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전봉석 2023. 7. 7. 04:42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에스겔 7: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시편 64:9

 

 

 

말씀이 전하여지고 이에 심판이 이를 것을 경고한다.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저는 ‘때리시는 이’시다. 그의 긍휼하심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을 거두시면 더는 자비가 없다. 심판은 처절하고 철저할 것이다. 에스겔이 이 예언을 전할 때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지 5년(B. C. 593)이 되던 해로 바벨론의 3차 침략으로 유다가 멸망하기 7년 정도 남은 때였다. 심판이 임박하였고 이를 여러 번 예언하는데도 유다는 듣지 않는다. “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이 피며 교만이 싹이 났도다(10).” 그러나 누구 하나 돌이켜 회개할 마음이 없다.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한다.

 

결국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그들도, 그 무리도, 그 재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며 그 중의 아름다운 것도 없어지리로다(11).” 연거푸 들려주는 예언의 말씀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완고함과 그 교만의 싹수도 다르지 않다. 죄가 짙을수록 종말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게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끝나다’, ‘임박하다’, ‘가까이 이르다’ 하는 표현이 다섯 번씩 반복된다. 유다의 종말을 알리고 돌이킬 수 없음을 강조하는데도 저들은 7년 후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급하게 알리는 경고음에 왜들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일까? 죄가 관영하였다는 것은 더는 죄를 죄로 여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죄가 가득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신다. 노아의 때에도 120년의 긴 시간을 기다리며,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사람들의 죄악은 관영하여져 갔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죄가 가득 차기까지 회개의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아브라함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가난안의 죄가 가득하기를 기다리셨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15:16).”

 

우리가 오늘을 종말의 때라 하는 까닭은 죄가 더는 죄 같지 않은 날들로 가득하여지는 일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때를 가리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길을 걷다 자주 느끼지만 포교를 위해 다가오는 무리들이 많다. 의식은 타협을 일삼고 스스로는 괜찮다며 이를 두둔한다. 곧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이는 점점 더해서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9).”

 

교회가 무엇을 잘못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본디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 된다. 가족에서부터 가까이에 이르기까지 알만 한 사람의 박해가 더 심하다. 그렇게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2).” 이는 이 시대에도 점점 더해 간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 더욱이 안 믿는 가족 사이에서 홀로 신앙을 지킨다는 일은 투사와 같다. 날마다 전쟁이다. 그 씨름은 혈과 육의 문제가 아니다. 영적 싸움이다. 그리하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14).”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가운데 조선에는 복음이 뿌리내렸고 오늘 날 우리나라는 복음을 받던 나라에서 세계 열방으로 복음을 전하는 마지막 때의 교두보가 되었다. 이를 듣고 떨며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어서, 오늘의 현상을 분별할 줄 아는 게 지혜 있는 자이다.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시 64:5-6).

 

오늘 시편의 한 단적인 묘사와 오늘 에스겔의 진술은 일치한다. “너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땅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겔 7:2-3).” 이를 듣고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가로젓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보인다. 그리고 들린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3).”

 

때가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리하여 혼재된 가운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이 어렵다 해도,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하시는 경고의 말씀에 우린 멈춘다. 현재 어떤 고통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확성기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헤아릴 수 없는 슬픔’ 가운데서 주의 진정하신 사랑을 알게 되는 것,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9).” 모두에게 전하여지나 들을 귀 있는 자들만 들을 뿐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하셨으나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 12:2).” 우리가 저들을 안타까워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회개할 기회를 더해야 하는데 오히려 덩달아서 타협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하나님을 모실 자리에 나의 욕구와 불만으로 채워진다. 성경은 오늘도 일러,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하시는 말씀에 따른다. 그러므로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이와 같이 성경은 동일하게 오늘도 예언하신다. 심판에 따른 경고의 말씀이다. 이를 우린 날마다 묵상하며 때를 기다린다. 이를 준비하는 자로 “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겔 7:6).” 이와 같은 촉박한 말씀에 마음을 동인다. 그때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저마다의 신앙과 그 확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더러는 말씀과 아랑곳없이 자기 의지대로 산다. 그런 이의 특징은 온통 자기 이야기뿐이다. 상대의 사정이나 어떤 말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다. 그렇듯 자기 말만하다 끝내기 일쑤다. 모두는 저마다의 자기 사정으로 급급하지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다. 친밀하여 서로가 못할 말이 없는 사이라 해도 보면 말하는 이만 또 말한다. 온통 자기 할 말만 늘어놓고 자기 문제에만 집중한다. 정작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다. 한데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나는 가끔 이 말씀이 두렵다. 누가 날 이해해주고 위로받기는 원하나 과연 나는 누구를 그리 대하고 있는지, 그럴 능력은 있는지. 온통 나의 사연만으로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할 때에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1-22).”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나로 오늘 하루를 더 얻게 하셨다. 어쩌다 하루는 없다. 나의 하찮은 한 날의 오후가 누군가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마지막 순간이기도 하다. 긍휼의 히브리어 원어에는 ‘어머니의 자궁’이란 뜻이 있다. 자궁 속의 아이와 같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신다. 그러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겔 7:9).” 이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가 아니다. 우리에게 성경이 주어진 것은 은혜 중의 은혜이다. 구약은 이러한 은택에 비해 척박하였던 율법의 시대였다.

 

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슥 11:6).”

 

이와 같은 말씀에도 오싹하니 두려움이 일지 않는다면 더는 뭐라 한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2-23).” 일에 우리 안의 거룩한 두려움, 주를 경외함이 지혜이고 복이고 은혜이다.

 

오늘 에스겔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아니 그 시대에서 아무렇지 않게 묻어 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경고음 같다. “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이 피며 교만이 싹이 났도다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그들도, 그 무리도, 그 재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며 그 중의 아름다운 것도 없어지리로다(겔 7:10-11).” 이를 우린 피부로 느끼고 그 실상을 목격한다. 아무렇지 않게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일삼아 여러 겹으로 묶어 죄의 수레를 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더는 문제의식이 없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암이 무서운 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느닷없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12).” 그때에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이며 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6-27).” 점입가경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짓이나 꼴이 가관이라. 이를 점점 더 재밌어 하고 즐기는 것도 같은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곧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우리의 영적 수준이란 점점 더 심령이 가난하여져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그리하여 말씀 앞에 온유하여서 주신 한 날의 삶으로 족한 줄을 알고, 남을 긍휼히 여김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우린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하여 오늘 다윗은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64:1, 7-8).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묵묵히 또한 무던하게 달음질한다. 이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하여,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64:9).

 

이에,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