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전봉석 2023. 7. 8. 05:08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8:18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편 64:10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이 서술되고 있다. 사로잡힌 지 6년째인 B. C. 592년 6월 5일에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에게 나온 때에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환상을 보이신다(1-4). 북향 제단문에 이르렀을 때 그곳을 ‘질투의 우상’의 자리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던 곳이다.

 

“내가 일어나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 내가 곧 엎드리니(3:23).”

 

그 하나님의 영의 안내로 성전 경내에 우상숭배의 행위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5-18). 우상의 형상이 벽에 사방에 붙었고, 성전문과 연결되는 담 안의 비밀 공간에 야아사냐를 비롯한 70인의 장로들이 각종 우상의 형상을 그려놓고 숭배의식을 거행하고 있던 것이다(7-13). 성전 뜰 북문에서는 여인들이 페니키아 지역의 우상인 담무스를 위한 종교 의식을 하고 있었다(14-15). 성전 안뜰과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25인의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과 24반열의 제사장들이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태양신을 향해 우상숭배를 행하고 있기도 했다(16).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자행되고 더럽히고 있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에 의해 건축되고 유다 제 11대 왕 요담에 이르기까지 거룩하게 잘 보전되었다가 12대 왕 아하스에 이르러 앗수르의 우상 제단을 세우면서 성전을 더럽히기 시작하였다. 이를 히스기야 때에 헐었다가 뒤에 얻은 아들 므낫세가 다시 일월성신을 위한 제단을 쌓고 아세라 우상을 세움으로 더럽혀졌다. 이어 요시야가 우상들을 제거하였다가 여호야김 때에 이르러 다시 성전은 우상들로 더럽혀졌다.

 

이렇듯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 우상들로 ‘만신전’ 같이 전락하여 소위 굿집이나 절당 같이 사방에 각종 귀신들의 형상이 그려지고 곳곳에 이방 신들이 세워졌다. 결국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이를 더럽힌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신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그의 거룩한 이름을 두시는 곳이었다.

 

하여 바울은 우리 몸을 이에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하고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곧 우리 자신을 각종 죄와 우상으로부터 거룩하게 보존하기를 하나님이 그 거룩하신 이름과 영을 두시는 곳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이 B. C. 592년에 있었을 저들의 더럽고 추하고 기괴하기까지 한 우상숭배의 삶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믿는 자들도 명품이면 사족을 못 쓰고, 예술을 운운하며 각종 형상의 문양이나 모양을 한 것이면 저절로 감탄하고 이를 소유하고자 한다. 심지어 스스로의 몸에 문신을 하여 그저 유행입네, 다들 그러고 사네, 하면서 자기들 좋을 대로 믿는다.

 

찬양은 뉴에이지 음악 풍으로 흐르고 저마다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하나님 하나쯤을 여느 신들 가운데서 고른 것처럼 십자가를 목에 걸고 귀에 꼽고, 거꾸로도 하고 뉘이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야단법석이다. 오늘과 같은 말씀 앞에서 행여 나는 알고도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게 허용하는 어떤 형상이나 모양이 없나 돌아보게 된다. 광고기법의 하나로 우상숭배나 성적행위를 연상케 하거나 온갖 신화에 나오는 아무개 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제품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 우린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덩달아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소비한다. 이를 제지하고 그 의미를 말하면 같은 믿는 사람들로서도 이상하게 취급한다. 그러나 말씀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린 고리타분하고 꼰대 같고 고지식한 사람이어야 한다. 모르면 몰랐지 그 의미를 알고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허용할 수는 없다. 그저 운동이라면서 ‘요가’면 어떻고, 그저 커피라면서 그 컵의 문양이 어느 이방여신이면 어떤가? 그저 서로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성전 꼴이 되었다! 노아의 때에도 그러했고, 소돔과 고모라 성의 분위기도 그러했다. 이에 심판을 운운하면 농담으로나 듣는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오늘 우리 믿는다는 사람들도 롯의 사위들과 다를 게 무엇일까? 언제부턴가 우린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해졌다. ‘원하는 대로’, ‘소원을 빌어봐’ 하는 식으로 교회도,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도, 그 꾸며지는 모양도 오늘 본문의 유다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3-25).”

