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전봉석 2023. 7. 22. 05:39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22:31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편 78:38-39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주변국을 여호와의 칼로 벼리고 저들을 도구삼아 진노하신다(21장). 이어 오늘은 스스로 더럽혀진 이스라엘에 수치가 임할 것을 알린다(22:3-5). 그들의 범죄를 열거하고(6-12), 그로 야기된 심판을 선언하신다(13-16). 자신들의 권세를 오용하고, 안식일을 더럽히고, 피를 흘리기 위한 이간질과 우상숭배와 음행과 성적타락, 뇌물수수, 고리대금, 사기 등을 일삼았다. 이는 어쩌면 우리 일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다(17-22). 저들의 타락은 곧 영적으로 진노의 풀무로 심판하실 것이다. 결국 가나안을 대상으로 하는 타락은 이방인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23-31). 하나님은 그런 중에 자신의 심판을 막을 수 있는 자, 의인 하나라도 찾았으나 찾지 못하심을 나타낸다(30-31).

 

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관심은 주의 자녀들이고, 저들의 육적인 타락이 결국은 영적으로 수치와 수모를 가져올 뿐임을 밝힌다. 이에 우린 무엇으로 삶의 중심을 잡고 있는지를 묻는 것 같다. 이곳에 열거된 죄악의 참상이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어서,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하여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6-17).” 곧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우린 우리 자신에게 너무 관대한 게 문제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이중 잣대를 가지고 산다. 스스로들 괜찮다고 하면서 이에 공감해주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원한다. 서로의 죄를 죄로 지적하지 않는 관계를 원한다. 좋은 것만 보려한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좋은 듯하나 서로는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를 은폐한다. 직면할 수 있는 기회를 회피하거나 묵살한다. 더욱이 누가 이를 지적하면 알면서도 서로를 적대시한다. 죄는 더 이상 죄라 할 수 없다. 버젓이 건물마다 성매매업소가 있다. 이를 다 알면서도 서로는 모르는 척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서로 위선과 허세도 알면서 모른 체 해준다.

 

우리가 그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그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렘 13:2).” 우리에게 말씀이 임하시는 것을,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학 2:20).” 우리에게 또한 한 날의 말씀이 주어지고 이를 묵상함은 삶으로 일상에 섞는 일이다. 죄 된 가운데 살되 죄로 물들지 않는 길이다. 모두가 그러하다 해도 돈에서 의연하고 가난을 서러워하지 않으며 질병과 재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는 믿는 자의 내공이 말씀으로 붙들릴 때이다.

 

나는 내가 스스로 강한 사람이 아닌 것을 잘 안다. 누구보다 감정에 휘둘리고 쉽사리 타협하기 일쑤인 것도 안다. 그래서도 나는 나의 마음을 주의한다. 어떤 생각이 들 때 그 생각을 주 앞에 놓고 말씀을 관점으로 점검하려한다. 그럼에도 돌아서기 무섭게 감정이 일면 속수무책인 것을. 하여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나의 이 부질없음에 대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그 한계를 주께 늘 아뢴다. 때론 내가 내 자신이 지겨울 때가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이에 우린 장차 임할 심판의 예언을 들어야 한다. 성경은 모든 예언을 축약하고 있다. 오늘 2절에서도 “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 죄악에 대한 어떤 분이 일어날 때 내가 나로 먼저 ‘나의 가증함’을 인정하게 된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주다, 또는 어떤 일에 분노하다 그것이 나 자신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0:7).”

 

그러므로 매순간이 전쟁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의 문제가 아니다. 영적인 문제이다. 어느 부부의 서로 무뎌져 가는 모습에서 우린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에 한계를 인정한다. 그때 누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설령 저 자신이 자신을 혹은 그 배우자를 뭐라 탓하며 어려움을 토로할 때 그것에 동조하면 졸지에 내가 그를 지적하는 것으로 적대시한다. 이는 본능적인 것 같다. 그 부모가 아이를 탓할 때 그것을 인정하면 그 비난의 화살은 역으로 날아온다. 또는 기껏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고는 그에 따른 수치감으로 들었던 나를 경계하거나 심지어 비난한다. 행여나 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가끔은 누구와의 상담이 어려운 것은 듣는 일에서는 물론 조언을 하는 데서도 비난은 자칫 내게로 향한다.

 

주저하고 마다하다 이런 일을 당할 때면 황당하다. 하여 나는 이를 글로 써보라, 권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자신을 비추어보길 바라지만 열에 아홉은 글쓰기를 못한다는 핑계로 회피한다. 결국은 싫은 것이다. 스스로의 잘못을 다른 상대에게 비난하길 좋아한다. 나는 그래서 모든 댓글 창을 닫았다. 나 역시 쓰지 않지만 보지도 않는다. 그저 가만히 듣는 일도 어렵고 그 뒤 뭐라 호응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결국은 스스로의 일이다. 서로의 신뢰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성령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하고 명령하신 바,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6-27).”

