년에 830명, 그리고 3차 586년, 느브갓네살 23년 4차 때에 745명이 끌려가 총 4600명이었다(28-30).

 

더욱이 유다 시드기야 왕 최후는 끔찍하였다(1-11). 이후 예루살렘의 약탈과 파괴는 참혹하다(12-27). 이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계승자인 에월므로닥이 여호야긴을 석방하고 후대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31-34). 결국 시드기야의 비참한 최후는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 가서 …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1-11).” 참혹하기 그지없다.

 

하나님이 이행하실 때 그 심판은 가차 없다. 예레미야의 마지막 장이기도 한 오늘 본문은 대필하는 바룩이 첨가한 것으로 여겨지는 데, 열왕기서의 내용을 인용하여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 의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정확하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곧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33:9-11).

 

이에 새삼 말씀의 준엄하심 앞에 바른 자세를 취한다. 주가 이루시는 일, 그의 섭리에 대하여 말씀으로만 의지하려 한다.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 데 있어서도 뜻하지 않은 ‘어떤 일’을 마주할 때 하나님의 행보를 생각하게 하신다. 곧 나의 판단이나 추측을 누르고 주가 행하시고 하는 데 집중하게 하시려고 말씀 앞에 두심을 본다. 영적 시선은 역사적인 사실 앞에서 판가름 난다. 어떤 사실을 보고 나는 무엇을 느끼고 확신하는가? 가령 오늘 2절,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결국 이 모든 일을 자처한 근거가 뚜렷하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역시 그 부친의 길과 같았다! 하나님의 그 숱한 경고와 선지자들의 경고와 애원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설마, 하는 우리의 허튼 생각이 모든 행동의 결과를 초래한다. 후회는 나중에 오고 망설임은 끈덕지다. 허투루 말씀을 들을 때 그 끝은 선명하고 잔혹하다. 우린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접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평안히 앉고 눕게 하심을 인정한다. 주를 의지함으로 안전하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여,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7-8).

 

우리의 참 지혜는 이와 같은 말씀이 나로 다시금 주 앞에 바로 세우는 일이다. ‘어떤 일’을 두고 가만히 주가 행하시는 일을 바라는 것, 주를 신뢰하고 저가 교회를 이뤄 가시는 데 있어 그 섭리가 어떠 하신지를 알아가는 것. 그럴 때 우리의 자세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잠 1:24-26).”

 

행여 내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로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2-5).” 기껏 잘 견디다 어느 순간 어디에서 잃은 것인지, 잃은 것도 알지 못하고 한눈팔고 있을 때,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어제 오후 주인이 먼저 건너와 근황을 설명하였다. 누구에게 이곳을 넘길 수 있는데, 오히려 교회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덧 인천으로 온 지도 7년이 되었고 혹여 주인이 바뀌면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 돌아보면 그때마다 앞선 나의 염려는 무색하였다. 더욱이 교회를 유지하고 이뤄 가는 데 있어 하나님이 하신다는 데 나는 이제 의심의 여지는 없다. 다만 좋은 사람들과의 이별은 언제나 힘들다. 나는 늘 과분하게 사랑을 받는다. 나는 앞일을 염려하기보다 그간의 정든 마음이 서운하여 이를 얼마나 또 속앓이를 해야 하나? 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하고 안 하고, 더 유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글방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이루면서 내 문제가 아닌 것을 알았다. 하라, 하시면 하게 하실 것이고 그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현실로 채우셨다.

 

여기로 올 때도, 와서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상하게 한 번도 임대료를 제 때 못낸 적이 없다. 그때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채우시고 이루시는 데 있어 더는 염려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자세인데, 이러저러하여 주인이 바뀔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다른 염려는 없었고 저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정든 마음이 어려웠다. 누구에게 말하면 그런 건물주가 어디 있냐? 할 정도로 다들 의아해할 정도였는데… 그런 거 보면 인복이란 내가 어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에서다. 그것으로 나는 이것을 교회로 사용하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확신하곤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전에 있던 군포 글방에서도 그곳이 예배처소가 되면서 나는 주인이었다. 세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로 오래된 건물의 화장실을 정돈하고 비록 페인트도 다 벗겨지는 낡은 곳이나 잘 가꾸어 사용하였다. 하면 그곳이 똥밭이면 어떻고 야채밭이면 어떻겠나? 우리가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전엔 그저 별볼 일 없는 장소였으나 주의 성전이라…. 11년을 채우고 이곳으로 떠나올 때 주인할머니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더 잡지 못해 안달이었다. 교회다. 교회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복은 동시에 흘러넘친다. 내가 무얼 잘해서가 아니었다. 빈 상가가 채워지고 그때마다 말썽이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좋은 사람들로 바뀌면서 저는 안 믿는 자였으나 그게 교회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1층 월세도 부담스럽고 인천에서 오가기도 힘들어서 그렇다고 변명하듯 인사를 여쭙자 저는 6개월을 감면해주겠네, 현관 유리를 다시 교체해주겠네, 하며 붙들기도 했었다. 그때도 희한하다 생각했었다.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그를 경외함으로 인정할 때 주가 다 알아서(!) 넘치도록 행하신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4).” 그때도 오늘도 확신하는 일은 비록 나는 부족하나 주가 교회를 지키신다. 옮기시든지 바꾸시든지 가장 좋은 것으로 행하신다. 하여,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5:7).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없고 이게 무슨 교횐가 싶은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조용히 이루어진다. 이에,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52:8).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03:17-18).

 

하면 나는 의당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나는 비록 하는 것도 없고, 자랑할 것이 없으나 주가 나를 보호하시고 교회를 이루심은 주의 긍휼하심의 증거가 된다. 못난 나무가 끝까지 산을 지킨다고,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렘 52:16).” 모두다 사로잡혀가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해도,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9:18, 68:10).

 

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로 복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다 해도 주님 한 분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이다. 고로 ‘천국이 저의 것이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어떠한 처지에서도 천국을 사는 사람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3, 37:9).

 

비록 세든 곳에서 전전긍긍하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서…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5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