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전봉석 2023. 7. 13. 05:21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허물어서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에스겔 13:14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시편 69:6

 

 

말씀을 사칭하는 무리가 우리 중에 있다. 저들은 담을 회칠하듯 덧대어 심판의 예언을 거짓으로 평강하다 한다(1-16). 특히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는 거짓 여성 선지자들에게 대한 경고도 이어진다(17-23). 임의로 말을 지어 거짓으로 전하는 예언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경고를 전달하신다. 평강만 주장하는 무책임과 계시를 사칭하며 저주를 선포하는 사실도 지적한다. 이를 가리켜 허탄한 거짓이라 지적하신다. 저들은 선민의 지위를 박탈할 것이다. 담에 회칠하는 것 같이 그리 거짓을 전하는 이나 이를 따르는 무리에 대해 경고한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없어진 적이 없다. 모든 시대에 존재하였고 저들을 따르는 무리들 또한 상대적으로 월등히 많았다. 단순한 예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열 명의 보고와 두 명의 보고가 갈리었다. 열 명은 사실 그대로를 말하여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민 13:27-29).” 저들의 보고는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리었다.

 

그러나 두 명의 보고는 달랐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30).”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저들은 이미 들었고 이를 믿고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1-33).” 이는 하나님이 ‘여기까지 함께 하신 것’에 대한 불신이고 현재 닥친 문제에 불신앙적으로 보고하고 선동하는 일이었다.

 

이에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14:1).” 그뿐인가?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3).” 그 원망과 불신은 고스란히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거짓은 그러하여 우리의 참인 것을 파괴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라 하였다. 이들은 ‘본 것 없이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들’이다. 곧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일 뿐’인 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오늘에도 교회는 넘쳐나고 목사는 그 수가 많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교회들이 있고 단 열 명도 안 되는 성도를 두고 시름하는 교회들도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나는 사람들이 쏠리는 현상을 부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 때도 많은 자들이 예수를 따랐고 찾았고 부르짖었다. 가시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그러나 저들은 대부분이 자기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를 갈급하였다. 가난과 소외와 박해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 저들의 목적이었다. 결국 저들은 그날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며 그 죄를 자신과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돌려도 좋다고 하며 예수를 버렸다. 반드시 우린 모두 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0-41).”

 

이를 감안하면,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9-10).”

 

결국은 그러하나 저들은 알지 못한다. 당장의 문제로 허탄한 데로 끌려가는 자들이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즉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막 13:22-23).” 이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하시는 말씀을 찾아보며 오늘의 나를, 교회를 생각한다.

 

어제는 한 통의 전화가 들어왔다. 저예요! 하는데 나는 순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어쩌다 저 아이의 번호도 지운 모양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통화한 게 전부였다니까 얼추 3년은 넘게 연락이 없던 모양이다. 둘째를 낳고 저의 아내는 첫 애 때부터 오늘까지 산후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저 또한 이런저런 일로 불안이 찾아와 벌써 2년 가까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저여서 ‘그런 사실’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데 나는 들으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다. 누구보다 잘 되길 바랐고, 아이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같이 예배를 드리겠다고 한 것이 대학을 떨어지고 4수를 하다 포기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는 일에 쭟기느라 늘 약속뿐이었다. 저의 모친도 우울증으로 한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통화로나마 위로하고 격려하였던 것이 ‘종교적인 권유’가 부담스럽다는 저의 말에 더는 이어가지 못했던 것 같다. 어머니도 여전하다고 하니…. 그 가정의 일련의 사연은 그럴만하겠다 싶은데, 녀석은 파주에 모친은 군포에 사는 경우라 나로서는 마음을 졸이는 게 전부이다.

 

내가 그렇듯 마음의 병을 지고 가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그런 사람들’이 곁을 같이 한다. 아이의 말마따나 ‘가장 편한 사람’이라 그렇다는데 이를 고마워해야 하는지… 분명한 사실은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로써 한 영혼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28-30).”

 

나의 심정이 바울의 것이다. 그리 여겨 나는 더 이상 이를 위해 낫고자 기도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러함으로 ‘저들’ 같은 이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을 들고 왔을 때, 나는 기도한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시 69:6).

 

행여 나의 약함이 걸림이 되어 주가 더하신 이를 외면하거나 멀리하지 않기를. 아이도 그런 소릴 했는데, 나 역시 같다. 어릴 적 나와 같이 지내던 가까운 이들부터 오늘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때는 누가 나더러 ‘역마살이 꼈다’ 할 정도로 돌아다니고, 사람 만나고 유쾌하게 살길 바랐다. 그땐 거짓을 일삼고 두 개 세 개의 가면을 쓰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았다. 정작 나의 페르소나를 벗지 못할 때 주는 강제로 멈추게 하셨고, 고꾸라뜨려 꼼짝 마라 하셨다. 그렇게 붙들리고 보니 정작 우리 곁에 ‘붙들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는 이든지 안 믿는 이든지 ‘나도 같다’는 것을 알고 입을 연다. 자신의 말을 하면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 주께 호소한다. 안 믿는 저를 대신하여 주께 아뢴다. 오래된 정신과 의사는 ‘내 일’을 그만두거나 그냥 그러려니 안고 살거나, 별 수 없다는 진단으로 서로 합의(?)를 끝냈다!

 

8월에 갈게요, 하는 아이의 말에 헉, 하고 숨이 먼저 막히는 것 같았지만 자꾸 울컥, 하여 그러라고 하였다. 그야말로 전혀 그럴 녀석이 아니다! 누구보다 강하고 의지 있다. 4수를 끝으로 공부를 접을 때도, 어릴 때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 새살림을 사는 부친의 사업을 같이 하면서 결혼을 할 때도, 아이는 당당하였고 그의 의젓함에 나는 찬사를 보냈었다. 그러는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속 시원하게 물어볼 수 없었다. 다만 비로소 같이 예배드릴 텐가? 하고 묻자 아이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때론 너무 어렵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이를 전하는 일이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 해도, 오히려 그래서 더 주저하거나 묵인하게 된다. 앞서 친구와의 통화에서 거의 나 혼자 30분 가까이 저의 성경 읽기에 대하여 우려하는 바를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5-6).” 친구는 성경을 읽는 자라 나는 거침이 없었던 것 같다. 통화를 끊고 내심 저의 마음을 두고 염려하다 주께 돌렸다. 주가 알아서 하시라,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걸려온 오후께 예상치 못한 아이와의 통화라…. 때가 너무 악하다. 상대적으로 우리 영혼은 너무 약하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0-12).”

 

오늘 본문에서 나는 거짓 선지자들을 생각한다. 저들의 그런저런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한다. 저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나는 과연 자신할 수 있을까?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별 수 없다. 나의 정신과 의사 말처럼 그만 둘 거 아니시면, 그러려니 하고 안고 사시라! 실은 저도 믿는 자이다. 옆에 놓인 성경과 저의 솔직담백한 자기 말에서 숨길 수 없다.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소산님’ 곧 백합화의 곡조에 맞추어서,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69:1-2).

 

천하의 다윗이라고 아니 그러할까? 저 또한 심신미약에 신경쇠약을 앓는 사람이다. 그럴 때 우린?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그래서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우리 모두 믿는 자들은 적당한 불안과 우울과 공황을 안고 살면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아니면 언제 이처럼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바벨론 강가에 앉아 눈물 짓는 일은 숨길 게 아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37:1).

 

당연하지 않겠나?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3).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69:5-6).

 

나는 바라고 또 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13,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