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전봉석 2023. 7. 29. 04:33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

에스겔 29:6-7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편 85:10-11

 

 

두로에 대한 예언이 긴 지면으로 할애되고(26-28장), 오늘부터 32장까지는 애굽의 몰락과 애가가 이어진다. 애굽 왕 바로와 관련하여 자신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도록 강요하는 교만을 지적한다. 애굽은 항상 이스라엘의 의지였다. “그가 사절을 애굽에 보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17:15).” 그러므로 하나님은 애굽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부여주고자 하신다.

 

애굽은 세상에 대한 표상으로 우리가 의지하고 살았던 것,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기도하다. 이에 애굽의 파멸과 황폐함에 대한 예언이 전반부을 연다(1-12). 저들의 회복에 대해 예언(13-16), 느부갓네살의 분깃과 이스라엘을 향한 긍휼을 약속하는 후반부(17-21절)로 나뉘고 있다. 애굽에 대한 예언은 모두 일곱 가지다.

 

첫째, 포로 제 10년에 발생하게 될 바로에 대한 위협(1-16절). 둘째, 느부갓네살에 의한 애굽 정복(17-21절). 셋째, 애굽과 그 동맹국들에게 임할 심판(30:1-19). 넷째, 바벨론 왕에 의한 바로의 쇠약(30:20-26). 다섯째, 앗수르의 영광과 멸망을 통한 애굽의 경고(31장). 여섯째, 애굽 왕에 대한 애가(32:1-16). 일곱째, 애굽의 몰락에 대한 애가(32:17-32).

 

에스겔은 각 부분을 시작할 때,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하는 말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부분(30:1)을 제외하고 여섯 부분에서 연대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 번째 말씀(17절)은 정상적인 연대 배열과 달리 앞부분에 위치하였다. 그 이유는 에스겔이 논리적으로 말씀을 배열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와 애굽의 심판을 예언한 후(1-16절), 곧바로 누가 그들을 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17-21절을 앞부분에 배치하였다. 어쨌든 세상의 대표로서 군림하는 애굽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심판을 선언함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오늘은 간결한 문체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세상의 힘과 하나님의 권능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지지만, 결국 하나님의 승리가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애굽 왕 바로의 오만함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 할 때,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오늘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도 다를 게 없다. 여전히 우리 자신은 ‘바로’가 되길 원하고 ‘애굽’에 굴림 하길 바란다. 에스겔은 그런 바로 왕을 악어로 비유했다. 악어의 의미는 리워야단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적대적 관계를 표현한다. 본장은 나일 강 하구에 번성한 문명의 발상지 애굽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다.

 

당시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끌려간지 10년이 되던 해,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애굽에 원조를 요청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한 애굽의 심판을 선언함으로 인간적인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신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실제 느부갓네살은 두로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애굽으로 진군하여 도시들을 정복하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이루어질 회복을 제시한다. 오늘 21절, “그 날에 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고 나는 또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이스라엘의 귀환과 메시야를 통한 종말론적 완성을 암시한다.

 

애굽의 파멸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신뢰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오늘 본문 6절,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9절, “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16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지가 되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돌이켜 그들을 바라보지 아니하므로 그 죄악이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여기서 거듭되는 강조점은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심이다. 심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계시다. 하나님은 심판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으신다. 다만 자신의 영광을 알게 하신다. 이는 ‘많은 사람이 믿음 안에 거하며 구원에 동참하도록 유도하심이다.’ 이러한 사실은 애굽 심판의 말미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제시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21절).

 

우리에게 있어 ‘바로’는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려 하는 자신들의 면모다. ‘애굽’은 이를 마음껏 펼치고 활개 칠 수 있는 세상이다. 누구라도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다. ‘바로’가 되어 자신을 우러르고 세상을 누리며 살고 싶다. ‘절대 군주’로 자처하여 스스로 ‘신처럼’ 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고 그의 신성을 모독한다. 믿는다고 하면서 어느 공적인 자리에서는 보편화시켜 모든 종교 가운데 하나로, 여느 신(神) 중에 하나로 놓고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의 취향이나 선택 정도로 전락시킨다.

 

오늘 본문 6절에서 ‘애굽’ 곧 우리가 누리고 바라고 세상은 ‘갈대 지팡이’인 것을 강조한다.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6-7).” 막상 이를 인정하기까지는 찔려봐야 알고 기어이 부서져서 찢어져 봐야 안다. 누구보다 내가 그 증인이고 내 곁의 여러 사람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전에 ‘바로’로 있을 때는 알지 못한다. ‘애굽’을 의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운운한다. ‘사업을 하자면’ 하고 의기양양하였다.

