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에스겔 4:4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시편 61:3-4
남유다의 심판에 따른 예언의 연속이다(3:16-24:27). 더욱이 오늘 말씀은 B. C. 593년 4월 12에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이다(3:16-7:27). 선지자 에스겔은 파수꾼으로 한시적으로 사역이 보류된다(3:16-27). 하고 예루살렘 멸망에 따른 네 가지 예언이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된다. 첫째, 토판에 그림을 그리도록 하신다(1-3). 둘째, 저들의 범죄기간 동안 좌로, 우로 모로 누워있게 하신다. 북이스라엘의 범죄로 390일 동안 좌로 눕고(4-5), 남유다의 심판기간으로 40일 동안 우로만 눕게 하신다(6). 여기서 390일은 이스라엘의 분단 때부터 포로귀환이 이루어질 때까지인 390년을 의미한다. 40일은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지기까지 40년을 상징한다.
셋째, 에스겔을 동여매어 예루살렘이 포위에서 풀릴 때까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실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7-8). 넷째, 선민의 범죄로 야기된 예루살렘 멸망 전후 극심한 기근을 예고하고 그 기간 부정한 떡을 취할 것을 명하신다(9-17). 선민이 범죄한 동안 390일 동안 20세겔의 혼합한 떡과 6분의 1의 물만 먹도록 명령하시고(9-11), 혼합 떡을 만들 때는 인분으로 굽게 하시고(12-15), 이러한 명령은 곧 따를 극심한 식량난과 연료난에 허덕이게 될 것을 상징한다.
이어지는 5장 1-4절에서 에스겔로 수염을 깎고 머리털을 날카로운 칼로 밀어 그것을 3등분하여 3분의 1일은 성안에서 불사르고, 3분의 1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3분의 1은 바람에 날려 흩어지게 한다(1-2). 이는 예루살렘 거민 3분의 1은 기근과 질병으로 죽고, 3분의 1은 침략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3분의 1은 열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에스겔의 머리털과 수염 일부를 옷자락에 싸고 또 그 가운데 얼마를 불에 사르도록 명령하신다(3-4).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 때 일부는 남겨 보존하고, 동시에 일부는 고통 중에 괴로워할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내용을 성경으로 읽고 묵상할 때 모든 예언과 상징은 그대로 이루어져 특히 선지자 에스겔의 사역이 역동적인 행위로 상징됨을 볼 수 있다. 물론 이사야나 예레미야 역시 다르지 않으나 유독 에스겔이 심하다. 이는 어느 때보다 선민들이 강퍅하고 패역하여 저들로 이를 알게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반증한다.
이로써 우린 수천년 전의 일을 오늘의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낸다. 그러할 때 노아는 당시 아무 일도 일어날 거 같지 않았지만 이에 말씀을 주목하고 순종하였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 이에 마리아도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 2:5).” 이렇듯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일찍이 말씀에 주목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우리가 말씀을 받아낸다는 것, 때론 다 지난 일인 것 같고 ‘저들의 이야기’로 국한지어 생각할 수 있으나… 나는 어제 친구에게 그러해서 모든 성경은 예언의 말씀으로 우리 앞에 이루어질 일을 반영한다고 설명하였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곧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로 끝난 게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즉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그러므로 우린 읽고 마는 성경으로, 알고 마는 내용으로, 기억하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오늘 에스겔은 앞으로 닥칠 일뿐만 아니라, 전에 있었던 일들에까지도 몸소 예언하고 이를 알리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도 이와 같은 의미나 그 설명을 알지 못했고, 알면서도 듣지 않았다. 우리의 신앙은 태도로 본질이 나타난다. 하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하고 단정하였다. 이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18).”
바울은 이로써 스스로를 구속하였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이를 위해 저는 얼마나 필사적이었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 하여 저는 자신을 날마다 죽였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이를 우리 자신도 알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처럼 말씀 앞에 묵상하고 이를 기록하며 마음을 다잡을 때는 될 것 같다. 하나 곧 걱정과 염려가 쉬지 않고 내 영혼은 흔들리기 일쑤여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러니 내 몸도 내 마음 같지 않은 것을 누굴 믿고 신뢰한단 말인지. 해서 바울은 외쳐 할 수 있을 때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오늘 본문의 이와 같은 행위로써의 예언의 증표는 우리로 좀 더 강렬하게 알아듣고 행함으로 단지 이것이 상징적인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닌 것을 일깨운다. 회개는 단순히 동감하고 수긍하여 후회하고 돌이키는 정도가 아니다. 그 정도였다면 바울이 왜 그토록 자신을 날마다 죽이고, 또 몸을 쳐 복종시켰겠나? 우리 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고로 오늘 말씀을 한 구절로 정의한다면,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누구라도 이에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이는 두려운 말씀이지만,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잘하고 싶은데, 더는 주를 멀리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덜컥, 어떤 일이 터지면 순식간에 염려와 근심으로 사로잡히기 일쑤고, 누구 탓으로 돌려 원망하길 주저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비관하듯 하나님의 섭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이에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듣거나 묵상할 때 그것이 나를 찌르기도 하고, 기대하여 소망하게도 하여 참고 견디는 원동력이 되게 할 때 산다. 그런데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고도 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5-16).” 어느 순간 설교가 불편하다. 말씀이 거북하다. 그저 밍밍하다. 새로울 게 없다. 싶을 때 그 영혼은 어디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7-18).”
곁에서 아무리 권하여도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 이러는 것이 부담스럽게 여겨질 때 그 영혼에 적신호가 들어온다. 그저 들어주고 자기 말에 귀 기울여주길 바라는 것은 늙으나 젊으나, 신앙이 좋거나 나쁘거나 다들 똑같다. 나는 안 그런가? 내 말에 동조하고 이를 따를 때 우쭐하지 들으려 하지 않거나 멀리할 때면 나 역시 상처받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외면하고 모르는 척 한 게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는 돌아서서 저를 탓한다. 내 책임 아니다. 스스로 변명하고 이를 확신한다. 이는 종말의 때에 나타날 징조들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8).” 그러면서…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9-12).”
이에,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이를 위하여,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3-14).”
자칫 우리 스스로 얼마나 무력하게 허물어지곤 하는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나는 이를 막기 위해서도 묵상을 글로 쓴다. 묵상을 실상으로 안다. 먼저 내 이야기로 들려져야 말씀이 찌르거나 어루만지신다. 오늘 에스겔 선지자는 몸소 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말이다. 곧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더딘가? 혹은 설마, 싶은가?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차라리 좀 맞자! ‘어떤 일’로 괴롭다면 그것으로 복이다. 더는 그런 것조차 느낄 능력을 상실한 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이에,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61:2-4).
시편을 묵상하면 답이 보인다. 시편으로 살고자 할 때 주께 아뢰게 된다.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렘 16:19).” 이와 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로 이미 우린 에스겔의 시대보다 은혜로 산다. 결국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훔 1:7).” 고로 오늘을 사는 가장 확실한 선은 하나님 앞에서 하루씩, 하루를 더하여 사는 일이다.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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