 

가령 한동안 ‘자해하는 아이’의 엄마가 왔다. 아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어찌 하나님이 서로를 알게 하셨다. 두어 달 아이가 입원한 사이 저이는 거의 수시로 찾아오거나 전화를 하였다. 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를 들었다 놔야 할 정도로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도 ‘이런 말까지 해도 되나’ 하면서 하였고, 나는 때로 민망하기도 하여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이틀이 멀다하고 아이 문제가 부부 문제로, 부부 문제가 서로 양가의 문제로 확대되어 이야기는 마치 누룩을 넣은 막걸리 통 같이 부글거리며 발효되었다. 그리고 아이가 왔다. 정작 나는 무심하였고, 모르는 일처럼 아이를 대했다. 두어 주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내용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내가 십대 아이들을 무서워하는 것은 겁이 없어서다. 저의 말에 그때의 나를 견주어 같이 이해하려 해도 스스로 손목을 긋고 팔뚝이 선연하게 여러 줄이 보이는데도 아이는 민소매차림으로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함께 예배를 드리기를 권하자 저는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히며 기독교와 배치되는 게 아닌가? 하고 되물었다. 우린 모두 죄인이며 나 역시 내가 이성애자라고 주 앞에 꺼릴 게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 아이의 반감은 서서히 돌아섰다. 그런데 복병은 그 아이 엄마였다. 정작 아이가 마음을 열고 심지어 함께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 알고 더는 아이를 보내지 않았다. 저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종교적으로 풀길 원하지 않는다는 소리였고, 또 하나는 같은 교회면 ‘그런 교회?’는 보내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모 큰 교회를 운운하며 한달에 한두 번 그 교회로 나간다고 했다. 저의 말은 ‘자신들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과 있기를 바랐다. 나는 붙들지 않았고, 어느 순간 이런저런 엉뚱한 소리가 들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죄란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덮어씌우기이다. 남을 탓한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자신들의 죄를 전가한 것을 위시하여 모든 사람은 그리 자신의 죄를 회피한다. 그래서 죄는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속성이 있다. ‘나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하고 시작하는 말은 대부분 남을 비난하여 ‘너 때문이야’ 하는 결론을 도출한다. 희한하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나 역시 다를 게 없다. 이를 알면서 나는 가급적 안 믿는 자와의 대화를 꺼린다. 특히 저의 속 얘기를 들을 때면 속으로 연신 기도를 한다. 이는 그 대화의 결국이 나를 찌르고 들게 분명해서다. 듣기만 해도 들었다는 이유로 어떤 일을 두고 의심을 한다.

 

결국 우리 죄의 문제는 우리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 주께 아뢰고 나는 그저 잊는다. 신대원을 하고 목사가 되면서 모든 SNS을 끊었다. 블러그는 공개로 하였고, 카톡만 한다. 나의 모든 계정은 가족공용으로 사용하고 모든 비밀번호는 아내도 같이 쓴다. 마치 청교도들이 심지어는 자신들의 모든 사생활을 공개하고 공유하였던 것처럼, 개인적인 것에 죄가 깃든다는 것을 알았다. 종교개혁자 루터은 말하길, 죄란 ‘머리 위에 새가 둥지를 틀게 하는 일이다.’ 숱한 새들이 머리 위로 날아들 수 있으나 그렇다고 둥지를 틀게 하면 그것이 죄가 된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 78:38-39).

 

오늘 시편의 진술이 마음을 울린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 2:4).”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의 타락과 죄의 유혹은 끝나지 않는다. 이에 오늘 말씀은, “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겔 22:3-4).” 그에 따른 결국이 뻔한 것을. 그러므로 “너 이름이 더럽고 어지러움이 많은 자여 가까운 자나 먼 자나 다 너를 조롱하리라(5).”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결과로 남을 비난하다 해가 저물듯 인생이 다 갔다. 어제는 설교원고 작성을 끝내고 <다음 소희> 영화를 보았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겠으나 그 가운데 고통당하는 이들의 극단적인 결국이 마음 아팠다. 그리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했다. 나 역시 어디 콜 센터에 전화하면 나의 불편과 불만을 접수하다 혈기가 오른다. 나름은 타당하다고 여겼는데, 숱한 사람들로 시달리고 있었을 저들의 고초를 한 편의 영화로 선명하였다. 그렇듯 어떤 영화가 또는 누구의 어떤 사연이 나로 주 앞에 꿇린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린다. 오늘 말씀이 무섭다.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 하면 나는 피할 데가 없다.

 

그래서도 주 앞에 고한다. 발가벗겨져 숨길 게 없이 살려고 했던 청교도적인 신앙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 같다. 숱한 SNS나 개인방송들이 자신을 포장하고 과신한다. 심지어 팔로우 수도 돈을 주고 끌어올려 그것을 인지도로 삼는 착각을 한다. 나는 모든 거짓이 더는 거짓이 아닌 것처럼 미화되는 것이 무섭다. 내 안에 그것을 동경하는 마음이 말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78:11).

 

오늘 시편은 지적한다. 성경은 이르길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4).” 오늘 우린 어느 훗날 누군가의 열조가 될 텐데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신 30:8).” 그럴 수 있는 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므로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29:29).” 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78:22, 37).

 

나를 돌아보며 내가 함께 하였던 이들을 생각하고 서로 괜찮다고 말해주었던 것들부터 뜯어낸다. 내 의식을 차지하고 있던 허용과 남용을 인정한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여서 호의를 권리로 짓밟았고, 호의를 호감으로 여겨 무례하였다. 그러하였던 나를 인정하면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는 것부터, 이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78:38-39).

 

이에 감사와 영광을 올린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