 

그러니 과연 오늘 나는 이 말씀을 듣고 찔리기는 한 걸까? 설마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람들처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러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4, 5-58).” 어느 시대에나 그럴 테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린 어쩌면 이러고 사는 것에 당당하여서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어쩌면 우린 ‘라멕’으로 산다. 자신이 받은 상처, 그 가난이나 멸시로 앙갚음하려 사치와 온갖 자기만족이라는 우상을 껴안고 산다. 또는 누군가로 상함을 입고 이에 노여워서 거침없이 ‘소년을 죽였노라’ 하는 ‘라멕’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나는 종종 학교폭력을 다룬 영화를 찾아서 보곤 하는데, 그때 그 나이 때는 그런 게 왜 그렇게도 신나고, 분하고, 즐겁고, 수치스럽기도 했는지… 그 시절 일들을 생각하다 운다. 그러다 문득 하나님이 나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로 어쩌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게 하고 책을 읽게 하면서, 나는 아이들의 힘겨움을 들으면서 나의 '상처나 상함'을 자연스럽게 치유 받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나는 상상 이상으로 지옥 같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학창시절은 내게 모든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살게 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수많은 어린 ‘라멕’들을 만나고 저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쓰게 하고, 같이 울고 웃으면서 나 역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위로 받았던 것 같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심판 중에도 성립된다. 죄로 인한 우리의 허물과 실수에서 우리가 당한 고통으로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게 하였다. 지금도 드물게 연락이 오지만, 글쓰기라고 하는 특성상 서로 상처를 공유한 사이는 그 기억이 고맙기만 하다. 가령 어떤 아이는 유난히 아빠 자랑을 많이 했다. 후에 저는 글에서 아빠의 잦은 출장과 외도를 밝혔다. 아빠의 사랑을 구애하는 외로운 아이였던 것이다. 어떤 아이는 유난히 밝고 친절하였으며 자기 것을 주는 것에 서슴지 않았다. 후에 알았지만 아이는 ‘빼빼로데이’에 한 번도 빼빼로를 받은 적이 없는 ‘은따’였다.

 

내 기억에 아직도 선명한 ‘나의 어린 라멕들’을 위해 기도한다. 어떻게 어디서 성인이 되어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는 문득 막내 동생이 요즘 어느 복지관에 나가 무슨 교육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저런 생각에 한참동안 시선을 놓고 있기도 하였다. 그렇듯 나의 유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그때마다 어떤 친구가 또는 선생이 혹은 나보다 더 처지가 어려운(?) 누군가가 늘 곁에 있었다. 그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은인들’을 위해 기도한다. 누군 이미 돌아가셨고 누군 어디에서 무얼 하고 살고 있는지 알 수도 없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는 멈추신 적이 없다.

 

나는 누구의 걱정을 들으며 주가 함께 하심을 확신한다. 그런 가운데 저가 주의 자녀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하나님은 기어이 돌이켜 오늘의 나와 같이 주의 뜻 가운데 세우신다. 어쩌다 30년을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저들 이야기를 듣고 살았을까? 저 아이들의 상처와 상함을 자연스럽게 글로 쓰다 같이 울기를 몇 번이었는지… 때론 뭐라 위로 할 말이 없고, 나 또한 '내 안에 나의 어린아이'는 여전히 외롭고 힘들어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아이의 원고를 읽다 같이 울기도 했던 것이 그 때문이었겠다.

 

오늘 이스라엘의 저와 같은 형국이 결국 저들만의 문제이겠나? 이를 성경에 기록하게 하시고 오늘 우리로 읽게 하심은 우리 또한 같은 것을… 저들보다 더한 허용과 묵인과 암묵적인 참여를 경고하고 계심이다. 이를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은 ‘질투의 우상’으로 ‘소멸의 불’이 되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우리 일상을 사르실지 모른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 이에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다. 들을 귀 있는 자이다. 그저 농담으로나 듣고 ‘꼰대’로 취급하며 교회 안에서도 상종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된다 해도,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28).”

 

그럴 수 있도록 하나님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은혜로 찾아오셨다. 나의 노여움이 어느 순간 찬송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남은 노여움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이를 나는 나의 일생에 은택으로 입고 살았다. 그리하여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사 33:14).” 분명 어떤 날에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3).”

 

나는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이 보는 환상, 그 이스라엘 선민들의 실상을 상상하면서 무섭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다. 무서운 것은 행여 나 역시 다를 게 없음을 두고서고, 감사하는 것은 이를 인정함으로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데 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나에게 넘치는 은총으로 더하셨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그러므로 나는 이제 고백한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9:7-12).

 

이를 확신함으로,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64:1).

 

하고 주께 아뢴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결국,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9).

 

곧 있어 온 천하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이는,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