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전봉석 2023. 7. 12. 05:09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에스겔 12:2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편 68:19

 

 

주의 명령으로 저들의 표징이 된다. 이를 밝혀 선민들인 자신들이 곧 포로로 끌려갈 것을 알게 한다. 포로 행장을 하고 포로처럼 이동한다. 이는 상징이며 포로 된 자들의 전말이다. 남겨진 자들이 죄를 자백할 것을 예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에스겔은 떨며 근심 중에 식사하고, 이 또한 황폐화될 유다 땅을 암시한다. 말로 심판을 예언하기도 하고 이처럼 행함으로 그 사실을 알게 하기도 한다. 우린 서로에게 있어 저마다의 표징이며 상징이고 암시이며 예언이다. 서로의 사는 모습을 보며 자신에게 알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이는 서로가 듣지를 않고 보려 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겔 3:26-27).” 스스로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는 강퍅한 마음을 서로에게 보임으로 느끼고 알게 하려 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 삶이 곧 증거다. 오늘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2).” 이는 우리의 고착된 마음 때문이다.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하는 너희의 이 속담이 어찌 됨이냐(22).” 서로 수군거리듯 오늘의 현상이나 주어진 상황에서도 놀라거나 깨우치는 바가 없다. 주께로 돌이킬 의지가 없다. 이에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곧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시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사명은 계속 이어져 저들의 표징이 된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1-12).” 의도적인 하나님의 뜻을 우린 삶으로 살아서 전해야 한다. 이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 우리의 전함은 말로 뿐 아니라 삶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주를 인정함으로 살면서 사는 모습 자체로 상징이 되고 암시가 된다.

 

친구가 성경 읽기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나는 흡족한 마음에 ‘나의 소경 장로’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그 시절, 군사정권이 맹위를 떨릴 때 저는 서울대를 입학하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유학을 계획하며 성실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동상인가 하였던 손가락과 발가락이 빠지면서 나병으로 끌려가 소록도 수용소에 갔다. 몇 년을 강제 수용당해 양성에서 음성으로 판정되었을 땐 두 눈알이 빠지고 손가락 발가락을 거반 잃고 곱은 상태였다. 국가에 수용된 정착촌으로 보내졌는데, 그러는 동안 저의 절망은 가히 짐작도 어렵다.

 

주의 은혜는 따로 있었으니 저는 손양원 목사가 계시던 여수 애양원교회로 수용되었다. 마흔이 다 돼 주를 영접하고 저는 자나 깨나 녹음된 말씀을 듣고 또 묵상하기를 어둠 속에서 그의 절망 가운데 하루 일과가 되었다. 저를 위시하여 소경들이 하나둘 성경 암송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모든 일과를 채웠다. 후에 저들은 성경 66권을 모두 암송하였다.

 

어린 나에게 나의 소경 장로는 물었다. 내가 눈을 뜨고 살았더라면 성경을 이렇게 다 암송할 수 있었을까? 저의 묵직한 말 가운데 그 살아온 세월의 인고를 어린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같이 예배를 드릴 때 저는 꼭 내게 성경을 찾아 읽게 하였고, 나는 일부러 다른 곳을 골라 읽거나 읽으면서 엉뚱한 단어로 바꾸면 마치 그 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다시 읽게 하고 자신이 먼저 그 내용을 소리 내어 암송하였다.

 

나는 그때쯤 암송한 고린도전서 13장과 시편 1편, 23편 외에 그나마 장으로 외우는 것은 그게 전부이다. 구절을 암송하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 정도를 아는 것도 얼마뿐인 내게 성경 66권을 통으로 암기하며 살기까지 저의 지난한 삶을 나는 가늠할 수 없어 아득하다. 그러는 동안 수도 없이 절망하고 좌절하였을… 그때마다 다시 마음을 부여잡은 것은 말씀이었겠으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누구에게 저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저는 내게 허락하신 표징이요 암시다. 상징이며 예표가 된다.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그 처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놓아두는 일이었다. 어린 나는 저에게 물었던 것 같다. 죽고 싶지 않았어요? 앞서 한 해 전에 가까운 친구 형이 관악산에서 자살했다. 거지 똥구멍에서 빼먹을 콩나물도 없이 가난하였던 저는 가장 좋은 국립대를 다녔었다. 그때 어린 내게 자살은 상당히 매료되는 일이었다. 교회에서는 실족사로 성도들 사이에 쉬쉬 하고 지나갔는데 어린 나에게는 ‘아, 그런 수도 있었구나!’ 하고 어떤 놀라움이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나의 소경 장로의 생은 경이로웠다. 하나님은 저 둘을 나의 표징으로 놓으셨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말씀이 주어질 때 생의 고달픔도 따른다. 오늘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저가 순종할 때에 그에 따른 고달픔을 연상하면 될 것도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4-46).” 우린 맡은 자로 사는 자들이다. 때론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 해도, 순종이 먼저다. 이해는 나중에 따라온다. 그땐 이미 이해 따위, 아무 소용도 없는 납득 따위로 더는 중요할 게 없다.

