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16:62-63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가나안 땅에 버려진 신생아 같았던 저들을 구하고 키워 단정히 왕후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한다. 그런데 자라서 화려하고 명성을 취하면서 예루살렘이 우상과 가증한 것들로 음행하였다. 누대 위에 올라 벌이는 끝없는 음행을 고발하고, 남편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다하고 그 징계에도 불구하고 음행으로 음욕이 차지 않아 ‘아직 부족하게 여겨’, ‘아직 족한 줄을 알지 못한다.’ 본래 버려진 신생아 같던 예루살렘을 구원하여 신부 삼았으나 가증한 음부와 행음하는 예루살렘에 대해 더는 그리하지 못하도록 심판하시고 그 정당성을 선언하고 있다. 이에,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6:62-63).”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며 참고 또 참으신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4).” 이를 알지 못하고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15).” 곧 우린 우리에게 주신 축복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그 원천이심을 오늘 본문은 일깨운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수 24:20).” 하나님의 사랑과 그 축복을 우리가 알지 못할 때 우리로서는 이보다 음란하고 더러운 일도 없다. 결국 나의 나 된 것에 대해 마치 나의 노력과 수고로 모든 게 얻어진 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행음하는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 우리들인데도,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 67:6-7).
이를 우린 깨닫고 그 사랑을 지켜야 한다. 근신함으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으로 인하여’, ‘~을 가지고’, ‘~으로 말미암아’ 우린 너무 쉽게 변절한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 32:15).” 우리가 살찌고, 배부르고, 살만하여서 서로 교만을 일삼는 게 그런 것이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호 13:5-6).”
어렵고 다급할 때는 주를 찾는다. 도움을 바라고 주를 찬송한다. 한데 이것이 시늉 같아서 좀 나아지고 괜찮아졌을 때 우린 금세 주의 은혜를 저버린다. 곁의 누가 그 아들이 교회를 멀리하며 자기 멋대로 살기 시작하면서 다급하게 주를 찾았다. 더욱이 서로 부부가 별거를 하면서 아이가 그리 되었나, 자책하면서 저이는 날마다 새벽예배에 나가 눈물 뿌리며 호소하였다. 글방 선생이 목사가 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소리에 그러한 사연을 털어놓고 기도를 부탁하여서 알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이는 어떤 이유에선지 외대 아랍어과로 진학을 했고, 카타르 교환학생으로 나갔단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어느 날 찾아와 회교도가 되었다며 이후 하던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며 의젓하였다. 아이와는 말이 통하지 않아 그 모친과 만났을 때, 저이는 다소 평안한 얼굴로 아들이 하는 일이 잘 되고 저들 부부 사이 또한 좋아졌다며 ‘그럼 됐다’는 식으로 더는 나의 기도도 하나님의 도우심도 크게 바라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그와 같은 사실은 내 곁에서 수시로 일어난다. 당장 큰 시험을 앞두고 또는 무슨 질고로 다급하게 주를 찾는다. 그러다 일이 무마되거나 좋게 해결되면 굳이 하나님이 아니었어도 되었던 것이라는 듯 등을 돌린다. 이는 오늘 본문 16절, “네가 네 의복을 가지고 너를 위하여 각색으로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 하시는 대목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 ‘잘된 일’을 자랑하며 “네가 또 내가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또 네 수 놓은 옷을 그 우상에게 입히고 나의 기름과 향을 그 앞에 베풀며, 또 내가 네게 주어 먹게 한 내 음식물 곧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을 네가 그 앞에 베풀어 향기를 삼았나니 과연 그렇게 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7-19).”
정작 그 모든 것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한사코 외면하고 부정하며 ‘우상’에게 입히는 꼴이라니! 우리의 우상이 무엇인가? 자기만족, 당장의 평안과 위로, 일이 잘 풀리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는 여러 경로의 사람들을 보면서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서는 것이었다. 보니 열에 아홉이 그러해서, 똥 누러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다급할 때는 호들갑을 떨며 그 신앙이 요란하다가 적당하여져 만족함이 찾아오면 더는 하나님을 바라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글방에서 교회로, 우리 아이들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때가 한참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저마다 필요에 의해 주를 찾았고, 나름의 성과를 얻은 뒤로는 ‘하나님을 믿는 게 부담스러워요.’ 하는 문자 이후 교회를 떠난 어느 아이의 솔직한 말처럼 거짓말처럼 떠났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욥의 고백과 같이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둬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솔로몬과 같이 누구도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곧게 하신 것을 굽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그런데 이를 우리가 임의로 한 줄 알 때 오늘 본문과 같이 예루살렘은 음행한다. 믿는 자로 음행이란,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겔 16:20-21).” 스스로는 물론 자식이나 부모 형제를 그리 죽여 우상에게 넘기는 일과 같다.
