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이 버린 것이 되었느냐
예레미야 49:25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계속적으로 유다 주변국을 향한 예언의 말씀이 이어진다. 암몬의 말감은 국가적으로 섬기는 신으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몰렉을 가리킨다. 말감이 갓을 점령함은 암몬이 북이스라엘의 갓과 르우벤 지파의 영토를 점령한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왕하 15:29).”
암몬은 이외도 바벨론이 유다를 칠 때도 같이 가담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왕하 24:2).” 이렇듯 모압 곧 암몬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두고두고 역사의 굴곡마다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저들의 최후는 초라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하면 징계하시기는 하나 아주 멸하지는 않으신다. 또한 주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신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들에 대하여,
그러나 그는 사람이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왕들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시 105:14-15).
이에 따른 믿음과 확신이 우리로 오늘의 괴로움을 견디게 한다. 어제는 늘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 친구에게 조금은 바른 소릴 하였다. 언제까지 같은 문제로 문제에만 파묻혀 있을 것인지? 저들이 단지 타지인이라 하여 막무가내로 괴롭히는 것은 아닌 터,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이 일로 얼마나 주 앞에 바로 보고 주를 의지하려 하는지? 그저 ‘비나이다.’ 하는 식으로 기도만 부탁한다고 해서 일이 몇 해째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주 앞에 아뢰고 회개하였는지?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도 안 나가고, 말씀도 기도생활도 하지 않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것인지?
그저 잘 될 거야, 힘내, 하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위하여 기도한들 정작 자신이 그러한 문제에서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주의 뜻을 알려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거듭되는 어려움이 아까울 정도이다. 성경은 일러,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렇다면 그 속에 믿음이 있기는 한 것인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말곰이든지 맘몬이든지 닥치는 대로 빌고 또 바랄 것인지? 분명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같은 문제로 여전히 그 자리라면 둘 중 하나다. 하나님이 저로 돌이켜 주의 뜻을 알기까지 계속하시든지, 저는 여전히 문제에 함몰되어 그때그때 문제만 해결하는 게 목적이든지. 곧 오늘 우리에게 닥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큰 음성이다. 다급히 붙들고 부르시거나 그리 못하게 막으시려는… 고통의 의미는 의외로 단순하여 도리어 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음을 알기까지 성숙해져야 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여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주의 인자하심과 그의 선하심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1, 26).
일련의 사태가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할 때 그 고통을 복이라 한다. 교만은 결국 이를 알지 못하게 하고 인정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친구에게 성경 읽기도 중요하나 앞서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쉬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으면 성령의 감동으로만이 읽을 수 있고, 그러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린다. 이를 이해와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앞뒤가 안 맞고 억지스러운 듯 괴팍하고 이상하고 자기만 아는 신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오해할 수 있다. 친구는 왜 모세에게 인구조사를 하게하고, 후에 이를 어찌 벌하셨는가? 하는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나는 친구의 호기심과 의문에 반가움을 나타냈다. 또는 누구의 어려움을 두고 잘 됐다,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를 모두 주가 하시는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도를 부탁하는 누구의 어려움을 두고 연거푸 위로만하다, 지금 그 신앙이 어떠한지? 되물은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친구의 호기심에 단지 문맥적으로 그 의미를 이해하려하기보다 그 원인과 하나님이 어찌 다윗으로 격동시켜 그 일을 감행하게 하셨는지를 주의 깊게 읽기를…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다윗에게 있었던 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 곧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늘 나의 이야기여야 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면 뭐? 다윗이 역대 어느 왕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면 뭐? 우린 단지 역사속의 저들 이야기를 읽고 이해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저가 곧 오늘의 나로서 저에게 닥친 일들이 곧 오늘 우리의 문제가 되는 것을. 오늘 본문의 주변국들이 당하는 일들이 뭐?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모든 성경은 오늘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뜯어 먹고 삼켜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강건해야 한다. 한데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나의 오늘이 그러하지 않았나? 자신은 억울하고 잘못한 게 없는데 억울함을 호소한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성경은 언어의 세계다. 당연히 사전적인 의미와 지시적인 의미가 뜻을 전달한다. 그와 동시에 함축적인 의미가 있어, 예전에 아이들을 가르칠 때 아버지가 화가 나서 ‘나가 죽어!’ 하고 소리쳤다면 그것을 따르는 게 효도이겠나? 하고 유치한 예를 든 적이 있다. ‘주먹이 운다’ 할 때 여기에는 앞서 이 세 가지 의미가 동시에 읽혀야 들린다. 무슨 소린지,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인지, 여기서 우린 한 가지 더 ‘성령의 감동’이 같이 작동될 때, 오늘 유다의 주변들에 대한 예언이 동시에 나를 경고하시는 소리로 들린다.
