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전봉석 2023. 7. 21. 05:36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에스겔 21:6, 9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시편 77:12

 

 

 

유다를 향한 심판의 예언이 이어진다. 앞서 남방 삼림을 비유로 멸망을 작정하신 사실은 천명하고(20:33-44), 이어 바벨론의 유다 심판이 오늘 칼의 비유로 전해진다. 칼은 가차 없고 거침이 없다. 하나님은 이를 예언하게 하신다. 칼을 칼집에서 빼어 유다를 칠 것이다(21:3-5).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을 그 도구로 사용하심이다. 이에 백성은 그 고통이 끔찍하고 슬픔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를 칼의 날카로움과 빛남으로 부각시켜 묘사한다(8-17). 하나님이 이를 살육자의 손에 넘기셨다. 이 칼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히 이룸을 알린다.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바벨론의 침략과 그 잔인함은 가공할 수 없는 칼의 역사로 진술된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치고(B. C. 586년) 이어 랍바를 함락시킨다(581년). 그 칼에 암몬도 멸절한다. 저들이 유다의 멸망을 조롱할 뿐 아니라 자신들도 회개하지 않음으로 같은 결국을 초래한 것이다(25:1-7).

 

죄의 악습을 끊어내지 않으면 주의 성전이라 해도 가차 없다. 칼은 정교하고 이를 위해 살았다. 이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대하 36:16).” 이를 자초한 사실을 예수께서 일갈하셨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4).” 일련의 예언이 주의 성전이라도 예외가 아님을 우리는 두려운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곧 하나님의 시각으로 오늘의 모든 현상을 살피고 근신해야 한다.

 

오늘 3절,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칼은 예외를 두지 않고 그 예리함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는다. 칼집에서 칼이 뽑히는 순간 더는 망설임이 없다. 이를 다니엘은 말하여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단 2:20).” 입을 뗀 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22-23).” 이를 앎으로 저는 어렸으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

 

저가 상대하여 말하는 이가 오늘의 이 잔인한 칼 느브갓네살 왕이었다. 모두가 서슬이 시퍼런 그의 통치 앞에 두려워할 때 아이 다니엘은 그와 같은 칼 앞에 꿈쩍도 않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뜻을 정하였다.’ 오늘 우리 신앙이 허약함이 이에 미치지 못한 까닭이겠다. 돌이켜 회개하고 주 앞에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는 하나 언제까지 은혜, 은혜만을 구하며 어리광을 떠는 꼴이라니! 모두가 ‘사랑의 하나님, 나를 도우시고, 내 편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꿈꾸고 바란다. 그러다 보니 성장을 멈춘 아이처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여전히 초신자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스스로는 햇수를 자랑하고 그에 따른 직분으로 자신의 신앙을 가름하는데 실상은 아이 같아서 그 신앙은 간당간당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2-3).” 이 말씀을 하는 대상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다. 당대의 종교지도자요 정치지도자들로 백성을 이끄는 자임을 자처하던 위인들이다.

 

마치 스스로가 거짓 선지자가 되어 자신에게 말하길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며 거짓 위로와 자부심으로 억지 자존감을 운운하며 신앙을 마치 심리기법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상대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시험을 다 끝내고 이미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안 믿는 이와 교제를 시작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아이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주의를 준다. 점점 더 교회를 멀리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수천 개씩 늘어날 것이다. 술자리에 불려 다니고 안 믿는 자들과 생활하면서 하나둘 지금껏 쌓아온 믿음이 틈을 보일 때마다 허물어져 갈 것이다. 서정인의 소설 <강>과 같이 어쩌면 우리 신앙은 천재에서 둔재로, 어릴 적 가지고 씨름하였던 믿음은 가소로운 게 되어 흩어질 것이다.

