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전봉석 2023. 8. 7. 04:37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 38:23

 

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시편 94:21-22

 

 

 

선민, 주의 백성에 대한 심판과 회복에 대한 예언이 앞섰고, 오늘은 세상 전반에 대한 예언이다. ‘마곡의 땅’에 있는 ‘곡’에 대한 말씀이다. 마곡은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라 ‘세상 세력의 상징’으로서 묘사된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곡에 대하여(1-9), 곡이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의도에 대하여(10-16), 그러한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17-23). 이스라엘과 이방연합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언약의 백성이 승리를 거둔다. 이에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높임을 받는다.

 

마곡은 야벳의 후손이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창 10:2).” 유대인들은 마곡을 마게도냐라 하였다. 요세푸스와 제롬은 스구디아라 했다. 마곡은 메대 북쪽지대 흑해 연안 사이에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마곡은 특정 지역을 의미하기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하는 여러 세력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마곡의 왕 곡은 성경에서 오늘 본문과 창세기 10장 2절, 역대상 5장 4절, “요엘의 아들은 스마야요 그의 아들은 곡이요 그의 아들은 시므이요” 이렇게 세 번 언급되었을 뿐이다. 이 정도 단서로 곡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리디아 왕 구구, 가가라는 신, 알렉산더나 그와 유사한 역사적 인물, 또는 행정적인 이름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70인 역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곡을 사용하였다. 곡의 정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한 언질이 없다.

 

다만 오늘 말씀을 미뤄 곡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세력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 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하는 세력을 총칭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곡이 이끄는 연합군이 이스라엘 왕국을 향해 쳐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이방국가의 치열한 격전이 펼쳐진다.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언약의 백성이 승리로 이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공격하는 원수들에게 진노하신다. 모든 자연적 재앙을 내리고 철저히 파멸하도록 역사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 때도 같았다. 점점 더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는 동안 교회를 공격하고 믿는 자를 박해하는 모든 세력은 마곡으로 집결할 것이다. 곡과 연합군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끊임없이 공략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마곡 연합체를 밝히고 있다(1-6). 곡이 이스라엘을 정복할 것을 예언한다(7-9). 여기서 곡과 연합한 세력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들의 구체적인 지명을 확신할 수는 없다.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2)” 할 때, ‘로스’는 현재의 러시아나 타우루스 지방이다.

 

‘메섹’에 대해서는 이 두 지명을 같이 사용하는데,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27:13).” 하고, “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32:26) 할 때 ‘두발’이 같이 거론되는데 이는 서로 밀접한 지역으로 보인다. 메섹은 길리기아 북동부 지역이다. 두발은 소아시아 및 브루기아와 갑바도기아로 본다.

 

‘고멜’은 다뉴브와 라인 강 연안에 거주했던 킴메르족(게르만)으로, ‘도갈마’는 아르메니아로 본다. 이러한 주석을 같이 읽고 있다 보면 정확이 어느 지역 누구를 일컫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곡의 연합 전선이 전 세계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과 궁극적으로는 막강한 군대로 무장하고 있는, 세상세력의 통칭하여 일컫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전쟁은 믿는 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대세력인 것을 짐작하게 된다. 결국 자신들의 의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권세, 개인,  세력 등이다.

 

오늘 본문은 이것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미리 예언의 형태로 이를 알리셨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으로 이를 알리시고 있다. 결국 이 전쟁의 시작에도 끝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을 곳이 없음을 알리신다.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이는 영적 전쟁이면서 동시에 ‘혈과 육의 싸움’도 포함한다. 정사와 권세와 어둠이 세상의 주관자들이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세력으로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하고 선언하였다.

 

이 전쟁은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다. 철저하게 준비된 지극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전쟁이다. 오늘 7절, “너는 스스로 예비하되 너와 네게 모인 무리들이 다 스스로 예비하고 너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될지어다.” 하였고, 그 공격 대상은 이스라엘 전체를 뒤덮는다. “네가 올라오되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 한 많은 백성이 광풍 같이 이르고 구름 같이 땅을 덮으리라(9절).” 특히 이 공격이 ‘광풍’과 ‘구름’으로 비유된 것처럼 신속하고 광범위하다. 침울한 공포가 느껴진다. 곧 세상세력의 공격은 철저하고 치열하다. 어쩌다 우연히 오늘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안 믿는 가족들과 사는 믿는 자의 삶은 치열하다. 모든 인연을 끊고 살지 않는 이상, 저들과의 생활은 지속돼야 한다. 그런 가운데 겪을 어려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안 믿는 아내와 자식들을 상대해야 하는 가장과 안 믿는 부모와 형제 그리고 연애하는 사람까지도 마주해야 하는 아이와 오히려 안 믿는 사람보다 못한 허투루 믿는 가족들과 타협 속에 휘말리며 살아야 하는 누구… 나는 내 곁의 누구누구를 생각하며 저들이 신앙을 지키며 주일과 그 실생활을 유지하는 데서 숙연해진다. 솔직히 나는 늘 믿는 가족들과 그 주변의 사람 사이에서 살았다. 실제 이러한 형국의 현실을 바로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가 곡이 되어 마곡에 어울리던 사람이라! 

