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에스겔 26:2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82:8
북쪽에 위치한 두로에 대한 심판을 알린다. 두로의 심판을 다른 이방 국가들보다 길게 언급하고 있다. 앞서 25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암몬, 모압, 블레셋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포괄적인 반면, 두로에 대한 예언은 상세하고 치밀하다. 먼저 두로에 대한 심판을 신탁의 형식을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1-14절). 다음은 두로의 멸망에 대한 이웃 국가들의 반응을 묘사한다(15-28절). 결국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을 알린다(19-21절).
두로는 자신의 영광에 자만했다. 두로의 파멸은 암몬과 모압과 블레셋 등에 대한 예언과 다르게 상세하다. 두로는 베니게의 중요한 성읍 중 하나였다. 솔로몬 시대 두로 왕 히람 1세가 이스라엘과 중요한 무역 관계를 맺었다. 이는 히람이 다윗을 사랑하였다.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왕상 5:1).” 아합은 두로 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기도 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16:30-31).”
블레셋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한 후 두로를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두로는 강하였고, 에스겔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해야 한다. 무역의 요충지로 모든 이웃 나라에 영향을 끼치는 두로를 향해 심판을 선언한다고 하는 일은 목숨을 건 것과 같다. 두로는 이스라엘에 대해 적개심과 증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로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자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 본문 2절,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결국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이스라엘을 기뻐하였다. 이에 오늘 에스겔은 심판을 예언한다. 저들의 외적 풍요와 내적 안일함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그의 백성을 능욕하고 있다. 하여 오늘 에스겔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를 주민이 없는 성읍과 같이 황폐한 성읍이 되게 하고, 깊은 바다가 네 위에 오르게 하며, 큰 물이 너를 덮게 할 때에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19-21).”
이를 통해 두로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암몬과 모압, 블레셋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나서 두로에 대한 예언은 오늘 25장 전체에 거쳐 기술되고 있다. 심판의 이유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경멸한 것 이는 곧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까닭이다. 두로의 죄악을 밝히는 문맥에서도 두로가 ‘아하 좋다’ 만민의 문이 깨어져서 내게로 돌아왔다, 하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한 것이다(2절). 이 짧은 한 구절에서 저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어떠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만민의 문’은 성전을 가진 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키며, 예루살렘이 열국의 상업 요충지였는데, 이제는 깨어졌으므로 그 역할이 두로 자신들의 몫이 되었다는 것으로 읽힌다. 물론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가 무너지고 자신들의 영광이 찾아온 것으로 이해된다. 하여튼 남의 불행으로 자신의 손익을 계산하며 기뻐하는 모습이다. 그에 따라 두로에 대한 심판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여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4절,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여기서 그들은 여러 민족들을 말한다. 그때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며” 하실 때 ‘나도’ 곧 여호와께서도 그 일에 직접 개입하실 것을 알린다. 곧 아무리 강대하고 모두가 상대할 수 없이 강력하다 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하루아침에 멸망할 것이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4).
하나님은 그 심판의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셨다. 군사적으로 탁월한 저들은 갈그미스에서 앗수르를 도우러 온 애굽의 바로느고를 쳐부수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였으며,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 여세를 몰아 느부갓네살은 13년간 두로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하나님은 현존하는 세상의 어느 나라든지 동원하여 자신의 뜻을 성취하실 수 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 36:23).”
오늘 본문 7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왕들 중의 왕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북쪽에서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백성의 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두로는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었다. “그가 들에 있는 너의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치려고 사다리를 세우며 토성을 쌓으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공성퇴를 가지고 네 성을 치며 도끼로 망대를 찍을 것이며(8-9)” 두로의 모든 재물을 노략하고(12), 즐거움을 빼앗고(13절), 완전히 소멸시켰다. “너를 맨 바위가 되게 한즉 네가 그물 말리는 곳이 되고 다시는 건축되지 못하리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절).”
이에 두로에 관한 심판을 주변 국들이 보고 “그 때에 바다의 모든 왕이 그 보좌에서 내려 조복을 벗으며 수 놓은 옷을 버리고 떨림을 입듯 하고 땅에 앉아서 너로 말미암아 무시로 떨며 놀랄 것이며(16)” 저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임을 알리고 있다. 모든 섬이 진동하고, 떨며 놀랄 것이며, 저들의 결국을 보고 놀랄 것이다. 마치 멸망하지 않을 것 같던 두로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네가 무너지는 그날에 섬들이 진동할 것임이여 바다 가운데의 섬들이 네 결국을 보고 놀라리로다 하리라(18).” 본문은 이와 같은 사실로 하나님의 관여와 통치를 알린다.
