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전봉석 2023. 7. 24. 04:42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피곤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겨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도다

에스겔 24:12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편 80:19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날(B. C. 586년)을 2년 앞두고 오늘 비유의 말씀이 주어진다. 당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때였다.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왕하 25:1-2).” 매우 긴박한 때에 녹슨 가마에 양고기를 넣어 삶는 것을 비유하여 심판의 원인과 그 집행이 임박하였음을 알린다. 하나님은 이 날을 기록하게 하신다.

 

B. C. 588년 10월 10일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왜 하나님은 특별히 이 날을 기록하라고 명하셨을까?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의 이름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느니라(1-2).” 먼저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로 말미암은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발 강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6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당시 교통수단을 감안할 때 예루살렘 포위 소식을 알려면 최소한 며칠은 소요된다. 따라서 포위된 당일 날을 하나님이 직접 알게 하심으로 이를 기록하게 하셨다. 또 하나는 범죄 한 남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현재 자신들이 죄 가운데 있고 이를 돌이켜 회개하고 범죄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포위 당일 녹슨 가마를 걸고 양고기를 삶게 하는 행위는 상징적인 것으로, ‘녹’은 죄이고 녹슨 가마는 당시 죄로 오염된 예루살렘이었다. 양을 통으로 넣고 삶으라 하심은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파멸할 것을 알린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피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하나하나 꺼낼지어다(6).” 여기서 제비 뽑는 것은 승전에 따른 패한 자들을 열 명씩 뽑아 처형하던 당시의 관행이다. 하나님은 ‘녹슨 예루살렘’에 대해 확고한 의지가 있으셨다.

 

우리가 자백하고 회개하면 이를 돌이키실 텐데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이게 그렇게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 14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루어질지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고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 그들이 네 모든 행위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루살렘이 이처럼 포위당한 당일 아침 에스겔의 아내가 죽게 될 것이란 사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15-17).” ‘네 눈에 기뻐하는 것’ 곧 저의 아내의 사망과 관련하여 슬퍼하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라 하신다. 이는 장차 파멸의 날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슬픔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모든 사람이 화를 입을 것을 나타낸다.

 

울어야 할 상황에서 울 수 없는 처지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이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이 간절하게 생각하는 자녀를 데려가는 날 곧 그 날에 도피한 자가 네게 나와서 네 귀에 그 일을 들려 주지 아니하겠느냐(25-26).” 그때에 도망한 자들을 향해 비로소 말하게 될 것이다. 에스겔의 말하기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33:22).”

 

하나님은 앞서 저로 예루살렘의 죄 앞에서 벙어리가 되게 하셨다.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3:26-27).”

 

이러한 사실을 살펴보면서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일이 개인의 감정적 결단이나 의지로 이뤄지는 게 아님을 알게 한다. 신앙의 기본은 절대 순종을 요구한다.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은 언제든지 요구하실 수 있다. 성경 여러 곳에 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매우 ‘소중한 보물’을 잃게 하신다.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애 1:10).” 때론 그 대상이 자녀이기도 하다. “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호 9:16).”

 

결국 죄에서 돌이키지 않을 경우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왕상 20:6).” 결국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사 64:10).” 이를 보면서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은 에스겔의 아내이고, 당시 에스겔의 사역은 많은 시간을 집에서 기거하며 예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일곱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이스라엘 장로 여러 사람이 여호와께 물으려고 와서 내 앞에 앉으니(겔 14:1, 20:1).” 저가 저들 앞으로 나아간 게 아니라 저들이 나아왔다.

 

에스겔이 사역을 시작한 게 서른 살 때였다(B. C. 592년) 오늘 계시를 받을 때는 588년으로 그의 나이 서른넷, 그의 아내를 예측하면 더 어리고 예뻤을 텐데 느닷없는 죽음으로 당면하였을 슬픔과 고통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그는 슬펐을 것이고 그 심정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웠을 것이다. 한데 에스겔은 주께 받은 은혜와 계시를 알고 이를 우선하여 자신의 감정을 따라 슬픔에 빠져들지 않았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히 주의 명령을 수행하고 순종하는 신앙이라니!

 

문득 떠오르는 한 예가 있다. 이는 실화이고 부산 어느 교회 목사의 간증으로 들었다. 저는 영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의 옆자리에는 한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서로 손을 잡고 가만히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너무 평안하여서 젊은 그는 물었다. 어디 여행을 가시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자 옆에 앉은 나이 지긋한 이가 입을 열었다. 실은 아들이 영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순간 저는 사과하고 말문이 막혔다.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난처해졌다. 한데 오히려 그 당사자는 무안해하는 저를 위로하고 먼저 영원한 안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간 아들을 말해주며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영국에 도착하여 서로 헤어진 후에 젊은 그는 하나님을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평온하였던 노부부의 조용하던 모습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결국 진로를 바꿔 신학을 하고 저는 목사가 되었다.

