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전봉석 2023. 7. 5. 04:07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 5:13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시편 62:9

 

 

 

시편의 위로가 없다면 우린 어찌 살 수 있을까? 예루살렘 심판 멸망에 따른 4가지 상징적인 예언을 들으며(4:1-5:4) 하나님의 준엄하심 앞에 두려워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란 생각을 한다. 심판의 원인은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고도 이방인들보다 더 못한 죄악 가운데 행함을 본다(5-7). 이방인들 앞에서 그들의 죄악으로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선언하신다(8-12). 그럼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해소될 것을 알리지만 저들을 향한 수치와 조롱거리가 될 것을 예고한다(13-15). 예루살렘을 칼로, 기근과 질병으로 심판하실 것을 강조한다(16-17).

 

이러한 말씀을 읽다 보면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든다. 어찌 저렇게 주의 말씀을 거역할까, 싶다가도 그것이 오늘의 나 자신인 것을 생각하고 놀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이를 듣다 오늘 시편을 읊조리게 된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62:5-8).

 

오늘 본문으로 우리가 사는 존재의 이유를 되새기게 된다. 유다는 선민으로서 하나님을 기망하였다. 이방인들보다 못한 행위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만 하였다. 오늘 7절,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더한 저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업신여김이다. 모름지기 지난 날 나의 행위가 그러하였음을 고백한다.

 

일생에 믿는 자들과 살면서 교회 안에서 생활하다시피 하고도 안 믿는 사람들보다 못한 죄로 하나님을 속이고 교회 안에서 위선을 떨며 살았다. 그때에 나를 오늘의 유다를 치시듯 돌이켜 주 앞에 바로 서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안다. 차마 여기에 나열하여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두고 나는 고개 숙여 주 앞에 부끄러움을 호소하게 된다. 그땐 참 겁 없이 살았다. 그때마다 ‘에스겔’이 내 곁에 있었고 ‘예레미야’가 나를 위해 애가를 부르며 애통해하였던 것을 인정한다. 저들을 생각하면 내가 사랑의 빚을 참 많이 지고 살았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147:19-20).

 

돌이켜 오늘의 나로 세우신 데 대해, 죄를 두려워할 줄 알고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주께 아뢰게 하심을 생각하면 그의 은혜가 참으로 지극하시다. 나의 죄가 어떠하였다 해도,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로써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아니면 나의 죄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 그런 가운데서도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왜 나 같은 죄인을 그처럼 사랑하시는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갚을 길 없는 주의 은혜를 묵상하고 있을 때면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진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살았었는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그때 함께 어울리는 자들이 또한 대부분 그러해서 우린 죄를 짓는 데 있어 죄를 죄로 인식하기 싫어하였다. 그때는 겁도 없이 나는 죽어도 주를 찬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다른 것은 차치하고 나로 주를 사랑하게 하시는 것이 신기하였다. 느닷없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심으로 영원한 형벌을 무서워했다. 내가 즐기던 것들을 하나둘 버리게 하시고 무턱대고 새벽예배에 나가 그처럼 울리셨다. 한참 뒤 담임목사는 조심스럽게 묻기를 누구, 집에 혹시 죽을병에 걸린 자가 있는가? 하고 물었을 정도니까! 그땐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새벽예배만 가면 어깨를 들썩이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저 송구하고 부끄러워 잘못했다는 말과 용서해달라는 말만 되풀이 했던 것 같다. 그렇듯 1년 반을 새벽예배와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고는 이내 신대원에 들어갔다. 것도 돌이켜보면 어릴 적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하였던 것을 기어이 이루게 하신 셈이다.

 

한땐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는 안 믿는 가족들로 인해 눈물로 호소하며 주 안에서 씨름하는 이들을 볼 때면 내가 왠지 염치가 없어 부끄럽다. 하나님은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2-14).”

 

신앙의 어떤 주기가 있는 것 같다. 한동안 눈물 흘리며 죄를 고하며 기도하게 하시는가 하면 또 한동안 어쩔 수 없어서라도 성경만 읽게 하신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면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바로 그 직전까지도 글방으로 오던 아이들과 주일에 예배에 나오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순간 증발한 물방울처럼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도 나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세상이 텅 빈 듯 하여 더는 할 게 없어서도 성경만 읽었다. 존 번연으로 시작하여 칼빈이니 어거스틴이니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니 하는 이들을 신앙서적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다. 여러 목사들의 설교 영상을 찾아보았고 어떤 이의 뜨거운 열정적 설교에 놀라고, 존 파이퍼 목사와 같이 그저 성경적으로만 설교하는 이의 놀라운 동영상을 보면서 ‘내가 왜 이런 걸 좋아하지?’ 하는 의아함도 들었다.

 

어떨 땐 혼자 두시고, 어떨 땐 감당하기 어려운 이를 붙이셔서 저로 덩달아 속앓이하며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실 때도 있다. 이럴 때가 있으며 저럴 때도 있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이를 누가 변경하겠나? 다만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하여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그 모든 주기마다 하나님의 섭리는 있었다. 이에 집중하게 하시려고 때론 혼자 두시고, 때론 정신없이 어려움에 몰아세우기도 하신다.

 

그때에 죄란 자기 고집대로 스스로 서려 하는 것이다. 오늘 8, 9절 말씀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에게 벌을 내리되 네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 우리로 이방인의 본이 되게 하심을. 우린 소금과 빛의 사명이 있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또한 그릇 행하였을 때 저들의 조소와 멸시를 달게 받게도 하신다.

 

결국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삼상 2:25).” 그러므로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2-3).”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마주할 수 있는 게 은혜이었다.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5:13).”

 

이처럼 죄를 죄로 징계하심이 사랑이다. 그냥 끝내 놓아두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곧 가장 무서운 저주는 더 이상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내버려두시는 시기가 길어질수록 우리 영혼은 끝 간 데 없이 죄악 중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런 시절을 보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러했었다.

 

아직도 거기 있는 이가 있고, 이제 나는 여기에 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그리하여 말씀은 모두 예언이다. 계시이다. 주가 열어보이시기까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는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는 오늘 17절 마지막 말씀이 두려우면서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함으로 굳이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그런 어리석은 자로 살지 않게 하시기를. 행여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0-31).” 이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2:1-2).

 

이는 놀라운 신앙으로 ‘잠잠히’와 ‘전심으로’는 하나의 뜻이다. 오직 주만을 의뢰한다는 것,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이는 다윗의 신앙으로 현실에 뿌리를 둔 것임을 시편은 알 수 있게 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이를 위하여,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138:1).

 

흔히 영성은 도덕이나 관념의 의미로 이해하는데, 우리가 일상에 뿌리를 두고 지긋지긋한 날을 삶으로 살아서 느끼고 표현하는 그리스도인으로의 방식이다. 숨길 수 없는 그리스도의 향기다. 그 속이 다 읽히는 하나님의 편지 같은 사람이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3:11, 44:6).” 이 절대적인 사실 앞에서, 우리가 고작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 때,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9).

 

그럴진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5-8).

 

그러므로,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