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에스겔 19:14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편 75:6-7
유다 말기 두 왕의 몰락을 알리는 두 마리의 사자 비유가 실렸다. 요시야에 이어 왕위에 올라 채 3개월 만에 애굽 왕 느고에 의해 폐위되고, 애굽으로 끌려간 17대 왕 여호아하스(B. C. 609년)와 다음 사자는 여호야김에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또한 즉위 3개월 만에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끌려간 19대 왕 여호야긴(B. C. 598-597)을 가리킨다. 다음은 포도나무 가지를 비유로 하는 애가인데, 무성하였던 가지는 남유다의 열왕들을 상징한다. 그 가지들 중 뛰어난 가지는 유다 20대 왕으로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B. C. 597-586)을 가리킨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여호야긴이 그리 되고 왕위에 올랐으나 자신을 높이고 교만하다 바벨론의 공격으로 결국 유다는 멸망한다(왕하 25:1-12).
누가 말하길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긴 앞서 왕이 그리 되면 다음 왕은 이를 교훈으로 자신을 겸손히 하고 주를 섬길 만도 한데,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죄와 그에 따른 징계가 오늘 우리의 모습에서도 역력하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결국 하나님 외에 결코 다른 소망이 없다는 것을 그토록 반복되는 교훈과 징계에서도 왜들 알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 에스겔은 애가를 지어 부르라는 명령을 받는다. “너는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1).” 애가는 슬픈 노래로 앞날을 암시한다. 우리가 이를 듣고 기억하여 저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4-25).”
이에 시인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11).
곧 우리가 우리 부모세대와 그 위의 세대를 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이를 온전히 받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변에 보면 목회자 자녀들이 일반 성도들의 자녀보다 못한 결과로 세상을 따라가는 경우도 흔하다. 나는 결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하였던 이들이 어느새 보면 친정엄마의 점철을 따르는 것을 본다.
이는 우리가 주만 바란다는 것이 누구를 통하여, 저와 같이, 그 길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앞선 저는 저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오늘의 나는 나의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는 각각 개체적이나 이는 가히 계통적이다. 성경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하신 말씀과 같이 곧 아브라함은 저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길을 떠나는 믿음을 보였고, 이삭과 야곱은 또한 각각 저들의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주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각각의 하나님이셨으나 동시에 모두를 통일되게 하신 하나님이다.
은연중에 우린 서로를 닮는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0-11).” ‘나’를 기준으로 놓고 사방의 모든 일들과 그 상황은 교훈이 되고 책망이 되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누구를 비유하고 있는가 살펴 저들의 반복되는 죄의 연속을 볼 수 있었다. 결국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잠 2:20-22).” 이는 분열 왕국이 되기 전 솔로몬의 훈계였고, 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면서 각각의 국가를 형성하여 남들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면서 저들이 겪는 역사의 반복은 유사하였다.
결국 이 땅의 모든 것은 한계가 있고 그에 따른 기간이 고작해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90:10).
하는 시인의 통찰과 같이,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1).
하고 애통해 하며,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2).
하는 기도가 성경에 버젓이 있다. 저마다 앞으로 10년을 더 살지 50년을 더 살지 누가 알겠나만… 이번 장마철에도 누군 그날 아침 평일과 다름없이 어떤 꿈과 희망을 갖고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하였다. 어제도 장모를 모시고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두고, 우린 다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6-17).” 하시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권면하였다. 생에 대한 애착이 강하나 그 몸은 이미 아흔을 바라보는 터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이 말씀을 붙든 뒤 나의 늙음과 낡아짐에 대하여 전에 없던 포용이 생겼다. 아끼고 잘 다루어 사용하지만 더는 어쩔 수 없는 나이듦을 인정한다. 가령 머리는 하얗고 빠져 볼품이 없어지면서 아내는 무슨 샴푸가 머리를 덜 빠지게 한다거나 무슨 영양제가 오히려 머릴 새로 자라게 한다는 둥 하는데 나는 개의치 않는다. 전엔 ‘더 나이 들기 전에’ 하는 전제 하에 돈을 모으고 집을 장만하고 나름 노후대책에 어쩌고, 하는 소리에 민감하여 마음을 두고 살았으나 더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나의 날들은 주가 함께 하시며 이끄셨던 날들이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당장 오늘이 될지 혹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겉사람’을 두고 씨름할 게 아닌 것이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란 증거는 ‘속사람’을 염두에 두고 날로 새로워지는 데 중심을 둔다. 그러므로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112:10).
