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 11:19-20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67:7
이런 와중에도 거짓을 예언하는 25인을 대항하여 선포한다. 저들은 당시 관료다. 이 숫자는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 있던 태양신을 숭배하던 자들의 숫자와 같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겔 8:16).” 태양신을 숭배하던 자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제사장들이었는데 오늘의 25인은 정치 고위직들이다. 그러니까 정치, 종교 모든 관료들이 이 지경인 셈이다.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11:3).” 곧 예루살렘의 안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 2차에 바벨론의 공습으로 불안정한 이스라엘을 향해 회복을 외치며, 곧 집을 짓고 고기를 굽는 날이 올 것이란 소리다. 단단한 가마가 고기를 보호하듯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외친다(1-4). 하나님은 이를 역설적으로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 하신다(5-12).
그런 가운데 저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임을 강조한다(13-15). 오히려 열방에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고 신앙을 회복시키실 것이다(16-20).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21).” 하나님의 영이 예루살렘을 떠나 감람산으로 가신 것과 에스겔이 다시 바벨론으로 복귀한다(22-25).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란 오늘에도 쉽지 않다. 세상 좋은 게 너무 많다. 누리고 싶은 것을 바라는 데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교회를 안 다니고 예수를 안 믿는 일이 훨씬 합리적이고 올바른 판단 같다. 때가 어느 땐데 여전히 죄를 운운하며 주의 도우심을 바랄 것인가? 하나님을 보편적인 신들 가운데 하나로 돌리고 어지간한 관계로 설정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오늘 15절은 이를 외친다.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사람이 먼저’인 오늘의 의식과도 이어진다. 이때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이번 주간 딸애가 태국으로 단기선교를 떠났다. 산간마을로 들어간다며 이동경로와 중간 중간 동영상을 보내왔다. 그런 깊숙한 곳에 들어가 생활하며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현지 선교사들의 목숨 건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 조선의 복음 또한 묘연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이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저들의 희생과 헌신이 헛되지 않을 것을 성경은 보장하고 말씀은 지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는 일은 세상의 혜택으로부터 스스로 고립되는 것과 같다. 이에 하나님이 친히 성소가 되어주신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 5:11-12).
그것은,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37:28-29).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확실한 표징이다. 당시 저들로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미운 물건과 가증한 물건’은 온갖 우상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18).” 이는 엄청난 용기다. 모두가 따르고 좋다 하는 것을 스스로의 삶에서 제할 수 있는 용기란 미움 받을 작정을 하는 것이나 같다. 그러나 우린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럼에도 여전히 추구하고 갈망하던 것들을 두고 망설이고 있을 때, 그러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한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결국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이는 참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아예 부정하고 안 믿는 자로 살았으면 모를까, 믿는다고 믿으면서 교회도 다니고 여러 참여도 나름 한다고 했으니 ‘그때 그 순간,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에’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등골이 오싹할 일이다. 우린 이제 안다. 알면서도 여전한 것이 무섭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나는 이런 사실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두 손 들고 주 앞에 고한다. 주의 도우심과 인자하심이 아니면 나는 나도 감당이 안 된다.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리기 일쑤고, 감정은 멋대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운데서 오늘 말씀,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곧 주의 영으로가 아니면 우린 가망이 없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나는 이와 같은 말씀에 승복한다. 그땐 그랬다. 내 자신도 ‘이건 아닌데’ 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으로 괴로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죄를 죄로 알면서도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그런. 이때에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주의 영이 그리하실 때 가능하다. 하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0, 12).
우리로 새롭게 하심이 성령이 하신 일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나는 내가 오늘의 나로 살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여전하여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좌절하지만 나의 나 된 것을 두고 나는 이제 주를 인정한다. 종종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놀란다. 여전한 자리에서 더는 나를 불러내지 않는다. 때론 외롭고 힘들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의지하였던 이들이 더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 앞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 외면당하는 자로 사는 일이다. 안 믿는 친구들과의 관계란 그 대화에서 추구하는 것까지 모두가 부딪친다. 누구는 여전히 입만 열면 무슨 주식과 어디 부동산을 운운하느라 끝이 없다. 누구와는 인생을 논하는 데 있어 그 관점이 서로 달라서 어떤 내용으로 논쟁을 벌이기 일쑤다. 가까웠던 나의 선생과 친구가 가장 먼 사이가 되었다. 저들도 더는 나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래서도 우린 말씀에 붙들린다. 오늘 말씀 21절,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자로 산다는 일.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호 10:2).”
이를 들을 수 있고 마음에 새겨 자신을 쳐서라도 복종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무엇이 옳은지, 내가 얼마나 긴 시간을 헛된 것을 추구하고 먼 길을 돌아왔는지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그러므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내가 아는 한 나와 내 주변은 그러하였고, 그러다 교회를 등지거나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데서 살고 있다. 가장 두려운 일, 오늘 23절,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즉 주의 영이 떠나신다는 것. 죄로 이를 경험하는 다윗은 눈물로 회개한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3, 11).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가장 두려운 일은 주의 영을 떠나 갈 곳이 없고, 주의 영이 떠나시면 나는 가망이 없다는 사실. 하여 우린 이를 대적하는 것과 맞서야 한다. 곧 주의 긍휼하심이 한순간도 필요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67:1-2).
이때에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그게 오늘의 나 자신임을.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이를 알고 인정할 때 복이 있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그리하여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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