가령 오늘 8절, “드단 주민아 돌이켜 도망할지어다 깊은 곳에 숨을지어다 내가 에서의 재난을 그에게 닥치게 하여 그를 벌할 때가 이르게 하리로다.” 이는 조롱이 섞인 말씀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어디 한 번 숨어봐라. 하시는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권면의 의미도 있다. 드단은 본래 에돔 족속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처 그두라 사이에서 난 욕산의 아들 드단의 후손들이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누가 모면할 수 있겠나만 그럴 수 있을 때 그리하라는 말씀을 동시에 내포한다.
우리가 주 안에 산다는 일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의 어떤 문제도 우릴 삼킬 수 없다. 고난은 그저 스쳐가는 세찬 바람 같을 뿐이고, 이에 두 사람이 있는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결국 나는 어디에 속하였는지?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21).” 하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성경은 수시로 묻고 계시는 것이다. 결국,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나는 누구에게든지 묵상을 쓰라고 권한다. 나의 이 글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유익하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때와 달리 글로 작성한 것을 나는 병원 대기실에서 순번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읽는다. 혼자 무얼 하다가도 문득 다시 본다. 이 즐거움을 알고부터 나는 필사적으로 쓴다. 누구더러 써보라, 하는 이유는 생각으로 담고 있을 때와 그 순간 말로 듣거나 읽을 때와 다른, 더 깊은 이해가 열린다. 더하여 할 수만 있으면 드러내어 같이 나누라고 이른다. 누가 본다는 것, 혹은 누구의 묵상을 본다는 것, 그리하여 저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읽히고, 내 이야기가 저의 이야기로 들려질 때 우리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된다. 내가 누구의 일로 주께 아뢰고 고할 때 단지 의무감으로 누굴 위한 중보가 아니라 나를 드러내고 내어드리는 일이다.
열에게 이와 같은 유익을 말하면 하나도 이를 하지 않는다. 글로 쓴다는 것이 읽는다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수고여서, 읽기도 버거운 터에 쓴다는 것은 부담스럽다. 더욱이 쓴 것을 허물없이 나눈다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오랜 시간 글 쓰기를 가르치면서 ‘쓸 게 없어요!’ 하는 말보다 공허한 게 없었다. 쓸 게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을 그만큼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가족 간의 분리과정이 필요하듯 자신과도 분리가 필요하다. 오늘을 사는 내가 나이지만 나는 정작 하나님의 나라에서 너와 우리에 속한다. 다시 말해 기도의 절반이 자기 필요한 것을 아뢰고 구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예수 앞으로 몰려왔다. 후에 저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쳤다. ‘나’의 문제에 함몰된 삶은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늘 기도부탁을 하는 누구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인데, 저는 자기 일 때문에 정작 한 번도 나의 안부나 교회의 상황을 물은 적이 없다! 예수가 결국 십자가에 달린다 해도 그렇듯 왕으로까지 옹립하려 들끓었던 저들의 관심은 더 이상 자기 문제가 아닌 상대로 돌을 던지고 조롱을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오늘 본문 14절, 예레미야는 외친다! “너희는 모여와서 그를 치며 일어나서 싸우라.” 결국 오늘의 이 모든 문제의 주모자는 하나님이시다. “보라 내가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작아지게 하였고 사람들 가운데에서 멸시를 받게 하였느니라(15).” 왜 그러시는 것일까?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11:2, 28:26).”
이제 시편으로 정리하면,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49:1, 3).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안다는 것은,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4).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내 삶에 작동될 때,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6-8).
그러니 누가 누굴 구원하려 그 값을 대신할 수 있겠나? 하물며 자기 자신을. 그러므로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다 헛되고 헛될 뿐이어서,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15).
이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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