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전봉석 2023. 6. 23. 04:4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50:20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23

 

 

 

유다 주변으로 열 개의 열방들에 대한 경고가 이어져 마지막 바벨론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선민의 회복과 대비되면서 저들의 멸망이 확정된다. 북방의 나라 고레스(Gyrus, B. C. 539-530)의 바사를 일으키심으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으로 바벨론은 무너진다. 고레스는 바벨론에 사로잡힌 자들을 본토로 귀환하고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재건을 독려한다. 알 수 있듯이 바벨론의 멸망은 선민 유다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결국 여호와의 보복의 날이 이르면,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주민이 없어 완전히 황무지가 될 것이라 바벨론을 지나가는 자마다 그 모든 재난에 놀라며 탄식하리로다(13).” 저들의 포악과 영화가 영원할 줄 알았으나 바벨론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은 병행되었다. 곧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기필코 심판이 따른다. 이는,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사 59:17-18).”

 

이를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에게 전파하라 하시고, 모든 선지자들로 외쳐 공표하게 하신다.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렘 50:2).” 곧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블레셋 사람이 옛날부터 미워하여 멸시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갚아 진멸하고자 하였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블레셋 사람 위에 손을 펴서 그렛 사람을 끊으며 해변에 남은 자를 진멸하되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겔 25:15-17).”

 

곧 주가 갚으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0-11).” 그러므로 우리에게 향하신 사랑은 죄에 따라 징계가 있을 수 있으나 아주 멸하지는 않으신다. 징계는 주의 자녀이면 당연하다. 이는 징계를 받음으로 세상과 같이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고로 ‘죽여서라도 살리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단 5:20-21).”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것,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우리 주님이 우릴 위하여 기도하신 것도, 또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가령 누구의 묵상 글을 읽는다. 저의 진솔한 고백 가운데 은혜가 크다. 보며 함께 기도한다. 곧 전에는 멀리하였더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4, 18).” 우리가 주를 믿는 자들로 서로 남이나 서로 같은 것을 바라며 응원하게 되는 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요즘은 이 구절의 말씀을 자주 옮겨 적고 오래 본다. 이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1).”

 

이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을 공유한 사람들이 성도다. 서로 모르고 또는 다른 공간에서 남으로 산다 해도 어떤 ‘끌림과 나눔’은 누가 먼저랄 게 없다. 나는 요즘 누굴 자주 생각한다. 술에 취해 넘어져서 고관절이 으스러졌고 응급수술로 2주 만에 회복을 하고 재활하고 있다. 전화를 걸어 좀 어떤가? 하고 묻자, 이런저런 말 끝에 자신이 개종하여 다른 종교로 간 것과 그 이유가 ‘외로움과 친절’ 때문이었다는 말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게 아닌데, 거기가 아닌데… 저가 가지고 있는 ‘장로교’에 대한 반발로 그리 된 것이어서 뭐라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라는 것,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하였던 이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저는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로는 나를 반겼지만 목사로서는 달가울 데 없다는 듯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자신이 믿는 ‘그곳’에 대해 칭찬하고 좋아하였다.

 

오늘 본문 6절, “내 백성은 잃어 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이 구절에서 저 친구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주가 더하시는 안타까움으로이겠다. 뭐라 한들, 전에 누가 대신 했던 말 중에 내가 자꾸 잔소리하고 권하여 싫더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 통화하면서도 무얼 조심하고 있는지,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아….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9-10).

 

어쩌다 저는 제 갈 길을 잃은 것일까? 저가 했던 말 중에 저들 종교에서 친절하였고 ‘나 같은 사람’의 처지를 알아주는 게 고마웠다는 말에 어떤 부끄러움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입 안에 쓰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자신이 믿는 하나님도 거기에 있다고 간 것이라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4-5).”

 

통화를 하고 더 마음이 어려웠고, 이런 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저의 마음을 두고 주께 간구하며 긍휼하심을 바라였던가? 우린 이렇게 저렇게 종교 하나쯤 가지고 살려 한다. 존재론적인 어떤 외로움이 이교도적이거나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게도 한다. 어떤 물건을 몸에 지녀 액운을 막으려는 행위에서부터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단지 이 땅에서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전부라면 오늘 바벨론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은 그 의미가 희석될 수밖에 없다. 사는 데 따른 그러한 이유가 전부였다면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함은 참으로 저급하고 옹색하겠다. 그저 사는 날을 위한 평화일 뿐이라면 말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은연중에 계속되셨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5:7-8).

 

돌이켜 이스라엘의 역사는 나의 일생이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어찌 관여하시고 함께 하셨는지를….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겔 34:5-6).” 곧 우리가 구원을 갈망하는 것은 여기에서의 문제를 해결받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아내는 이를 위해 눈을 뜨면서 기도한다고 하였다. 친정엄마를 모시면서 저가 귀하고 좋은데 동시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여러 요소들을 차치하고, 주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는 돌아서기 무섭게 화가 또 슬픔이 아내를 옥죄었다. 아침에 침대보를 갈아드리려 들추다 기겁을 했다. 평소 사용했던 휴지나 물티슈가 곳곳에 숨겨져 바짝 말라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때마다 챙겨드린 약들이 몰래 감추어져 있던 것이다. 왜 안 드셨는가? 하고 물으니까 그걸 먹으니까 더 아프시다나? 일부러 그런 약을 주는 게 아니냐고 하시면서 오히려 의심을 하시더란다. 치매는 아니라는데 그 하는 행동은 서서히 다를 게 없어서 아내는 복장이 터질 것 같다며 글썽거렸다.

 

모든 가정의 저마다 사연이 더러는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하고 더러는 다른 종교를 찾아 더 나은 위로와 평안을 스스로 구하려고도 하고… 그러니 나는 선뜻 어느 쪽에 서서 위로를 해야 할지? 충고를 해야 할지? 모르는 척을 해야 할지? 때론 둘 사이에서 티격태격할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갈등한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사 62:1-3).”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더러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만 되뇐다. 결국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하여 오늘 19절, 예레미야서에서도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반드시 어느 날에 우린 주가 주시는 평안으로 모든 괴로움을 씻은 듯이 잊을 것이다. 하여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20).” 더는 우리 죄로 우리가 고통당하는 일은 없을 터, 이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어떤 외로움, 저는 고아이면서 꼽추로 장애를 가지고 살면서 사람들의 친절과 환대가 그 어떤 종교적인 경건함보다 필요하였다. 결국 사람은 거기서 거기라 한들, 굶주린 저의 영혼에 주먹 밥 한 덩어리가 훗날에 막연한 영광보다 절실하였던 것일 테고…. 아내의 어려운 마음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으로의 인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엄마를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저녁에 샤워하려다 장모의 변기를 씻으면서 저절로 헛구역질이 일어나던 것과 같은 것은 아닐까?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아니었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어떤 이끌림으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8-19).”

 

우리로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 사는 동안 그럴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심으로 주가 나의 죄악을 밟으심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6-7).”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50:1).

 

우린 어떤 수를 써도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다. 전능하신 이의 강권하심으로만이 우릴 살리신다. 할 때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0-11).” 부디 원망하지 않도록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2).” 그러므로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5).

 

우리로 주 앞에 서는 기준은 다르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세상 유혹 가운데서,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2).

 

우리 안에 더하시는 이와 같은 확신이 필요하다. 외로움? 어떤 고단함과 원통함?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15).

 

하여 우리에게 감사는 능력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주의 권능으로다. 하여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34:7)

 

이와 같은 보호하심으로 산다는 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50: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