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본 것을, 전할지어다

전봉석 2023. 8. 9. 04:41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에스겔 40:4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편 96:13

 

 

오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는 데 집중하게 한다. 새 성전이 건축될 것이고(40-43장), 새로운 예배 의식이 확립될 것이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고(44-46장), 언약의 백성들을 위한 땅을 새로이 분배(47-48장)할 것이다. 이에 본문은 회복될 성전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삶이 새로운 국면을 맞아 축복임을 보여준다. 에스겔이 이상 중에 성전의 건설을 본다(1-4). 바깥뜰에 대한 환상(5-27). 안 뜰에 대한 이상(28-49)로 서술되어 있다. 에스겔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포로들의 정신 속에 세워지는 성전이 된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8-10).”

 

계시록에 보면 천국은 성전도, 제사도 없고, 오직 어린 양 그리스도만 계신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2-23).” 그러므로 교회가 영적인 이스라엘임을 의미한다. 구약의 말씀은 이루어져 신약의 영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이러한 통일성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보면, 에스겔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예루살렘에 인도되어 환상 가운데서 본 새 성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새 성전을 짓고,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되리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교회와 참된 성전이 됨을 연상하게 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백성들의 회복은 성전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성령이 임했음을 밝히고, 우리가 성전 됨을 알게 한다. 오늘 시점은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후 25년이 지난 50세의 나이에 이르렀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지는 14년, 저들이 사로잡힌 지는 25년이 지난 시기이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1).” 곧 도래할 하나님의 영광을 예언한다.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겠다.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폐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안 뜰과 바깥 뜰의 문간 척수가 묘사되는데 이는 천국문을 연상하게 하고, 우리에게 있어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또한 천국의 공평성을 상징하는 안뜰의 북문과 다른 문간들은 통일성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 신분의 변화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마음 놓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오늘 본문에서의 성전, 곧 교회는 그 영원성과 성결과 통일성을 깨닫게 하여 더욱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게 한다.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으로서는 영원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이에 업신여기지 못하게 할 것이고 존중히 여겨 진실하게 섬겨야함을 알게 한다. 이를 더 살펴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20).” 하고 선언하신 후,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1-22).”

 

곧 오늘의 우리 자신들, 함께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사는 너와 나, 우리인 것을 깨닫게 한다. 아담 이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후에 하나님과의 만남은 개별적이었고, 지엽적인 민족 곧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로 국한되었다.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직접 역사하셨다.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시며,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는 곧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

 

하여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곧 오늘 본문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을 생각하시며 성전을 측량하게 하심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하는 말씀에서 나는 아침마다, 이를 새로워하며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24).”

 

곧 오늘도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그것으로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6-7).” 이 놀라운 상황은 우리가 임의로 취하여 얻은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이와 같은 연속성은 말씀의 세계를 열어 계시한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우리 자신이 오늘의 측량과 같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23).” 하심 앞에 서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그렇게 해서 바울은 자신이 늙어 더는 기력이 없을 때에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면서 철저하게 자신을 주 앞에 바로하였다. 

 

곧 우리가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 먼저는 자신이 주의 성전인 것을 알고 몸부림치게 된다. 나는 누구의 블러그에 매일 들어가 그의 글을 읽는다. 저의 묵상글은 지극히 사소한 일상에서 말씀을 가지고 씨름한다. 저의 몸부림에서 나는 은혜를 받는다. 어제는 아내에게 저의 글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우리가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역사나 기이하고 놀라운 현상으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아침에 읽은 말씀 한 부분을 놓고 자신의 일상과 씨름하듯 몸부림치는 것, 마치 말씀을 꼭꼭 씹어 목구멍으로 넘겨 몸의 균형으로 삼고 그 몸으로 주어진 생을 다하는 일이다. 여기 어디 누가 더 영성이고 덜 영성인 게 어딨나? 남들 눈에 그리 보이는 것은 허상이다. 도포 입고 거룩하게 걷고 근엄한 말을 한다고 영적인 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고 온전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바울이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려던 것과 다르지 않다. 아이들 챙겨 학교 보내고, 밀린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하고, 그러면서 드는 여러 부정적인 생각들과 다투는 일, 또는 몸에 밴 습관과 싸우는 일. 베드로 사도도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5-6).” 오히려 우리가 크게 기뻐할 것들, 주 앞에서 성결하여 가는 것, 서로 하나 되어 그 사연을 듣고 마음에 두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주의 기쁨이 되고자 의식하고 하는 행동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 5:11-12).

 

이 은혜는 주의 강권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말로나 행위로나 우린 누구도 그 마음을 돌이켜 주의 자녀가 되게 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러기 위해 몸부림 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변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가고 있다. 곧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하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래서 우린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이는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어느 훗날의 오늘, 지금 이 순간 예수는 날 위해 기도하신다. 중보하시고 대언하신다. 다시 또 하루가 부여됨은 주가 주신 사명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다. 바로 그 사명,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노력, ‘묵상과 기도’로 서로가 안부를 묻고 저의 어려움을 대신 지고 씨름하는 성도의 교제와 그것을 주 앞에 내려놓는 소소한 일상이 천국을 이루어가는 일이었다. 천국에서는 부모 자식도, 부부나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가 하나여서 형제 자매일 뿐이다. 저들을 알되 내가 아브라함과 다윗과 바울을 마주하고 앉아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영광 돌리는 일과 다를 게 없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자식에 대한 부채감이 덜어진다. 부모나 형제간의 앙금이든지 애틋함이든지 이 모든 게 헛된 것을 알게 된다. 더는 아이들 일로 신경 쓰거나 마음이 많이 어렵지 않다. 더는 나 자신의 이런저런 일로 서러워하거나 분해하지 않는다. 나 역시 천국에서는 주관적으로의 내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25:5).“

 

할 때,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전 12:10).” 이를 알면서 나는 이 이른 시간을 필사적으로 고수한다. 때로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새벽에 나를 깨운다. 오롯이 아무 것으로도 방해 받지 않고 하나님으로만 충만한 시간, 천국에서의 리허설 같은, 이는 그 자체로 찬양이 되고 영광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그그러므로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57:8, 108:2).

 

그렇게 우린 서로 연결되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이 놀라운 의미를 오늘 본문에서 마주한다.

 

이에,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96:1-3).

 

새삼 오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그러므로,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4-5).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주를 찬양하는 삶으로, 어떠하든지 그와 같은 어려움이 우리로 살게 하시고 또한 죽게 하신다. 죽는 것은 나의 자아요,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날마다 죽음으로 날마다 새로이 산다. 이는,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47:11).

 

하여,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7-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