두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주변국의 반응을 연속으로 밝히면서 우리로 오늘을 살면서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게 한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고 단시간 내에 이처럼 부흥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역사인 것을 우린 잘 안다. 그런 가운데 두로가 ‘구덩이’로 들어갔다. 구덩이는 영원한 죽음, 소멸을 의미한다. 두로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두로의 명성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도 넘어졌다. 바울은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롬 11:11).” 곧 오늘 우리의 풍성한 은혜는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2).” 이는 하나님의 결정으로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4).” 그 놀라우신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증언과 오늘 본문의 역사적인 사건이 맞물려 우리의 안이함과 태만함을 걷어내게 한다. 믿는다는 자기 확신이 자신을 교만의 늪으로 빠뜨린다. 어려서부터 알았고, 오래도록 교회 생활을 하면서 늘 그렇듯 수동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시들거나 죽어가는 화초처럼 생기가 없다. 그럼에도 결코 그럴 리 없다는 우리 안의 교만이 고대 바벨탑을 연상케한다(창 11:1-9). 그럴 줄 몰랐는데 소돔과 고모라 성이 패망했다(19:24-28).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비난당하고 조롱받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암 1:11).”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는 우리의 원수를 멸망시키고 성도를 존귀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안 믿는 자들의 멸망을 보면서 경성해야 한다. 각성하고 회개하며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게 하신다.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린 더욱 주위를 의식하고 주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며 주를 경외하게 된다. 그러므로 안 믿는 자들이 잘 되거나 망하거나, 이로 우리가 기뻐하거나 질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1-3).
어쩌면 이런 마음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신앙의 핵심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오늘의 나를 먼 옛날 다윗을 사랑하셨던 그 이상으로 사랑으로 지키신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듯이 오늘 우리로 소속된 곳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라 하신다. 바울의 깊고 놀라운 영성과 그 깊은 교리와 신학이 아무리 훌륭해도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다 할 수 없다. 우린 절대 누구와 견주어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전 우주를 통치하신다. 오늘 6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왕들 중의 왕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북쪽에서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백성의 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저들은 다만 그때 필요한 도구일 뿐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나는 종종 성경 읽기에 열심인 친구에게 그 말씀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지 않는다면 그저 ‘그림의 떡’인 셈일 뿐이란 소릴 한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한들, 다윗이 주께 합한 사람이면 어떻고, 오늘 본문의 두로가 그리하여 멸망하였다고 한들, 그래서 그게 오늘을 나를 찌르거나 건들지 않으면, 뭐? 대체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망을 이기셨다 한들, 그것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나의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고 아무런 감흥도 없이 돌이켜 나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살아나신 예수를 믿지 못한다면? 모든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두로의 영광을 더는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린 오늘의 말씀이 헛되이 들려지고 잊히는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릴 대적하는 원수들을 보응하시고 갚아주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역사의 현장에 나를 일원으로 세우신다. 하나님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나를 살피시고 지켜시고 보호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마치 욥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과 같이, 오늘 우리가 이를 알 때,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118:19-20).
그저 무덤덤하니 가만 있을 수 없다. ‘두로’에 관한 이야기가 두로의 이야기로 끝나게 내버려둘 수 없다. 암몬이나 모합,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 사회를 향한 것임을 알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나를 향한 말씀인 것을 붙들지 못한다면 이런 두로의 이야기가 뭐 어떻단 말인가? 잠시 그 주변국들이 놀란 정도로 남의 이야기로만 들려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이를 이처럼 긴 지면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읽게 하신 이유가 있다. 두로를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 백성들조차도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어떤 결국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으로 깨달아야 한다. 믿는다고 믿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두려운 마음으로 이 말씀 앞에 멈춘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82:2).
오늘 시편의 경고다. 단도직입적이고 실질적이다. 우린 언제부턴가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없는 자로 산다. 사느라 사는 일이라, 그럴 수 있지! 하는 허용과 그럴 수밖에 없지! 하는 자기 합리화가 우리 신앙을 흐려지게 한다. 의무감으로 교회를 가고, 습관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을 바란다.’ 어제 저녁예배를 드리면서 장모의 대표기도 가운데 안 믿는 자부와 손자들을 두고 저들의 건강과 만사형통을 비는 것에 뭐라 한 말씀드렸다. 저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선임을 알고 그 어떤 것보다 이를 위해 기도하시라 말씀드렸다.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만사형통하고 건강하게 잘들 산들, 그 결국이 ‘두로’와 다를 게 무엇이겠나? 결국은 구덩이 깊은 곳으로 던져지는 것일 뿐일 텐데….
자칫 우린 신앙과 믿음을 뒤로 하고 그저 세상살이에 급급하여 빈다. 이는 부처 앞에서도 빌고 만신과 일월성신 앞에서 비는 것과도 같다. 아들이 잘 되고 행복하다면 더는 바랄 게 없다는 어느 믿는 모친의 말이 미친 소리로 기억에 남았다. 기껏 잘 믿던 아이가 회교도가 되고 카이로로 유학을 가고 이슬람교도가 되었는데도 그저 엄마로서 글로벌기업에서 승승장구하는 아들을 보고 행복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어느 사모님이 두 딸을 두고 있었는데 저들이 모두 성인이 되어 주를 떠났다. 저이는 기도하기를 주께로 돌아오게만 해달라고 간청하였고, 큰 딸이 위암에 걸려 돌아왔다. 처음에는 자신의 기도를 한탄하다 이내 안 믿는 가정에 안 믿는 이와 결혼하여 잘 사는 둘째가 더는 교회를 가까이 하려 않는 것을 두고 회개하였다. 모두 극적인 예라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으나, 사모님은 큰 딸의 암 투병을 돌보며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되는 것에 감사하였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5).
이에 우린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어떠한지?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우리가 받은 게 너무 크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6-7).
이 비극적인 현실에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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