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전봉석 2023. 7. 23. 04:5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에스겔 23:35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 79:13

 

 

 

두 자매가 음행한다. 언니 오홀라는 ‘그녀 자신의 장미’라는 뜻으로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며 사마리아를 일컫는다. 동생 오홀리바는 ‘내 장막이 그녀 안에 있다’는 뜻으로 남유다를 가리키며 예루살렘을 일컫는다.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더불어 행음하듯 하나님을 저버리고 저들의 우상을 사랑하였다. 앗수르의 국력과 화려한 문화에 매료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와 관계하다 친애굽정책을 펼쳐 B. 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였다. 남유다 역시 갈대아인들 바벨론과 동맹하다 B. C. 605년에 1차 침략을 당해 포로로 끌려가고, 이들 또한 친애굽정책을 구사하다 결국은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각각의 음행으로 단정하고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전혀 자격이 안 되는 남북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당신의 아내로 삼으셨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모두 옛 애굽을 사랑함으로 그 습관과 우상을 추종하였다. 특히 남유다의 경우 앞서 북이스라엘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보면서도 이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 우리 또한 다를 게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릴 자녀 삼으시고, 신부로 맞아주셨다. 우린 오홀라와 오홀리바이다.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4).” 오늘 말씀은 실제 우리 생활이 어떠한가를 묻는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그런데 우린 어느새 타성에 젖었다. 태만하여져 무뎌졌다. 예전과 같이 세상과 짝하여 산다. 저들과 음행하였던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우리 자신인 것을 생각한다. 모두가 그러한데도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모두 그렇다 해도 끝까지 아닌 자에 속하기를. 내 안의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돌이켜 주의 참 사랑 안에 거하기를.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 99:9).

 

이를 인정하고 살 때,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 이를 위하여 날마다 깨어 근신하는 삶이 필요하다. 누구든지 언제고 쉽게 저 유혹의 늪에 빠질 수 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영혼은 한 발을 그쪽으로 담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9:12).

 

주 앞에 늘 깨어 있기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늘 자기 자신과 싸운다. 나는 두 사람의 블러그를 날마다 들어가는데 저들의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이 때론 나를 고개 숙이게 한다. 마땅히 여겨 그러려니 하고 있던 어떤 사소한 일을 두고 저는 주 앞에서 씨름하고 이를 직면하고 고백한다. 어느 순간 나는 저들을 응원하며 나를 돌아본다. 행여 어느 날은 글이 올라오지 않으면 기다리고, 며칠째 글이 끊기면 저를 두고 주께 궁금해한다.

 

이는 우리의 속성이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곧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이를 괴로워하고 속상해하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복이었다. 영적 타락은 아주 사소한 타협이나 미적거림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겔 23:6).” 우리 마음을 현혹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여 저들의 습성을 따르는 데 있다.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7-8).”

 

이를 오늘 우리 자신으로 놓고 볼 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의 사치와 허영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우리 또한 그런 삶을 추구한다. 누구라도 그럴 기회가 오면 이를 거부할 수 없다. 은연중에 따라한다. 짝퉁이 진짜보다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말씀은 일갈하여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또한 나는 친구의 성경 읽기에 대해 무어라 조언한다. ‘아픈 아이’의 성경 쓰기를 두고 때론 나무라며 정성을 운운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벌써 세 번째 성경 전체를 필사하고 다시 창세기를 시작하였다. 친구는 야근하고 11시에 돌아와 새벽 두 시까지 성경 읽기를 한다. 모자란 것은 출근길에 ‘성경 듣기 어플’을 이용한다. 누구의 블러그는 한두 줄 짧은 근황정도로 간소하나 그 내용이 정직하다. 나는 뭐라 지적하고 나무랄 줄은 알았지, 저들처럼 뜨거운 열의와 순수함으로 성경을 읽고 이를 손으로 쓰며 열심을 다해 주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어릴 때 어느날 새벽예배를 나갔다. 다음 날 밥상머리에서 누구는 졸고 있고 누군 아예 엎드려 잠이 들었다고 아버지께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차라리 너도 자지 그랬니! 하고 말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이를 떠올린다. 누구의 어떤 일을 두고 뭐라 상담하거나 무엇을 권할 때도 내 안에 이는 어떤 부끄러움은 오롯이 나만 안다. 내 안의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여전히 '애굽'을 사랑한다. 속으로는 언제든 하나님을 저버리고 오히려 누굴 탓하고 비난하기 일쑤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11:10).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이를 알고 이에 나 자신을 두고 괴로워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주의 권능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어쩌면 내가 그처럼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나의 유년의 교회 생활이 두고두고 은혜가 된다. 그때 느꼈던 어떤 감격과 충만함을 그리워한다. 가령 우린 모든 예배시간에 누구든 은혜 가운데 자발적으로 나서서 찬송하게 하였다. 어떤 분은 악기로 찬양하고, 어떤 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지으며 찬송하였다. 나 역시 어떤 날은 스스로 나서서 찬송을 했다. 또는 함께 철야예배나 새벽예배 때 어쩜 그렇게 하염없이 울면서 어린 게 뭘 안다고 용서를 빌며 뜨거운 마음으로 회개하였는지? 돌아보면 나는 아버지의 목회로 은연중에 수혜자였다. 물론그땐 몰랐다. 주일날 아침 교회 청소를 해야 한다거나 조금 더 자라 차량운행을 해야 하거나 중고등부 교사를 해야 했다. 억지로라도 성가대를 하기도 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돌아오면 나의 은혜는 수도 없이 다양하고 일상적이었다. 그럼에도 교회를 멀리하고 사람들을 싫어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마치 신기루에 취한 듯 살았다. 예술대학교를 가면서 저들의 자유분방함에 도취되었다. 정말이지 당차고 겁없이 살았다. 문창과 교수들은 수업 중에 담배를 허용하였고 자신들도 담배를 물고 수업을 했다. 학교 곳곳에서는 막걸리를 돌렸고, 술에 취해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결국 ‘그런 시간’과 어울리면서 나는 어릴 적에 눌렸던 억압에서 뛰쳐나온 줄 알았다. 자유연애를 꿈꿨고 뭔가 특이한, 남다르고 독특한, 어떤 것에 매료되었다.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겔 23:11).”

 

혼자가 어렵지 둘 셋이 모여 여럿을 이루면 더는 거리낄 게 없어진다. 오죽하니 고등학교 때 가까웠던 친구가 소위 자유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루 같이 놀고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자신은 믿는 사람도 아니지만 지구 종말이 온다면 딱 그 전날 같이 놀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오죽하면 그런 소릴 했을까?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사 5:13).” 설령 모두가 그러하다 해도,

 

“여느 사람은 구푸리고 존귀한 자는 낮아지고 오만한 자의 눈도 낮아질 것이로되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15-17).”

 

이제와 돌이켜 보면 나 같은 죄인을 어찌 주께서 다시 부르시고 오늘의 나로 주의 길을 가게 하셨는지, 이 모든 게 은혜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나는 그러해서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어쩌면 지금도 은연중에 그리 행할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누구에게 조언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다 나도 모르게 내 속에는 저를 힐책하며 비난할 때도 있다. 정작 나 역시 그러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결국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0-11).”

 

이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이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그러하여,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79:1).

 

행여 오늘 우리의 영혼이 그러하지는 않는지? 그러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4).

 

바른 신앙의 온전한 모습으로 살기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에,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9).

 

주께 아뢰는 말,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