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에스겔 28:9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5
두로의 심판과 영광에 대한 애가를 선포하고(26, 27장) 오늘은 두로 왕 개인에 대하여 지목한다. 자신의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명성을 얻자 스스로 신이라 자처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했다.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로 그의 결국은 비참한 결말로 끝날 것을 알린다. 저는 부정한 무역 거래와 우상 숭배로 범죄하였다.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다. 두로 왕의 멸망과 그 원인에 대하여(1-19), 그리 뒤이어 시돈의 멸망을 예언하고(20-24),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한다(25-26).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을 구사하고 이를 의지함은 참담하다. 두로 왕의 높았던 때와(11-15), 멸망하게 될 상황(16-19)을 대비함으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의를 행할 때(15-16a), 이는 멸망의 길임을 알린다. 열방의 조소거리가 될 뿐이다(17).
두로 왕의 영화가 에덴동산에서의 보석과 장식으로 살았던 때와 비유된다(13).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던 ‘그룹’은 영광스러웠고 시온 산과 같이 거룩한 곳에 처소를 두었다(14). 이처럼 저의 일생을 풍자하여 두로 왕의 영광이 마치 신적 영광과 비견될 정도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은 멸망이다. 왕이라 해도 일개 연약한 피조물일 뿐이다. 저의 죄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두로 왕은 스스로 신격화하여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의 중심에 앉았다고 말했다(2).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왕들은 백성들의 추앙을 강요하였고, 이를 위해 자신을 신격화했다. 두로는 당시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경제 강대국이었으며, 두로 왕의 교만은 극에 달하여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떠받들게 하였다.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교만한 두로 왕의 패망(1-19절)과 시돈의 멸망(20-23절)과 이스라엘의 회복(24-26절)이 각각 별개의 단락으로 나뉘지지만, 시돈은 두로와 연장선상에 있다. 동일한 운명에 처해짐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상대적으로 선택받은 백성들의 구원을 돋보이게 한다.
두로 전체에 대한 애가(27:1-36)에 이어 두로 왕 개인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이 이야기에 공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누구라도 현혹될 수 있는, 자칭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경향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실제 오늘 우리의 생활이 그와 다를 게 없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개인의 행복권을 우선으로 하여 동성애나 자칭 자기만족에 철저한 보장을 갈구한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곧 저의 절대적인 가치로 평가된다. 부와 명예를 과신함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해 자신을 신처럼 위한다. 자신을 높이고 위하는 이러한 기류는 가정에서의 질서를 파괴하고 사회의 도덕과 윤리를 비껴간다.
개인적인 옷차림에서부터 선호하는 취미나 기호를 철저히 요구한다. 누가 뭐라하든 입고 싶은 걸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사랑도 쟁취가 되었다. 난공불락 같은 자아도취에 빠져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하고 단언한다(2). 하나님은 교만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7-10). 하나님은 두로 왕의 교만을 방관하지 않으셨던 것처럼(2-5), 바벨론을 통해 징계하셨다(26:7-14). 바벨론은 강포한 나라다. “그가 여러 나라 가운데에 강포한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그 땅을 멸망시킬 때에 칼을 빼어 애굽을 쳐서 죽임 당한 자로 땅에 가득하게 하리라(30:11).” 그처럼 힘의 논리로 세상은 굴종한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두로를 통해 알게 하ㅅ힌다(12-19).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우리 안의 ‘두로 왕’은 여전히 우리로 꿈꾸게 한다. 이 땅에서의 영광을 추구하게 한다(1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모든 통치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의 것임을 알게 한다.
어제 이른 아침, 누구의 전화가 들어왔다. 운동 겸 일찍 출근하여 산책을 하다 전화를 한 것이다. 저는 성경 읽기의 어려움을 토로하였고 나는 그러한 마음 자체가 귀하다고 하였다. 우리가 언제 이처럼 주를 바라며 ‘이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저에게 성령의 은사를 구하라고 하였고, 저는 구해도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우리가 이와 같은 대화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사모하게 하심이 성령의 은사라고 덧붙였다. 성령의 은사하면 저마다 뭔가를 보고, 듣고, 들었다 놨다 하는 어떤 신비로운 것을 상상한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 우리의 소소함이 주를 바라고 주 앞에 온전하길 바라는 게 성령이 하신 일이다.
덧붙여 우리가 우리 일생에 ‘이런 대화’를 할 줄 너는 알았냐? 하고 묻자 저는 자신도 ‘우리의 대화가 즐겁다’며 신기해 하다 알겠다고 하였다. 누구보다 나는 이 말의 무게를 늘 가지고 산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니며 이런저런 수다로 늘 즐거워하던 사이가 요즘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안부나 묻는 정도가 되었다. 것도 통화가 되면 동시에 할 말이 없어 얼른 끊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드는 사이가 된 경우 희한하다. 상대적으로 ‘이런 대화’로 서로가 하나님을 바라고 그 삶에서 자신에게 나타나는 변화와 마음을 들려주거나 듣는 일이 한 시간을 훌쩍 넘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대화하는 것이 성령으로다. 더욱이 성경을 묻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해줄 때, 나는 말을 하다 내 말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자주 느낀다.