 

누가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신학을 공부하다 저는 서둘러 필리핀으로 갔다. 섣부른 판단이 사업가적인 기질을 발휘하게 했다. 스스로 비즈니스선교(?)를 운운하는 사업가가 되었다. 필리핀 특유의 싼 인력을 이용해서 오랜 시간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나름은 선교 사업을 하였다. 실은 그게 뭔지 나는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가끔 사업차 국내로 들어오면 호텔을 잡고 지하 룸을 빌려 비즈니스차원의 접대를 했다. 종종 친구들을 부르기도 했다. 저는 가끔 술에 취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전 목사, 하고 부르는 혀끝이 풀려 있었다. 횡설수설 여러 말을 하다, 개척교회가 어떻고 목회가 어쩌고 하는 저의 말에서 주를 경외하는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퇴색되는 신앙’이 ‘애굽 생활’의 특징이다. 무디 목사는 후학을 양성하면서 저들이 서둘러 나가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이를 자주 저지하였다. 섣부른 사역이 그릇된 길로 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종노릇하면서도 선민의식은 살았고, 선민의식은 있으나 이를 발휘할 능력은 없다. 끊임없이 세상의 원조를 구한다. 저들처럼, 저들이 추구하는 것을 좇는다. 돈을 마다할 수 없고 성공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시쳇말로 영혼까지 끌어다 바쳐서라도 세상에서 성공을 꿈꾼다. 그러다 보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산성이시며 피난처이며 구원의 문이심을 잊는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 18:2, 19).

 

하는 이러한 고백이 낭만적으로 들리면서부터 우린 마치 서점에 들러 시집 한 권에서 몇 줄의 표현에 감동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도 그 정도로 치워둔다. 이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28:1, 62:7).

 

우린 이와 같은 신앙을 ‘애굽’에서 잃었다. 어느새 ‘바로’가 되어 살고 있다. 성경의 경고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그러나 ‘유다’ 곧 우리 믿는 자들을 현혹하여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게 했던 ‘애굽’을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세계 각처로 흩어질 것이다. 곧 우리 안의 ‘애굽’은 가까운 훗날 산산이 부서져서 그리움으로나 남을 뿐이다.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 누구도 이 말씀이 크게 들리지 않는다. 마치 노아의 때에 기어이 비가 퍼붓고 창수가 솓구칠 때까지, 소돔과 고모라 성에 우박 같이 불덩이가 떨어져 가산을 모두 부수기 전까지 우린 한사코 외면하고 거절한다.

 

결국 ‘애굽’은 더욱 강한 ‘바벨론’에 의해 ‘바로’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허망하여졌다. 우린 다시 ‘바벨론’에서 ‘느브갓네살’로 살기를 꿈꾼다. 하나님을 바라기가 이처럼 어렵다. 죄의 악순환은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오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신앙은 점점 무뎌진다. 하나님 없이 사는 생황에 길들여졌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이로써 오늘도 기회를 더하신다. 그래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인내는 무궁하시다. 그로 인해 나는 살았다. 

 

바울은 설교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하고 축복하였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우릴 도우신다. 우리 곧 주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정해진 시기가 되면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신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이다. “그 날에 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고 나는 또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1절).” 한데,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애 2:3).” 이 또한 주의 인자하심이고 사랑으로다. 참고 또 기다리시면서 오늘 이 시간도 부여하신다. 한 영혼을 돌이켜 얻기까지,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132:7).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세상,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6-7).” 나는 누구보다 이 말씀이 내 생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애굽’을 의지했고, 스스로 ‘바로’가 되길 원하였다. 결국 ‘애굽’을 의지하다,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으로 찢겼고, 부서져서 너덜거릴 때 주는 나를 찾으시고 붙드셨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85:7-8).

 

하여 오늘도 주 앞에 앉았다. 나는 나의 일상을 사랑한다. 어떤 어려움, 말하기 어려운 힘든 여정 가운데서도 나는 이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든다. 더는 다른 방법을 알고 싶지 않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1-2).

 

어떤 마음이 들다가도 입을 다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어제 가정예배로 드리면서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다소 설명이 필요한데, 나는 아내의 손과 장모의 손을 포개고 서로 같이 이 말씀을 소리 내어 읽게 하였다. 덧붙여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3-24).” 하는 부분을 설명하며 예전 우리의 ‘바로’는 죽었다. 다신 ‘애굽’에 속해 살 수 없다. 이를 강조하다 나이 든 모녀의 애틋하면서도 징글징글한 마음씀과 말을 지적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7-8).

 

그리하여,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0-11).

 

이에,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