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23. 7. 15. 05:48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에스겔 15:2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71:6

 

 

 

열매가 없다면 무익한 포도나무의 쓸모에 대하여 언급하며 이스라엘을 이에 빗대 말씀하신다. 먼저는 타다 남은 포도나무의 무익함에 대하여(1-5), 이스라엘의 타락과 변절로 무가치함을 알리신다. 그 무익한 포도나무의 잔해를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이스라엘로 강조하신다(6-8). 자명한 일이지만 포도나무는 열매가 없으면 불에 던져질 따름이다. 곧 우리의 정체성,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에 대하여 일깨우신다. 우리의 본질은 세상의 무엇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하나님이 나를 두고 기뻐하심으로 나는 존재한다. 나의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충족시킬 수 없다. 다만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오로지 ‘하나님의 열매’를 맺음으로 그 가치가 있는 ‘주의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인 것을. 그런데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 2:21).”

 

늘 말씀 앞에서 새로운 것은 내가 주를 선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 엄마의 말처럼 아이가 종교 하나쯤 가지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하면서 우리가 글방에서 예배드리는 문제를 그처럼 관대하게(?) 이해하였던 게 기억난다. 우리의 지독한 착각은 거기에 있는 듯한다. 며칠 전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던 아이 내외의 일을 되새기다 ‘일이 좀 정리되면 같이 예배드릴게요.’ 하던 말이 계속 마음에 머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오류를 나로서는 바로 잡을 길이 없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우리에게 부여하신 한 생의 이유를 안다면 신앙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힌다. 늘 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인정하는 것뿐이다. 오늘 2절,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하실 때 이를 나로 놓고, 나는 무어라 대답할 것인지? 이어서 3절,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하실 때 나는 어쩌면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무얼 증명하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의 또 한 번의 공수표, 일이 좀 정리되면 같이 예배드릴게요, 하는 말에 나는 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일까? 하는 후회가 계속 마음에 남았던 것일까? 결국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4).”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나로 마음에 걸리는 게 많다는 것을 새삼 일깨우시는 것 같다. 문득 떠올리게 되는 어떤 상황, 어떤 아이에 대하여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암담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습관적으로 종이에 적어보고 누구의 이름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바라볼 따름이다. 그럴 때 말씀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마치 나로 나를 점검하게 하시는 것 같다.

 

내 마음과 내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자유로운가? 알면서도 무얼 숨기고 회피하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 무슨 일로 ‘사모 내외’와 통화를 했다. 여전하다는 저들의 안부에 그러한가? 하고 나는 더 뭐라 할 말이 없다. 여전히 게임중독자와 다를 게 없는 목사와 늘 부산하여 방만한 사모의 일과를 두고 오히려 나는 어떠한가, 저에게 뭐라 말하다 고스란히 그 말이 나를 찌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열매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한 영혼을 얻기까지 우린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재확인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그러한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안의 성령의 열매로 맺어가는 일일 텐데,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어제도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이 열매 중 절제가 맨 마지막을 뒷받치고 있고 사랑이 맨 앞을 이끌고 있음을 되새겼다. 곧 우리의 절제가 없을 때, 우리의 사랑은 애착이 되고, 우리의 희락은 쾌락이 되기 십상이고, 우리의 화평은 우유부단함을, 우리의 오래 참음은 회피를, 우리의 자비는 무책임을, 우리의 양선은 보이기 위한 피상적인 것으로, 우리의 충성은 자신의 공명심으로, 우리의 온유는 유야무야 회피하는 데서, 우리의 절제 또한 절제가 없으면 공명심을 더할 뿐이란 사실을 되새겼다.

 

이에 사랑이 앞서는 것은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곧 하나님이 이끄실 때 모든 열매는 온전하다. 이에 주의 사랑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사랑은 애증으로, 희락은 자기만족으로, 화평은 선택된 자의 이기심으로, 오래 참음은 방관으로, 자비는 묵인으로, 양선은 더 나은 선을 도모하려는 당위성으로, 충성은 우쭐한 교만으로, 온유는 친절한 타인으로, 절제는 자기만족으로 전락한다. 이에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맺으신다. 즉 주의 사랑으로 앞에서 끌고 우리로 우리 영혼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 주가 다스리시는 절제가 뒤를 받치지 않으면 자기 과시에 불과한 종교인으로 살다갈 따름이다.