‘나는 죽고, 나는 살았다.’ 이 새로운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우리의 영광이 어떠한가를, 솔로몬의 모든 영화가 꽃 한 송이보다 못한 것으로 비유하셨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 이는 우리 믿는 자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상대적으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그저 바벨탑을 건설하는 일만큼 허망한 것을(창 11:1-4), 그리하여 겸손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이 복이었다. 오늘 시돈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겔 28:20-26)을 상대적으로 대비시키고, 두로 왕에 대한 심판(1-19절)을 다시금 강조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약과 구속을 준수하신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우리가 이를 듣고 생각하여 느낌으로 잘못을 뉘우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주저하심이 없다.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27-28).”
시돈은 두로의 자매 도시라 할 수 있다. “두로의 모든 왕과 시돈의 모든 왕과 바다 건너쪽 섬의 왕들과…(렘 25:22).” 저들은 상호 밀접한 연관을 맺고 살았다. 지리적으로도 지중해 연안에서 불과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사이였다. 시돈은 두로처럼 다른 나라와 무역할 때 많은 불법을 자행했다. 여러 우상 중 아스다롯을 섬겼다. 서로의 연관성 때문에 에스겔은 시돈에 대한 심판 선언의 도입부를 두로의 경우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하고 일률적인 선상에서 이어갔다. 시돈이나 두로나 서로는 베니게 왕국의 도시로서 많은 불법을 자행했다. 아합의 부인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 우상을 들여와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왕상 16:31).”
여기서도 보았듯이 우리가 누구와 무엇을 공유하며 가까이 지내는가에 따라 그들은 운명공동체가 된다. 앞서 나를 가까이 하였던 이들을 잠시 소개하면서 내가 누구와 어울리며 어떤 일로 관심을 두고 살았는가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설명된다. 그때의 삶이 어떠하였는가를 어울리던 사람과 관심으로 알 수 있다. 감히 말하지만 오늘 내가 가까이 하는 사람, 그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 같이 나누고 이를 귀히 여기는 것의 여부가 우리의 결국을 짐작하게 한다.
가령 요즘 나의 부친은 어쩌면 생의 마지막 즐거운 순간들을 보내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가 저들과 모여 같이 울고 웃고 며칠씩 묵으면서 성경공부를 하던 모습을 신기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좁은 아버지의 서재에 서넛이 모여 앉아 천진하게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다, 서로 붙들고 울며 통성으로 기도할 때… 그때 아마 나는 중학교를 한 해 미루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의 즐거움(?)을 밖에서 듣거나 지켜보면서 마냥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때 서로 교회는 유난히 연합하였다. 우리 학생회나 청년부가 친구 분 목사님들의 교회와 연합하여 수련회를 하거나 부흥회를 했다. 놀랍지만 그때를 전후로 함께 했던 학생이나 청년들 가운데 훗날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나 선교사가 많이 나왔다. 그때 나도 또래 일곱과 설교노트를 교환하며 지냈는데, 일곱 명 가운데 둘은 목사나 선교사가 되었고 하나는 사모가 되었다. 뒤늦게 나도 목사가 되었으니, 요즘 다시 나의 부친은 즐거운 시간을 감사히 보낸다. 그 동안 당뇨로 어려운 시련을 겪어 거동도 어렵던 목사님이 회복되었거, 캐나다로 갔던 또 다른 목사님이 합류하면서, 저들은 요즘 목회 초기와 같이 자주 어울린다. 신학을 같이 하고 서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말씀에 미쳐(?) 있던 시절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다. 각자의 목회를 응원하며 서로는 연합하였다. 어렵게 세 분이 다시 어울려 남은 생을 주 안에서 온전하게 마무리하시길 기도한다. 다들 은퇴하신 터라, 지난 주말에는 아버지 댁으로 모여 다음 날 같이 주일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두로와 시돈은 자매 도시로 같이 어울렸다. 서로 비슷했다. 두로의 멸망과 시돈은 다를 게 없다. 시돈도 멸망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힌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은 시돈을 심판하심으로 공의를 회복하셨다. 동시에 온 세계의 유일한 통치자가 하나님이심을 알리셨다.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아울러 시돈에 대한 심판은 선민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긍휼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28:24).” 한 사건이나 상황은 수만 개의 다양한 연관성을 띈다. 두로와 시돈의 멸망으로 각각 저들의 죄에 대한 멸망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절대적인 보호하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지혜와 힘을 낮추시고,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왜곡된 시도에 대해 단호하시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1-2).
오늘 고라의 시편은 다시금 주를 바라게 한다. 그러므로 바울도 고백하기를,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7-28).” 곧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오늘 우리가 누구와 어울리는지, 어떤 일을 가지고 마음을 기울이는지, 서로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내 곁의 저가 곧 나다. 나의 결말과 저의 결말이 같을 것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3-4).
화들짝, 놀라서 눈을 뜨고 서둘러 교회로 오면서…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그 내용을 음미하면서… 가끔은 이러고 있는 내가 낯설다. ‘어떤 대화’를 나누는 끝에 ‘너와의 이런 통화가 즐겁다’는 누구의 말에 놀랍기도 하고 희한하기도 하면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5).
나는 이 말씀을 입안에 머금고 한참을 되새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6-7).
이를 소망하다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면서,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5-6).”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이 안 된다면 다 무슨 소용이겠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8-9).
이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0-11).
하여,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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