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전봉석 2023. 7. 10. 05:29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에스겔 10:18-19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편 66:20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을 구분하여 의인의 이마에 표를 하고, 이를 수행하는 천사들이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예루살렘 성읍에 살포한다(1-2). 영광의 그룹들이 성전 오른 쪽에서 대기하고 하나님이 지성소 그룹으로부터 성전 문지방을 지나 예루살렘을 떠나시려 예루살렘 성읍에 잠시 머무시다 성문 동편 감람산으로 물러가신다(3-5, 11:22-25). 서기관 복장을 한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룹들 사이로 들어가서 그들로부터 불을 받아 성읍 중으로 나간다(6-8).
 
이어 여호와의 영광을 호위하는 네 그룹의 면모가 묘사된다(9-14). 네 그룹이 에스겔이 소명을 받을 때에 환상 중에 보았던 네 생물과 동일하다. 그룹들과 바퀴의 일치된 운행에 대해 진술한다(15-17). 성전 문지방에서 그룹 위에 오르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동문으로 이동하고(18-19), 하나님께서 이동수단으로 삼으신 네 그룹과 그발 강가에서 네 생물이 동일하게 동일한 것을 재차 강조한다(20-22).
 
이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구른다는 사실을 묵상할 수 있다. 네 바퀴가 사방으로 향할 때 네 개의 바퀴는 각각 그 안에 다른 바퀴를 하고 있다. 곧 세상의 역사는 그 안에 있는 어떤 요소로 진행됨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시공을 넘어선다. 우리로서는 수천 년의 유구한 역사 저편의 아브라함이고 노아이겠으나 하나님의 시공간 안에서는 저들과 나의 시공간이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그러니까 우리의 한계로는 시간과 공간을 직선으로 놓고 볼 때 하나님의 시공간으로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혹은 원의 모양으로 그어지는 다윗의 시공간과 나의 시공간이 그리 멀지 않다. 하나님의 시간은 곧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실 것이다. 이에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오늘 2절,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저는 허리에 먹을 차고 의인의 이마에 표를 하던 천사다. “보라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9:11).”
 
우리의 시공간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그러므로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하여,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1).”
 
오늘을 사는 데 있어 참으로 잡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어제는 낮 동안에 억수로 비가 퍼부었다. 아이는 2차 시험이 끝나고 티가 날 정도로 예배에 소홀하여졌다. 결국 이렇게 또 떠나는가? 하는 마음이 내심 우울하게 하였다. 기분은 가라앉았고 마음은 외롭기도 하였다. 일찍이 나는 정 주는 것에 주춤거린다. 그래서 동물도 키우지 못한다. 정들면 지옥이라는 말,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이별이 어렵다. 하긴 이별에 능숙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어쩌면 너무 어려서부터 나는 정을 주는 데 두려움이 생겼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목회는 잦은 이사로 이어졌고, 그렇게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예닐곱 번이 넘는 전학으로 증거가 된다.
 
길어야 2, 3년 나에게 친구란 정들면 이별이라고… 하긴 그래서 친구 사귀기도 어려웠지만 워낙에 또 타고난 성격인지 정을 주면 옴팍, 전심을 다해 퍼주었다 보니. 학창시절 가장 길었던 만남과 사귐이 또 첫 사랑 ‘그 아이’이기도 하였으니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휴학하던 때 만나 중학교 3학년까지였으니까, 것도 그 사연을 여기에 서술할 수는 없지만 의정부에서 인천으로 이사 오면서 편지로 이어지던 관계가 ‘억지 주장’으로 우린 더 이상 편지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고3 때 어떤 일로 가출을 하고 며칠 뒤 그 아이를 찾아가서 만났을 때 저는 벌써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헤어졌으니 얼추 35년 40년은 되었나보다. 우습지만 나는 지금도 그 아이를 생각하다 운다.
 
내가 사람이 싫은 것은 정이 들면 기억들이 송곳처럼 바지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글방을 하며 아이들을 숱하게 만났지만 그 가운데 유난히 정이든 몇몇 아이들로 나는 지금도 찔린다. 문득 떠오를 때면 어찌 주체할 수가 없다. 결국 이 아이도 이렇게 떠나는가, 하는 생각으로 나는 연락을 해보지도 못하고 핸드폰만 들여다보곤 하였다. 아이의 묵상 글도 띄엄띄엄하다 멈추었다. 나는 내가 가장 어려우면서 나로 정이 들어버린 사람을 또한 어려워한다. 주님, 하고 부르다 먹먹하여져서 무엇을 아뢰어야 할지 쭈뼛거리다 할 말을 못한다. 물론 어디에 있든, 행여 서로의 기억은 흐릿하다 잊힌다 해도 주의 영이 저의 속에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한편으로 이 모든 일들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한계인 시공간의 문제이겠으나 어느 훗날 우리가 주 앞에서 모두 만날 것을 나는 소망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시 85:9).
 