 

고로 열매를 맺는 것은 주신 자리에서 맡기신 일에 무던한 것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곧 나는 죄인이라 함은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인정하면서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그러할 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이는 말씀이 주는 확신으로다(3). 이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심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시 71:1).

 

주께로 나를 붙들어 놓을 뿐이다. 익히 내가 잘 아는 한 가지, 하나님을 떠나서는 수치와 곤고함뿐이었다. 누굴 사랑할 때도, 나름 열심을 다해 좋은 성과를 내었을 때도 내 곁에 늘 사망이 있다는 데서 길은 끊겼다. 죽어라 하고 이를 외면하고 살지만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이와 같은 말씀이 앞서 나를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 먼 길을 돌아서야 알았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25:2-3).

 

이를 앎은,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3).

 

오늘도 이와 같은 심령으로 주 앞에 앉는다. 누구 생각으로 마음이 어렵기도 하고 저의 일로 내내 신경이 쓰일 때, 내게 더하시는 말씀으로 나는 주를 찬송한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72:2-3).

 

나는 또한 그렇듯 오늘도 시편으로 산다. 이를 읊조리며 기도로 찬송으로 나의 간구를 아뢰게 된다. 올 여름 유난히 장맛비가 길고 요란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나 같은 이’의 육신은 곤죽이 된다. 늙으신 장모는 며칠째 한숨도 못 잤다고 호소하여, 비 때문에 한 주 미루려고 하였던 정형외과로 해서 진통제와 물리치료를 받았다. 나는 며칠 연속으로 먹은 진통제로 속이 울렁거리고 답답하여 먹지 않았다. 때론 하루가 그 자체로 고단하여 외롭다. 누가 어떤 불안을 호소할 때 저는 나의 그러함을 알기 때문에 남몰래 속을 털어놓는 것이다. 어디 먼 곳에 사는 친구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다며 막막한 살림을 호소하는 장문의 사연을 보냈다. 가끔은 내 코가 석 자인데… 하는 어떤 서러움에 저를 핑계로 나를 주 앞에 하소연한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5-6).

 

나는 오늘 시인의 간구를 따라한다. 나를 지으신 이에게 나의 고충을 호소한다. 일일이 열거하며 어디가 어떻게 아프고 어려운지, 지면에 다 옮길 수 없다. 다만 그것으로 주의 능력이 내 안에서 강하여짐을 알고 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는 바울의 신앙 고백, 저의 신앙의 열매를 나는 내 것으로 삼는다(고후 12:9).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말씀’ 나는 이를 내 곁의 나의 영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안다.

 

누구처럼, 어떤 이의 끔찍한 고통 중에도 주를 바라며 평생을 찬송하였던… 나는 저들의 지난한 견딤을 사랑하고 질투한다. 나도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하다 운다. 나의 어려움으로만 울다 부끄러워 누구의 사연과 기도할 수 없는 저의 영혼을 핑계 삼아 아뢴다. 우리가 주의 포도나무로 맺을 수 있는 열매란 성령의 열매를 성령으로, 곧 오늘 나의 이런저런 말할 수 없는 고단함을 두고 주를 부르는 것은,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71:6).

 

이 모든 게 주의 선하심인 것을 인정한다. 늘 남은 한 마디 ‘하나님이 너를 더욱 사랑하시기 때문에 특별하게 지으셨다.’ 하는 부친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일생을 사는 동안 부친의 거짓을 증명하려 하였던 것 같은데 그러느라 너무 먼 길을 돌았다는 것을… 나도 ‘불안을 앓는 아이’에게 말해주었어야 한다. 어쩌면 내내 마음을 맴도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나로 이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4).

 

더는 돌아갈 수 없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하게 하실 때 나의 주저함을 두고 슬퍼할 때도 있다. 주를 알면서도 번번이 그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아니라면 더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2, 14).

 

그러므로,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

(15-16).

 

이에 절제는 사랑으로 이끌리고 사랑은 절제를 요구하신다. 고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할 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17, 23).

 

하여,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