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전봉석 2023. 7. 14. 04:42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다시는 모든 죄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여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14:10-11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편 70:1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상숭배를 싫어하신다. ‘나 외에 신을 두지 말라.’ 하심은 하나님으로 모든 것이 완전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우상을 숭배하는 장로 두엇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은 저들을 상대하기 싫어하셨다.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3).” 저들은 우상을 숭배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이중성을 보인다.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4).” 곧 오늘은 우리의 이중성을 돌아보게 한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이 직집 응대하실 것을 알린다.

 

“…누구든지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가는 모든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을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 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7-8).”

 

이와 같은 이중성, 양다리, 혹시나 하는 다른 길을 두고 걸을 때, 이를 들추시고 성결한 자를 위하실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다시는 모든 죄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여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 하시는 것.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 41:13).” 이어 분명히 밝히심은,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4).”

 

누구도 누구를 대신하여 구원할 수 없다. 설령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죄는 보편적이나 구원은 개별적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곧 아버지의 믿음이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나의 신앙이 자식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아들 곧 우리 주 예수를 믿는 믿음에 있어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믿음은 값없이 주신 은혜이나 이 마음을 지키는 일은 각자의 것이다.

 

해서 오늘 본문은 “비록 이 세 사람” 곧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엄격하시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고 그 땅은 황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4:16).” 이는 매우 두려운 말씀이면서 동시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설정하게 한다.

 

누가 있었다. 그때 저는 말하길 혼자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 둘이 예수 안 믿고 지옥에 가야 한다면 자신도 저들 따라 지옥에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 사랑이 애틋한 듯하였으나 그로부터 10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문득 연락이 와 서로의 안부를 묻다 남편과는 이혼하였고, 아이 둘은 성인이 되어 서로 잘 안 보고 산다면서 그간의 사연을 늘어놓았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은 믿을 게 못되어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지금은 죽고 못 살 것 같은 마음도 돌아서면 지옥인 것을 알 때, 하나님이 나의 모든 마음과 일거수일투족을 아신다고 하는 것에서 안도하고 평안을 찾는 것이 온전한 신앙이었다. 가령 어제는 다음에 다룰 설교 본문을 읽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하는 부분에서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심지어 나를 감찰하고 계시다고 하고 이를 부담스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하나님을 피해 멀리 또 멀리 외면하며 살기를 여러 해 동안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와 같은 이들을 만났고 저들은 무슨 무용담처럼 예전에 믿던 어린시절 철부지 같던 신앙을 낄낄거리며 스스로를 조롱하였다. 나 역시 그러하여서 더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피할 데가 없었다! 붙들리고 난 뒤에 안도하는 죄인의 심정을 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7).

 

이를 답답하게 여기고 어떻게 그러고 살 수 있을까? 싶을 때는 그 속에 숨기는 게 있어서다. 우리의 이중성이란 앞뒤가 다르고 곁과 속이 다른 것으로 그런 자를 가까이할 수는 없다. 하나님도 이를 매우 싫어하신다. 그러나 시인은,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9-10).

 

하는 이와 같은 든든함, 어떤 확신이 우리로 평안하게 한다. 이에 따른 변화는,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5).

 

곧 주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심으로 가능하였다. 그러할 때 우린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오늘 나의 모든 것이 주 앞에 투명할 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8).

 

주의 편만하심이 부담스럽고 답답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으나 더는 아니다. 부담스러울 때는 무의식적으로 이중성을 띈다. 이를 하나님은 다 아신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들 가운데 어느 교회도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시는 곳이 없다. 가령 서머나교회에 대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 2:9).” 그에 따른 확신과 안정은 주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사데교회에 대하여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 하심은 돌이켜 저로 살아나길 바라시는 주의 사랑이 있다. 정말 저들이 죽은 시체와 같다면 더는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실 터, 누구 죽어가는 자가 있다면 모두가 달려들어 살리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

 

오늘 본문으로 보면 두 마음을 품은 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상대하지 않으신다. 즉 분명히 하라는 것,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런데도 우린 모두 ‘그럴 수 있는 일’로 자신에게 관대하다. 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하시는 말씀을 그저 남의 이야기 대하듯한다. 어쩌면 우리의 두 마음은 우리로서는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 외에도 의지하고 바라는 것이 어디 한둘이겠나? 그런 나의 기질과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이가 사데교회에 엄히 책망하심은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처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하시는 주의 마음을 헤아리다 억장이 무너진다. 이를 알면서도 번번이 돌아서기 무섭게 다른 데로 마음을 기울이기 일쑤니, 나는 나로 늘 어렵다. 그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39:13-14).

 

하여 나보다 더 날 잘 아시는 주님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것을,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당시 요한은 늙어 병들었고, 같이 사역하던 이들은 톱에 쓸리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고, 교회들은 하나둘 더는 가망이 없을 정도로 와해되고 사랑은 무너졌을 때, 저는 말씀을 받는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3).” 그 말씀의 주는 누구신가?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39:16).

 

오늘 에스겔서에 반복되는 여러 상황 속에서 결국 ‘하나님과 나’의 문제로 집중하게 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4:21).” 설령 모든 게 끝장난 것 같다 해도 “그러나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22).”

 

우리가 사랑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곧 한 영혼, 다음 세대를 위하는 주의 사랑으로 위하는 이들과 내 곁의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는 이들에게 주는 소망을 주신다.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4:23).” 곧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도 사랑이심을. 아직은 살아있으니 ‘죽었노라’ 하고 책망도 하시는 것이지 정말 죽은 자를 두고 그런 말을 하시겠나?

 

결코 우리 행위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욥 40:10).” 이에 다니엘은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단 10:11-12).”

 

주는 언제나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나를 다 아신다. 이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시는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그렇듯 멀리 떠나 한사코 주를 외면하며 살고자 할 때도 있었는데, 그땐 나의 삶이 이중, 삼중 거짓을 엮어 수레를 끌 정도였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그러는 게 쉬웠고 최선이라 여겼다. 주가 다 아신다고 할 때 나는 그의 눈을 피하여 도망치느라 거침이 없었다. 우리가 이제 성경으로 산다는 것은 단지 성경을 읽고, 감동하며 상한 마음에 위로하심을 받는 정도로가 아니라, 이에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성경을 사는 거였다. 고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나는 나의 행위로 난 것이 아니라는 데서 또 한 번 안도한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하심은,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70:1-2).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로 틈을 노리는 권세 잡은 자들이 있음을. 그러나 반드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이 말씀 하나면 모든 슬픔도 후회도 더는 나를 휘젓지 못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25:2-3).

 

이와 같이 주께로 향하는 마음이 은혜이고 축복이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56:10).

 

이를 알 때,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1).” 하시는 말씀 앞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70:1,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