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전봉석 2023. 7. 6. 05:13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 6:1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 63:1

 

 

 

우리의 영성은 현실에 바탕을 둔다. 뜬구름 잡듯 하지 않는다. 영성이란 하나님만으로 뿌리를 내린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오늘 시편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서 지은 것이다. 이는 찬송이면서 기도다. 기도이면서 삶이다. ‘물이 없고, 황폐한 땅’에서 우리 영혼과 몸이 주를 갈급해하는 것이다. 문만 열면 사연 없는 집이 없고 저마다의 광야에서 목마르고 황량하다. 유다의 죄악을 다루고 있는 에스겔서에 앞서 다윗의 영성으로 오늘 나의 날들을 주시하게 된다. 에스겔서는 산당을 멸하고 우상숭배를 심판하실 것을 알린다(1-7). 예루살렘의 멸망 가운데서도 일부 ‘남겨둔 자들’과 포로로 끌려가 자신들의 가증하였던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예언한다(8-9). 이 예언의 진정성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심이다(10).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심판하실 때 시체들이 우상숭배 현장에 있을 것이다(11-14). 우상숭배자들의 최후와 그 허망함을 듣다보면 마음이 어렵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정작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확신과 기도와 그에 따른 바람을 마땅하게 여기며 하나님 또한 필요에 따른 것은 아닐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의 구원과 그 필요를 채워줄 이, 우린 하나님 앞에 붙이는 ‘~의’ 소유격에 우선하여 의미를 두고 사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하나님. 인자와 긍휼‘의’ 하나님을 붙들고 정작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가령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요구하는 그 모든 게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할 때 우린 끊임없이 같은 요구를 되풀이 한다. 실상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혹은 누구의 신념처럼 마음의 위안과 평안 정도로의 하나님으로 족하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더하실 땐 반감과 원망이 먼저 인다. ‘그래서’ 안 믿어! 하는 식으로 마치 스스로의 신을 선택하는 것 중에 하나 정도로….

 

우린 우리의 죄를 직면하고 직시하고 직고해야 한다. 이를 인정하는 일은 껄끄럽고 두렵다. 들추기 싫어 마음 저 깊이 묻어두었다. 하나님은 오늘 우상숭배를 심판하실 때에 ‘이스라엘 산’을 지목하고 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2-3).”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명산 곳곳에 사찰이 있다. 어디 영험하다는 곳이면 뭔가 기이한 것들로 표식을 한다. 그 앞에 합장을 하거나 소원을 빈다. 이에 바울 사도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11-13).”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1-2).

 

우리가 눈을 들어 산을 두리번거리는 이유, 뭔가 도움을 구하고자 하여 어디 용한 의원을 찾듯 교회를 찾고 어느 목사의 특별한 은사를 따라가는 따위의 일들. 사람을 보고 혹은 그곳의 분위기나 우리를 압도하는 무엇을 따라 행하려 하는 일들. 이러한 것들을 ‘향하여’ 눈을 드는 일. ‘향하여’의 원어는 ‘엘’이다. 전치사로 어디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할 때 그 이유나 목적은 자신의 어려움을 모면하고 해소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는 심정으로 눈을 들어 곳곳의 산을 바라보듯 어느 교회, 누구 목사의 어떤 간증이나 사역에 혹하여 그리로 달려가는 것을 신앙으로 삼는다. 필요에 의한 몸부림이다. 필요만 충족될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이 하나가 아니어도 되고 어떤 하나님이어도 좋다. 졸지에 누가 ‘어머니 하나님’을 운운하며 ‘다른 교회’로 갔다. 누군 소원을 빌다 포기하고 더는 교회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더러는 교회 안에서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교횔 떠났다.

 

어릴 때 교회에 열심이고 예배에 열광하던 아이는 청년이 되면서 이 교회 저 교회, 이 산 저 산 기도원을 쫓아다녔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집안에 부모와 일가친척이 대체로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 부친은 술타령을 하다 일찍 죽고 모친은 심드렁하니 교회 일에 열심인 듯하다 들어앉았다. 고모는 ‘남녀호랑개교’로 이모는 ‘여호와증인’으로… 사방팔방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각자의 ‘산을 향하여’ 눈을 든 것이다. 저마다 자기 교회 타령이니까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인지 하나님을 빙자하는 각자의 또는 개교회의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이때 다윗은 그의 영성이 철저하게 현실을 딛고 선 것이라, 저는 단언하기를,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말씀에 의지하는 삶. 말씀 위에 짓는 집이 아니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7).” 그러니 누구에게 전해들은 소식으로는 저 아이도 이제 마흔을 훌쩍 넘기고도 이 교회, 저 교회로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그러느라 아이의 아빠는 누군지, 지금 같이 사는 이는 또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성경은 소리치길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뜬구름 잡듯 이상을 쫓는 일도, 아등바등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일도 모두가 헛되다.