 

사회생활이란 안 믿는 자들과의 연속적인 혈투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들 사이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가히 가공할만한 신앙의 결단이 필요하다. 나는 그 반대로 믿는 자로 안 믿는 자들과 어울려 살면서 저들 곁에서 함께 어울렸다. 그러니까 정해진 틀 안의 중고등 과정을 지나 예술대학에 들어가면서, 놀라운 자유분방함(?)에 압도당했다. 당시 소설창작이나 시창작 시간에는 교수들이 담배를 물고 수업을 하였다. 이를 수강하는 학생들에게도 허용하였다. 교실은 늘 뿌엿고 치기어린 문학지망생들은 허세를 떨듯 담배를 빨며 작품을 분석했다. 학교 곳곳은 현란한 문화가 이끌었다. 소위 말해 ‘그쪽 세계’는 모든 형식과 틀을 깨는 파격적인 문화가 이끌었다. 함께 어울리던 글 쓰던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삶이란 상상 그 이상의 허용이 부여된 듯하였다.

 

모르겠다. 나만 유난히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인지… 당시 고등학교 때 잠시 영어 선생이었던 나의 오랜 스승은 틀에 박힌 교권주의에 항변하듯 학교비리에 항거하다 교사생활 1년 만에 교감을 패고 교단을 떠났다. 그리고 6개월 후 모 언론사 외신부를 거쳐 사회부기자로 활동하였다. 나는 저와 자주 어울렸는데, 고2 때 저는 내게 당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기형도의 <안개>를 오려주면서 남다른 친밀감으로 다져진 사이였다. 같이 어울려 문학과 예술을 논하며, 저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렸는데 프랑스 출신의 아무개, 영국에서 온 누구 등 저들의 깨어있는(?) 정신세계에 나는 압도당했다. 군사정권의 끝자락에서 어눌하였던 나의 어설픈 자유주의는 저들의 의식과 그 삶을 흉내내듯 따라갔다. 마치 구한말시절 신문물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구락부출신의 어설픈 지식인들처럼.

 

저들은 대체로 범신론주의였으며 자유연애주의자들이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그 어떤 이상보다 우선하면서도 이성집단을 혐오하며 파격적인(?) 삶을 꿈꾸었다. 오늘 본문의 마곡과 곡의 세력을 묵상하면서, 내가 수십 년 어울리며 받아들였던 나의 마곡과 곡의 세계가 연상되는 것은 괜한 게 아닐 것이다. 출판사를 잠시 전전긍긍하다 아이들 논술을 가르치며 시간이 자유로웠고, 프리랜서로 유행가 작사나 르뽀, 광고 카피 등을 써주면서 그야말로 주를 멀리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저들을 따라 어울렸다. ‘선생’ 덕분에 별의 별 세계에 가 닿았다. 힌두교나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무슨 동호회 문화예술집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경험했다. 저들의 지성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업과 나름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무리들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게 다 허상이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시절’인 것을 알지만 ‘그쪽’에 있을 때는 나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고리타분한 의식에 빠졌는지, 성경의 세계가 얼마나 옹졸한 신의 폭주로 점철되어 있는지, 나는 환멸을 느끼며 멀리하기도 했다. 결국 모든 세계는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어 있었다. 그땐 그것을 알지 못했다. 불의와 탐욕의 결정체가 전쟁이다. 악의 세력은 이를 가장 손쉽게 여겨 싸움을 일삼는다(14-16). 그러나 그러한 전쟁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있음을 이제는 안다. 앎으로 당시 나의 삶이 마곡과 곡의 세계에 깊이 몸 담고 살았음을 인정한다. 이를 일일이 열거하면, 에이 설마! 하고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여전히 거기 있는 선생과 나의 친구들은 오늘의 나와 나의 이 말씀을 ‘고립된 소리’로 들을 뿐이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3-4).” ‘그쪽 세계’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9:12).” 결국 모든 악의 세력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강권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10:20).”

 

하나님은 모든 악한 궤계와 흉계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을 묵과하지 않으신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 13:10).”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친하고 서로 모든 것을 안다고 여겼던 선생은 내가 주의 길로 간다고 할 때, 누구보다 목사가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이상하지? 가장 의지하고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나의 세계에서 증발한 것처럼 더는 연락하고 지내지 않는다.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지금도 나는 가끔 외로움을 느낀다. 그때 같이 어울렸던 친구들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하나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1-12)” 성경은 이제 내게 종말론적 승리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확실히 한다.

 

마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하다(17-23). 오늘 본문은 이를 곡의 출현에서부터 생성과정(1-9),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10-16). 하나님과 마곡으로 대변되는 오늘 이 세상을 살면서 마주해야 하는 세력은 당연히 갈등한다. 믿는 자는 멱살 잡힌 듯 매일 매순간이 저들의 표적이 된다. 오랜 관습과 관행이, 또는 안 믿는 가까운 이의 편견과 아집이 수시로 우리의 신앙을 위협한다. 이에 오늘 본문은 궁극적으로 오늘 우리의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17-18). 그에 따른 심판의 외적(19-20), 내적 요인을 언급하고 있다(21-23).

 

성경은 모두 이를 뒷받침한다.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사 29:8).” 하여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9).”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내가 질투와 맹렬한 노여움으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겔 38:19-20).” 곧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시 141:5).

 

하면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잠 11:5).” 그렇듯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신을 미혹하느니라(12:26).” 그러할 때 우리의 승리는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대상 14:10).” 즉 우린 이제 ‘마곡’과 ‘곡의 세력’의 결국을 안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은 자연스럽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94:1-2).

 

이는,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11).

 

그리하여,

 

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1-22).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 모든 세계의 결국을 안다는 의미이다. 하여,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