 

어린 나에게 나의 소경 장로는 수시로 이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팔, 다리를 모두 수술하고 짧지 않은 기간을 병원과 인근에서 살아야 했던 내게 ‘지금은 분한 일이 곧 지나면 알게 된다.’ 하면서 틈만 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하지 못해 안달난 사람 같았다. 감사하게도 나는 언제부턴가 거의 매일 저를 만났다. 아니, 저가 나를 만나러 왔다. 때론 온 몸에 깁스를 한 나를 휠체어에 태워 미친 영자와 함께 나를 밀고 예배당으로 갔다. 예배당 뒤편으로는 여수 개펄이었고, 어떤 날은 배들이 펄에 박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고, 때론 만수가 되어 고깃배들이 모두 바다로 나갔다. 돌아올 땐 영자가 내 휠체어를 밀었다. 신기하게도 평소 너풀거리듯 헤헤거리며 천방치축이던 영자도 그런 날이면 고분고분하여 소경 장로가 뭐라 말하거나 성경을 암송할 때면 조용하였다. 그때 이미 영자는 마흔이 넘었고 소경은 일흔이 넘었었다.

 

나의 이런 기억이 소중한 암시다. 내 생에 내가 흘려보내듯 놓치고 산 것들이 많다. 모두가 흘러간 줄 알았는데 이처럼 불쑥 여전히 내 안에 고여 있었다는 데서 나는 가끔 놀란다. ‘그때 나에게 그런 사람도 있었지?’ 하고 말이다. 오늘 우린 에스겔의 순종을 읽으며 저가 패역한 자들 앞에서 표징이 되는 것을 본다. 그에 따른 고달픔이나 좌절은 일체 없다. 성경이 이를 가린 게 아니라, 나의 소경 장로가 해주었던 말처럼 ‘먼저 순종하면 나중에 다 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앞서 우린 납득이 가야하고 이해해야 하겠다고 고집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더러 큰일을 당하거나 큰 슬픔을 앞에 놓고는 망연자실 좌절에 들기 십상이다. 이에 여호수아도 같은 갈등이 왜 없었겠나? 먼저 물이 마르면 건너갈 터인데, 하나님은 우기로 불어난 요단을 건너가라 하신다. 할 때에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수 3:1).” 저는 먼저 순종부터 하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실 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그때 저의 심정이 어땠을까? 나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한데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

 

저들은 묻지도 않고 주저하지도 않고 먼저 따랐다. 앞서 그러기까지 얼마나 잦은 시행착오가 있었던가? 아브라함은 종의 몸에서 난 이로 하나님을 약속의 씨를 대신하려 했었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 여호수아는 모두와의 결별을 다짐하기도 했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우린 누구도 처음부터 온전할 수는 없다. 나의 소경 장로는 여러 번 죽을 각오를 했다고 했다. 나병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강제로 소록도로 수용되었을 때, 두 눈알이 빠지고 사지가 비틀이질 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비로소 예수를 만났을 때, 사울은 바울이 되었고 게바는 반석이 되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우린 오늘을 표징이 되어 산다. 나로 누군가의 암시가 되고 예표가 되게 하시려고,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9-10).”

 

그러므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나는 나의 이 얄팍한 묵상 글을 쓰면서 쓰는 동안에 받는 은혜로 하루를 산다. 하루 중 어느 순간 핸드폰을 꺼내 다시 읽으며 새벽에 더하시던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김한다. 또한 나의 이 모자란 글이 누구 한 영혼에게 울림이 되고 표징이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주를 바라는 데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이 된다. 말씀이 저로 인하여 살아난다.

 

오늘 16절 “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이 이르는 이방인 가운데에서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때가 아무리 어떻다 해도 우린 남겨진 자이면서 동시에 맡은 자들로 오늘 또 하루를 받는다.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사 24:4-5).” 그때에,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68:3-4).

 

오늘 시편은 어김없이 길라잡이가 된다. 이는,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9-10).

 

바로 그때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