 

나는 이러한 사연을 접할 때면 겁에 질린다. 나는 할 수 없어서 부끄러우면서도 두렵다. 이때 드는 또 다른 한 이야기가 있다. 두 부자(夫子)는 어느 순교자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아들은 아버지께 자신은 죽어도 저런 순간에 죽음을 앞두고 그렇듯 의연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럴 수 있냐고 물었다. 아버지 역시 자신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뒤 아들을 안고 덧붙여 설명했다. 이번 주말에 우리가 기차를 타고 유럽을 횡단하기로 했는데 너는 어떠니? 하고 묻자 아이는 금세 밝은 표정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하며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넌 그 여행을 위해 무얼 준비하니? 그러자 아이는 공룡과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말했다. 그때 다시 아버지가 물었다. 그걸로 유럽횡단을 어떻게 해? 그러자 아이는 기차표랑 나머지는 엄마아빠가 다 준비하실 거잖아요! 그러자 아버지는 좀 전에 본 순교영화를 설명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다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당연히 나는 못한다. 에스겔과 같이, 어느 노부부와 같이, 그런 상황에 당면한다면 이겨낼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그건 내가 준비할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그때가 되면 놀라운 역사가 발휘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를 아주 더디지만 마주하는 것 같다. 돌아보면 그때 상황에 내가 신대원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미친 짓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붙들렸다 해도, 더는 감당할 수 없어 공황이 찾아들었으며 나는 매일 울면서 신대원을 갔다. 3년을 어떻게 끝마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매학기 나는 등록금이 없는데 그때마다 어느 손길이 채우셨다. 6학기 내내 나는 학비 한 번을 낸 적이 없다.

 

2학기를 마칠 때 목회실습보고서를 내야 하는데 나는 당시 전도사로 사역을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때 글방을 교회로 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어쩌다 그리 된 일’이었다. 교회 등록을 하고 2년의 목회(?)로 졸업과 동시에 목사고시를 치렀다. 평생 논술을 가르치던 내가 논술에서 떨어졌다. 다음 해에는 심리검사에서 떨어졌다. 그때쯤 됐을 땐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하셨듯 하나님이 이끄심을 눈치챘다. 세 번째 다시 시험을 치르러 갔을 때, 내가 오히려 난감해하는 면접관들에게 상관없으니 또 낙방시켜도 좋다고 하였다. 그렇게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길이 없었다. 돌이킬 수도 없었다. 그 말에 나이 지긋한 원로 목사님이 따로 불러 한 번 더 묻더니 결국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서도 나는 달리 내가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여기까지 이끄시고 하게 하신 이가 남은 여정도 모두 준비하고 계심을 믿는다. 아이가 유럽횡단여행을 앞두고 퉁명스럽게 그 부모가 다 알아서 표를 끊고 계획을 세우고 먹고 입고 쓸 것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이 자신의 아내를 잃고도 슬픔을 이겨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특별한 의지나 강인한 정신으로가 아님을 안다. 주가 이루신다는 것, 주께 맡긴다는 것, 어쩌면 한나의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7-28).” 또는 바울의 신앙과 같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5-36).”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그저 나를 부정하는 것뿐이다. 내가 하려는 생각, 할 수 있다고 하는 마음, 어찌 하려는 나름의 합리적인 계획들… 이를 모두 주께 맡기면서 그저 다만 주만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나는 이 또한 내가 한 게 아니라 그리 다 준비하신 이가 계심을 알고 있다.

 

오죽하니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나 선생이 혀를 내두르며 나와 멀어졌다. 누군 현실도피자라 하였고, 책임감이 부족하다고도 하였다. 누군 궁여지책으로 그리 한 것이라 하였고, 누군 내가 의지박약이라 하였다. 나는 그들 평가에 수긍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결정은 그러했다. 한데 이 또한 모순인 게, 난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 다만 두 손 들고 항복했을 뿐이다. 더는 내 의지를 따르지 않을 뿐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그것까지도 내가 하려하지 않을 때 가능하였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 나는 그런 마음으로 얼마든지 목사 고시 낙방도 주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그러할 때 오늘 27절,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그저 주가 쓰시는 도구로, 바람에 흩어지고 말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였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시 80:3-4).

 

주가 하신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7).

 

그리하여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어떤 땐 사는 일과 주의 나라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 끼인 것 같아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다만 오늘도 주의 것으로,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4,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