하여,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잠 10:28).”
이 자명한 사실에 눈을 뜰 때 더는 내 문제로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성경은 엄위하여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이와 같은 극명한 차이를 우린 최소한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노아의 때에도 다윗의 때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도… 사람 참 고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죽하니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곧 누구의 말처럼, ‘내가 내게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내가 내게 끝도 없이 말한다.’ 그 말은 세상 염려와 근심으로 눈을 뜨기 무섭게 잠들기 전까지 지속적이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라도’ 몸을 이끌어 이른 새벽 교회로 올라온다. 말씀 앞에 앉히고 성경을 묵상하고 이를 쓴다. 눈이 꺼끌거리고 졸음이 가득하다. 몸이 늘어지면 책상을 올려 일어서서 글을 쓰거나 말씀을 되새긴다. 억지로라도, 또는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은 생각처럼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결심이나 각오로는 안 된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우리의 파멸의 불이 결국은 그 자체로 나온다는 것을 읽는다.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누구 때문에, 어떤 일로 인하여, 혹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 따위는 소용이 없다. 노아의 방주도 그 문이 닫힌 후 끝이다. 소돔과 고모라도 불덩이가 떨어지면서 끝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그냥 그리로 가라는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힘쓰라’ 하심은 가까운 훗날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나 더는 그럴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느끼는 것과 같이 있을 땐 몰랐는데 잃고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망연자실하곤 한다. 더는 손 쓸 수 없는, 우리 영혼의 어느 지점에 설 것이다. 실은 어제 아내와 그런 대화를 나누다 어떤 어려움을 느꼈다. 나는 족한 줄 알고 우리 형편껏 살자는 것이고, 아내는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는 소리겠는데… 인생에 미련을 많이 두고 사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소망은 희미해진다. 아흔이 다 된 장모에게 생의 마지막을 늘 염두에 두고 주의 나라를 꿈꾸시라 해도, 실은 그것이 영혼의 문제라… 우리는 구해야 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그런데 이를 알지만 썩 바라고 싶지 않은 것은 성령은 내 안의 소욕을 거스르고 내 안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른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를 간단하게 구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나의 경우 그렇게 싫어서 멀리 최대한 멀리 외면하고 도망치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들, 사람과 일을 마치 성령이 훼방하는 것 같았다. 일찍이 어려서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한 그 길을 ‘내 몸을 쳐’ 복종하여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실망도 이제는 있다. 세상을 벗하고 살 때는 늘 내가 내게 말하는 소리에 따랐다. 남들처럼, 남부럽지 않게, 앞날이 어떻고 하면서 마치 생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내 멋대로 살았다. 그때 같이하였던 이들이 여전히 잘 살고, 하나님 없이 자유로운 것 같으나 조금만 그 속을 살피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아이들 공부 때문에 가족이 모두 외국에 나가 있고 혼자 ‘기러기 아빠’로 사는 선생의 외로움은 이제 홀로 늙어가는 중늙은이일 뿐이다. 그토록 돈돈거리며 사업을 하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돈돈거린다. 그것 때문에 친구는 평생을 영화사 일을 하다 뜬금없이 가족들과 떨어져 남해 어디서 수산업 무슨 일을 한다.
이런저런 사연이야 모두가 같을 것이나 가끔 어쩌다 연락이라도 오면 저들 말은 모두가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다를 게 없다. 누군 아예 비즈니스선교사를 자처하더니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저는 가끔 전화를 하여 무슨 일로 한국에 왔다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과장되게 안부를 묻는다. 저의 반이 허세라는 걸 안다. 특히 주의 일이 어떻고 천국이 어떻고 하면서 바이어들 미팅 운운하며 술에 절은 목소리로 그런 말은 민망하다. 누구 또 가족 중 누가 사고로 입원을 했다며 저의 이름까지 적어 기도를 부탁하는데, 여전히 교회는 미루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은 꺼린다. 예배를 권하면 늘 돌아오는 소리가 ‘다음에’ 하는 말뿐이다.
나는 저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저들은 오늘을 모면하며 사는 일에 연연한다. 그러니 어쩐다? 종말의 때에 이런 말씀이 귀에 들리지가 않으니,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75:1-3).
이와 같은 시편의 종소리를 듣고 돌이킬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9-50).” 이에 무섭든지, 기다려지든지 해야 하는데 그저 눈만 슴벅거리며 아무 영문도 모르고 산다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이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여,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75:6-7).
모든 게 다 주의 뜻 안에 있음을 알면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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