이에,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11:4).
 
이를 앎으로 마음을 다독이고 어찌할 수 없는 남의 마음까지 등에 지고 있느라 몸이 무거웠는지, 주일 오후에는 내내 누워만 있었다. 어떻든지 나는 앞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왔고 어떠하든지 서로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그렇듯 문득 주님의 기도를 생각하여 본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2-13).”
 
우리로 허락하신 동안에는 전심으로 다하여 저를 사랑하는 것으로 일심으로 주를 의뢰하는 일이겠으니,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차마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나는 마음이 어렵기만 하다. 우리로 오늘의 일을 하게 하심일 텐데, 종종 지나가는 것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렇게 놓아두어야 하는 것인지, 뭐라 이르며 붙들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열 살 때도 서른이 되어서도 쉰을 훌쩍 넘겨 곧 예순이 될 터인지도 알지를 못한다.
 
오늘 8절,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라.” 하시는 데서 오늘은 오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에 유난을 떨고 주석을 주렁주렁 달아 의미부여를 하는 여러 해설을 경계한다. 신약의 계시록이나 구약의 에스겔서나, 어떤 환상이나 표상을 그려 묘사하고 진술하는 성경을 볼 때 이를 유난히 분해하고 이해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는 것에 나는 주의하려 한다. 그러는 이들을 뭐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말씀도 오늘 내가 듣고 나의 일상으로 살아내야 하는 말씀이다. 하면 이 내용에서 나는 어떠하든지 또한 나의 일을 행하는 데서 이를 받는다. 오늘의 바퀴는 오늘을 지나면서 나의 역사가 될 테니까.
 
이를 뒷받침하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말씀을 찾아 적용한다. 이어서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그리하여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2).
 
행여 저 아이가 이로써 더는 나와 함께 같은 시공간을 보내며 주를 예배하지 못하고 의뢰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의 시간은 같은 선에서 엇나간 듯하나, 그 공간이 서로 같이 나눌 수 없는 시간을 사는 것 같으나 어느 훗날 우린 한 시공간 안에서 마주할 것이다. 영원한 이별은 없다. 성경으로만 아는 다윗과의 만남이나 베드로에 대한 친밀감이 오늘의 나는 같이 느낄 수 없다 해도 앞서 간 저들로서는 오늘 나와 같은 시공간 속에서 주를 찬송할 것을, 오늘의 바퀴를 이끌고 오늘의 은혜를 바라게 하고 있음을 안다. “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 모양은 황옥 같으며(9).” ‘같으며, 같으며, 나아가며, 가득하더라.’ 하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나는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하는 말씀을 주목하게 된다.
 
우린 아직 희미할 뿐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유치하다고 하지만 나는 나의 첫 사랑, 그 풋사랑을 가끔은 그리워하다 이날을 상상하기도 한다. 아내는 나더러 감성적이라 하지만 모두의 마음 속에 저마다의 그리움이 있는 것 같이, 우리로 이 감정을 통해 ‘이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게 하심을 안다. 이는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꿈 곧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단 2:28-29).”
 
문맥상 느브갓네살을 두고 하는 말은 가려두고 읽었다. 다니엘의 진술은 오늘 나에게도 유효한 것을 믿는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4-5).” 이를 통하여 알 게 되는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눈과 귀는 나에게서 단 한 시도 뗀 적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오늘의 이 마음을 모르실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1-3).
 
이를 두려워할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내가 나를 이길 수 없고 내 마음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누구의 마음을 쥘 수 있을까? 저는 저의 하나님이 저로 역사하실 것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하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익숙해질 수 없는 자는 앞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나는 어려서 이 놀라운 비결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주가 더하시면 같이 할 것이고 설령 같이 하지 못한다 해도 저에게 전하였던 말씀이나 저가 부르던 주의 이름으로 나는 더욱 확신한다. 다만,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27:9, 51:11).
 
이에,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63:1-2).
 
그럴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안다. 더는 같은 시공간이 아니라 해도 하나님의 시공간은 우리 믿는 자들로서는 하나의 바퀴로 굴러가고 있는 것임을.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143:6).
 
하여,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66:9).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16,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