 

모두들 그러고 사니까, 하는 소린 그들 사이에 섞여버려서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오늘 본문의 이 칼춤이 우리 인생에는 예외이겠나? 이는 시험이다. “이것이 시험이라 만일 업신여기는 규가 없어지면 어찌할까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1:13).” 오늘 말씀은 이를 알린다.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님을.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시쳇말로 ‘한 방에 훅 간다.’ 견고할 줄 알았던 인생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바람 같이 사라질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노골적으로 말한 바 있다. 너무 좋은 길로만 인도하셨다. 모든 것이 순탄하여 바라는 대로 길이 열렸다. 대학을 갈 때도, 군대를 갈 때도 공군에, 물론 열심히 했지만 하나님은 앞서 금감원에 합격, 회계사까지…. 저도 안다. 나름 감사함을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눈에 띄게 유야무야 주일을 의무감으로 지킨다. 묵상 글이 끊긴지 오래다. 더는 내가 뭐라 할 나이도 훌쩍 넘겼다. 이제 스스로가 말씀으로 눈을 떠야 한다. 칼 든 주의 천사들이 준비하고 섰음을 보아야 한다. 이는 시험이다. 실질적인 우리 이야기다. 안이함으로 있다 어느 순간 잃고 난 뒤에 아는 어리석은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된다. 주의 은혜는 그 귀함을 알 때 소중히 다루고, 소중히 할 때 귀히 사용하신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조만간 오겠다고 한 이는 감감무소식이다. 어느 순간 전화라도 하면 더는 부담스러워한다. 잘 살고 있는데 마치 훼방하는 사람처럼 껄끄러워한다. 뭐라 말씀을 이르면 듣기 싫어한다. 이전에 가졌던 순순하였던 자신의 신앙을 어릴 적 치기쯤으로 아는지, 그땐 그랬다는 식으로 추억으로 넘겨버린다. 오늘 이 칼은 가차 없고 거침이 없다. “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겔 21:5).”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어서 칼은 상대를 묻지 않는다. 명령을 수행할 따름이다.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6).” 이와 같은 탄식이 들리는지.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2-14).”

 

그럼에도 말씀을 결국 거부할 때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겔 21:9).” 이에 우리 안에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일어 주 앞에 돌이켜 회개하는 마음이 정상이다. 이를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 이야기로만 들릴 때,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이 얼마나 섬뜩한 말씀인지? 설마, 나는 아니겠지? 하는 스스로의 허용과 예외가 문제이다. 하여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저가 누구보다 신앙이 없고 믿음이 약해서 이런 걱정을 했을까?

 

설마, 난 아니겠지? 하는 마음이 스스로인 것을 알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누차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여기서 관건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마치 믿음이 무슨 만능키나 되는 것처럼 모든 게 열릴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칼은 가차 없고 잔인하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신 28:45).”

 

나는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해당된다. 정작 아닌 자들은 이를 두려워할 줄 알고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겔 21:10).” 두려워 떨 줄 아는 게 주를 경외함의 증거이다. ‘뜻을 정하여’ 그 어떤 타협도 거부하며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이다. 이에 시편은,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8-9).

 

결국 나이 들어 병들고 뒤늦게 이를 깨달으며 후회하고 한탄하며 회개하는 부끄러운 자가 되지 않기를. 주가 행하신다. “그 칼을 손에 잡아 쓸 만하도록 빛나게 하되 죽이는 자의 손에 넘기기 위하여 날카롭고도 빛나게 하였도다 하셨다 하라(겔 21:11).” 이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여전하신 우리를 향한 예언이고 경고이다.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12).” 거기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하여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하고 자신의 삶을 함축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에,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77:1-2).

 

시인은 다른 위로를 모두 거절하였다. 자식들 잘 되는 일? 돈벌이가 형통하여 살만한 삶을 누리는 것? 내가 아는 아무개는 물질의 축복(?)이 넘치면서 여전히 교인으로 사나 자기 멋대로 교회를 선택하고 목사를 고르고 말씀을 팽개친다. 저는 참 기가 막힐 정도로 돈을 잘 번다. 하여 그 영혼은 타락하여 겁이 없다. 또한 아무개는 너무 잘 풀렸다. 좋은 대학에 턱 붙고, 한국은행에 입사하여 안락한 삶을 누리면서 더는 하나님을 철학과 관념으로의 존재로 바꾸었다. 더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말씀을 멀리하고 산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믿는 자이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 세상에서 저의 순탄한 길이 그 부모의 마음에 흡족하다. 더는 뭐라 일러도 씨알도 안 먹힌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별로 개의치 않는다.

 

칼은 예리하게 벼려져 칼집에서 뽑히는 순간 모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 31:3).” 그래서도 시인은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느니 주의 성전에서 문지기로 사는 게 낫다고 하였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그리하여,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77:12).

 

우리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소망과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19-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