 

솔직히 우리 안에 만족함이 없어서다. 그 만족은 육신의 욕구나 이상의 이상으로 그 추구하는 바가 하나님을 지나친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정작 자신이 바라고 계획한 바를 실행할 수 있는 신을 찾는다. 용한 무당을 찾듯 어느 교회를 또는 어떤 목사를 찾아가는 이들은 정작 말씀 또한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한다. 가령 친구의 성경 읽기가 이상하다 했더니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또는 무슨 역사를 바탕으로 성경을 짜깁기하여 혼합하여 읽는다. 물론 이를 시작하여 선한 의도로 성경 읽기를 유도하려 한 의도였겠으나… 그러니 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왜 거기서 하나님은 그런 일을 행하신 것일까?’ 하는 의문만 든다.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막무가내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싫다! 개연성도 없다! 느닷없이 불행이 닥친다.

 

나는 저가 성경을 읽는 일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조만간 ‘말도 안 되는 일’로 성경 읽기도, 교회 다니기도 모두 내팽개칠 것 같다. 아내 때문에, 성가대에서, 어떤 일로 분주하고 교회에 시간을 ‘뺏기는 것’에 은근히 불만이 쌓여가는 것 같다. 지난주에는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출근하듯 교회에 가서 뭘 했고, 뭘 했고… 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니 그러지 마라, 할 수도 없고 그저 참고 하라, 할 수도 없고… 부디 성령으로, 주의 영이 저의 심령을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아니면 우린 졸지에 평생 성경을 전하며 말씀으로 살았다는 목사가 은퇴하면서 졸지에 무슨 ‘피복음’이 어떻고 하면서 자신이 평생 붙들고 온 목회를 부정하며 엉뚱한 길로 간 것처럼 그리될 수 있다.

 

우리의 교만은 순간이다. 매순간 틈만 나면 ‘내가, 우리 교회가, 우리 목사님이’ 하는 식으로 하나님보다 앞세우게 된다. 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곧 자신이 자신을 고집할 때, 그 생각과 신앙을 확신할 때 삐끗하여 우상으로 섬긴다.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하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하여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 이는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어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우린 본래 그러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오늘도 시편으로 선다. 다윗은 유다 광야에 있다. 사는 게 모래 씹는 일 같다. 우환이 끊일 날이 없다. 기도하고 눈을 뜨기 무섭게 성질이 난다. 어떤 짜증이 또 후회가 반복된다. 광야란 메마르고 척박한 땅이다. 흔히 ‘풍요 속에 빈곤’이라고 남들 보기에는 어려움이란 있을 게 없는 사람 같은데, 우린 모두 저마다의 ‘유다 광야’에 선다. 거기에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는 신앙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매순간을 부여잡아야 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뢴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내가 어떤 마음을 누구에게 쏟아내면 이는 화가 되어 분함만 더한다. 이를 하나님께 아뢸 때 우리의 간절함은 문제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는 데로 달려간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143:6).

 

다른 무엇으로 대신하여 하는 모든 노력이 우상숭배다. 성경읽기? 기도하기? 교회에 헌신하기? 모두가 필요하지만 ‘먼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 우선, 오직… 다윗이 뿌리 내린 영성은 하나님 그 자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2-3).

 

한 마디로 죽어도 좋다 이거다. 주의 인자하심은 고작 내 생명 따위로 바랄 수 없다. 자식들 일, 사업, 심지어 교회를 이뤄가며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서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다 소용없다. 주의 인자하심만을 바란다. 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나님이 날 죽이실 거다. 내 요구는 들어주지도 않을 거다. 그러신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25:8).

 

곧 우리의 필요에 따른 하나님‘의’ 무엇이 아니다. 어떠하든지 나는 죄인이다. 선한 의도? 어떤 희생? 평생의 헌신?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훔 1:7).” 하나님이 다 아신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63:4).

 

어떠하든지,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6-7).

 

할 때에 성경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오직, 그런즉, 먼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이때에 광야는 유리한 고지였다. 나의 고단한 하루가 복이었다. 나의 육신의 약함이 광야가 되어,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8).

 

이로써 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28: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