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에스겔 20:33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10
장로들의 간구를 하나님이 거절하신다. 자신들의 오랜 포로 생활에서 나온 것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그에 따른 하나님의 거부하심이다. 이는 저들의 소행과 그 중심이 마치 우상을 섬기듯 하여 묻는 것이어서 하나님은 이를 거부하시고 이에 답하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심판에 앞서 저들의 패역과 구원이 교차한다. 이어지는 패역과 구원의 교차는 거듭되어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인내하셨음을 알린다. 결국 저들의 우상숭배와 패역으로 인하여 번번이 하나님의 뜻은 묵살되어 왔다.
“너희가 또 너희 아들을 화제로 삼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오늘까지 너희 자신을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31).”
이 한 구절에서 모든 원인과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32).” 저희의 선택이 오늘 우리의 그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주께 구하고 간구하여 뜻을 바란다고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그 시기에 따라, 자기들 좋을 대로… 그것도 기다릴 수 없어 그때마다 다른 우상을 찾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위로, 또 다른 만족을 추구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에 대하여도 자신의 뜻에 맞추어 바라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우리의 간구가 이 한 길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도 우리의 기도는 몸에 밴 습관 같이 손에 찍힌 지문 같이 일상 그대로 한결같아야 하겠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우린 우리 자신을 알 수 없다. 마음이 언제 어떻게 또 바뀔지 모른다. 그런 자신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 함정이다. 해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기도 응답의 첫 관문은 회개이다. 회개는 돌이켜 더는 그리 행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오늘 본문의 장로들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주의 뜻을 바랄 때 거절하심은 그 때문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으면서 무슨 신점을 보듯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기 때문이다. 회개가 아니면 기도도 아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이에 우린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즉 죄를 그대로 덮고 자신의 요구로 기도라 할 때 하나님은 이를 듣지 않으실 것은 물론 그의 얼굴을 가리신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그러니 기도란 게 무슨 소원을 빌듯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것으로는 들려질 수 없고 받으실 수 없다. 시편 139편을 설교원고로 작성하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시고 감찰하신다. ‘이런’ 하나님을 누군 부담스러워하여 교회도 많은 사람 사이에 묻어서 가고, 자신의 요구만 일삼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안정감을 얻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다 보고 듣고 아신다는 사실에 부담인지 안도인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1-4).
곧,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어제도 친구와 잠시 통화하면서 저는 신약이 구약보다 더 어렵다며 사복음서를 잃는데 그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 네 권의 책을 동시에 살피는 성경 읽기라, 나는 그것이 무리함을 말하였다. 마태는 세리였다. 누가는 의사이다.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였다.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사랑 받는 자였다. 저들은 각각의 직분과 그 시각에 따라 다른 예수님의 행보를 기록하였다. 그것만으로도 독특한 서로의 특징대로 그 의미를 살피면서 읽어야 할 텐데… 구약 읽기는 다 끝났다고 하여 그 가운데 어느 한 구절, 마음을 울리고 자신을 붙들어 세운 곳이 있는가? 하고 물었더니 친구는 그런 게 없었다고 답하였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나는 저에게 그럼에도 읽기를 멈추지 말라고 응원했다. 그 또한 의미가 있을 테고 무엇보다 ‘요즘 별 일 없나?’ 하고 물을 때 그야말로 요즘 저는 늘 내게 말하는 ‘별 일’이 성경 읽기여서 그도 신기하기만 하였다. 나는 나이 여든여덟의 우리 장모가 침대 모서리에 앉아 성경을 떠듬떠듬 읽는 것에 경이를 표한다. 어제는 예배드리는 데 창세기부터 출애굽기를 쭈욱, 읽고 있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장모는 자신보다 앞세워 많은 가족과 형제를 먼저 보냈다. 자식도 앞세우셨다. 살아온 날들이 모질었다. 그와 같은 심경이 시점이 되어 성경을 읽는 데 있어 시선을 이끌고 그 마음을 확장한다. 나는 이를 귀하게 여긴다. 원래 일률적인 책 읽기를 혐오한다.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에 따른 징계는 더 큰 사랑으로의 확장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우린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중심을 잃었을 때 우린 맹랑하다. 안 믿는 자보다 못한 처사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한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이에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33:12).
하여,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이는 마치 수학공식과 같이 신앙공식에 해당한다. 복을 원하는 사람이면 복 있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3-6).”
이에 어느 곳에 거하든지,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알면 더는 모든 여건과 상황이 의미가 약해진다. 더는 내 문제로 내 영혼이 눌릴 게 없다. 주를 바란다는 일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겔 20:33).”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의 대상으로 사는 일이다. 여기서 제외된 자로 살려고 다들 그렇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람들과 타협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우상에 절하는 일과 같다. 능하신 손, 펴신 팔로 나를 감싸시고 있다는 것,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3-24).”
이에 우린 더욱 죄에 관대할 수 없고 스스로 근신하고 깨어 기도한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하면 오늘의 어떤 우려와 근심이 우리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고통과 답답함이 주를 찾게 하는 신호이다. 이때 오늘 본문의 유다와 같이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무슨 점괘를 보듯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우리의 신앙이란 게 대체로 그럴 수 있고, 그러기 쉬운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사는 게 참 부산하다. 지난 주일에 다들 모여 차를 마셨던 곳이 다음 날에 철거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모두는 너무 사는 일에 여념이 없다. 단 한 구절이라도 진득하니 시간을 좀 갖지! 하고 말하자, 무슨 일 때문에 요즘 매일 야근이라며 친구는 오히려 ‘팔자 좋은 소리한다’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어쩐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백날 주여 주여 한들 회개가 없은 기도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그러므로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76:7-9).
이를 앎으로 우린 더 이상 자기 안의 노여움을 놓아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으로 주를 찬송한다. 주를 바란다. 우린 모두 각자의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씀으로 하나가 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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