어제 오후 누구와 통화하다 여느 교회 어지간한 목사 자녀들이 곁길로 빠져 온갖 죄악을 일삼는 데 대해 성토하다 자기 아이들 역시 고등학생이 되고 여느 과를 지원하는 데 있어 그 불안과 염려를 호소하였다. 점점 부모의 말은 권위가 없고 더는 억지로 할 수 없는 나이들이 되었을 때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이라! 나는 저의 염려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어 난감하였다. 우린 누구도 대신 살 수 없듯이 대신 구원을 이룰 수도 없다. 다만 앞서 어느 모친의 거짓 신앙과 같이 ‘아들이 잘 되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하는 말로 저가 회교도가 되어 저들 의식에 참여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못한다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톨스토이의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오늘 본문의 저들, 선민 이스라엘의 일로 이 내용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부디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 5:4).” 우리에게 맡기신 기업, 자녀를 주 안에서 바로 양육함이 옳다. 마치 이는 우리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할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하신다.
곧 내가 주를 사랑함으로 내 자식, 내 부모로 저들을 대하기에 앞에 맡기신 한 영혼, 주의 양으로 여겨 ‘먹이고, 치고, 먹여야 한다.’ 이는 명령이었고 사명이었다. 돌이켜 나의 가정을 돌아볼 때 나는 개떡 같았는데 주는 나를 돌이켜 부르시기까지 아이들을 붙드시고 기르셨다. 나는 한 게 없어 저들 앞에 할 말도 없다. 누구의 자식 문제로 근심하는 저에게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나의 허물과 부족함을 증거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심을 말해주었다. ‘주신 이도 거두시는 이도’, ‘굽게 하신 이도 곧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때가 아무리 그러하다 해도,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설령 그러할 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 지어다
(103:2).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 16:59-60).” 비록 주를 떠나 멀리한대도 주는 결코 우릴 포기하지 않으심을.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오늘 우리로 주 앞에 세우셨다는 것. 노예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 목사가 고백한 것처럼, 나 같은 죄인도 수렁에서 건지신 이의 사랑을 믿노라. 어느 책에서 저의 말에 밑줄 그으며 나는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함부로 살 때를 돌아보면 차마 그런 나를 살리신 이의 사랑을 헤아릴 수도 없으나, 그리하여 나는 누구의 염려와 그와 따른 기도에 대하여 확신한다. 그리고 부디 먼 길을, 험한 시절을 홀로 돌게 하지 않으시기를.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32:9-10).
말씀 붙들자. 주를 바라자. 설마 어느 모친의 잘못된 신앙처럼 어느 종교 하나쯤 가지고 세상 평안히 사는 게 전부가 아니라면…. 어느 사모는 큰 딸의 그릇 어그러진 길을 두고 주께 돌아오기만을 구하였다. 10년 후 딸애는 암에 걸려 돌아왔고 그 어미는 애간장이 타들어가나 주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저의 그러한 사연을 듣다 애끓는 심정으로 가슴을 쓸어가며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였다. 문득 두 모친의 참 신앙을 생각하게 된다. 한 여인은 아들이 잘 되길 바랐고 급기야 회교도가 되어서라도 승승장구하는 것에 만족하였는가 하면, 한 모친은 비록 젊은 나이에 항암치료를 하며 사투를 벌이지만 다시 주를 바라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감사였다.
앞서 한 모친을 생각하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하신 말씀과 또 한 모친의 경우,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6-27).”
하는 말씀으로 대비하여 본다. 우린 너무 쉽게 변절한다. 마음은 언제나 약하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우리로 오늘 말씀은 경계하며 순결하여 주 앞에서 온전하기를 바라신다. 이는,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6:62-63).”
주의 긍휼하심 앞에서,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72: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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