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전봉석 2023. 8. 11. 05:06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에스겔 42:14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편 98:9
 
 
새 질서를 확립하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성전 주위의 방 곧 뜰에 있는 부속 건물에 대한 설명과 성전 전체의 크기를 측량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성전의 회복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성전 건축의 구속사적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먼저 제사장들의 방에 대한 묘사가 서술되었다(1-14). 이어서 성전의 사면 담을 측량하고 있다(15-20).
 
우리는 지금 성전을 살피고 있다. 성전 바깥 사면 담(40:5)에서부터 성전 안쪽으로 들어가서, 각 문들을 척량(40:5-16)하고, 바깥뜰에 도착(40:17)하여, 방들과 각 문들을 척량(40:17-19)하고, 북향 문을 척량(40:20-23)하고, 남향 문을 척량(40:24-27)하고, 안뜰에 도착(40:28)하여, 안 뜰 남문을 척량(40:28-31)하고, 안뜰의 동문을 척량(40:32-34)하고, 안뜰의 북문 척량(40:35-37)하고, 번제물 씻는 방과 상에 대한 설명(40:38-43)을 하고, 제사장들의 방에 도착(40:44-49)한다.
 
다음으로 성소 내부에 도착(41:1)하여, 성소 내부를 척량(41:1-4)하고, 지성소를 척량(41:4-11)하고, 서편 건물과 성전 내부 장식에 대해 설명(41:12-26)한다. 그렇게 오늘은 성전 곁의 건물에 도착(42:1)하여, 그 건물들을 척량(42:1-14)하고, 성전의 담을 척량(42:15-20)한다.
 
에스겔은 성전을 외부에서 안쪽으로 들어가 지성소에까지 다다랐다. 성전 재건에 대한 예언(40-48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어떤 학자는 바벨론 포로 후에 솔로몬 성전의 재건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고레스 칙령에 의한 귀환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에스겔의 설명서를 따르지 않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이후 천년 왕국 기간을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로 모든 구약의 제사 제도가 영원히 폐지되었다는 점에서 이 또한 타당하지 않다.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6-18).”
 
그러므로 천국의 기업을 누릴 자들은 ‘참된 이스라엘’ 곧 교회를 이루는 주의 자녀들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하신 것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하신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의 신령한 천국을 묘사함은 에스겔의 이 부분을 참조한 것이 확실하다(계 21:9-22:5). 그러므로 에스겔이 말하는 성전 재건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예표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40장에서부터 48장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예언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기록된 듯하나, 영성을 띤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 확신한다. 영성이란 하나님을 바라는 온전한 마음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과 ‘애통하는 자들’ 등으로 산상수훈의 대상들이라 할 수 있겠다(마 5:3-10).
 
신약은 구약의 성취다.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신약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0-11).” 그리스도의 할례로 구약의 할례는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 할 때,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제사의 성취가 되셨다.
 
오늘 에스겔의 환상이 궁극적으로 우리로 거룩한 성전 됨을 알리고,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그에 따라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또한 우리가 주의 성전이고, 성령의 전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곧 오늘의 말씀이 우리가 지어져 갈 모양이고 형태이면서 크기나 위치를 가리키는 것일 텐데,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히 8:1-2).”
 
이에 우리의 일상은 그 소소한 것들도 예배가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이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여 우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여긴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4:11).”
 
곧 나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나는 살았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곧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 오늘 읽은 썩 재미없는 내용에서 모든 게 나의 이야기인 것을 확신하게 된다. 가령 담의 용도에서, 오늘 본문 20절,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하는 부분에서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하는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담의 용도는 분명하다. 바깥과 안을 경계한다. 성전의 거룩함을 세상의 속됨으로부터 구분한다. 담은 성전에 있어 지성소만 하나님의 구별된 장소가 아니라, 성전 전체가 하나님의 구별된 장소인 것을 알게 한다. 나의 생활반경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구별된 게 없다면 그 경계는 모호하여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다. 이 친구, 저 친구 누구라도 좋다고 하면서 저들이 마구 밟고 다닐 때 ‘나의 마음 밭’은 ‘길가 밭’이 된다. 그럴 때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마 13:19).”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한다. 같이 말씀을 보고도 보지 못한다. 길 가에 뿌려져 공중 권세 잡은 것이 순간적으로 낚아채간다.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허사가 된다. 곧 우리의 전체 삶은 담에 둘려진 분명한 경계가 필요하다. 영적 예배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왜냐하면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
 
이와 같이 우리 일상의 모든 경계와 척량이 구별되고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이럴 때 오늘 말씀은 먼 옛날 이스라엘의 한 성전 건축 양식을 기록한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하여 우리 삶은 헌신이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9-10).” 그런데 보면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며 사는 일이 그저 먹고 사는 일에 전전긍긍하고 그 이상의 것을 취하고자 하여 더 많이 비축하고 살려는 데서 허덕거린다. 
 
사실 요즘 자주 아내와 말씨름을 하게 되는 원인도 그것이다. 나는 있는 형편에서 주의 일에 신경 쓰자는 것이고, 아내는 ‘남들처럼’ 살아보자는 것인데, 이해는 간다. 장모를 모시면서 방이 없다. 나는 거실에서 잔다. 아들은 공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피스텔로 나갔다. 그러니 장모가 가진 얼마간의 재산으로 손위 처남과 아내는 이런저런 구상을 한다. 내가 나설 문제는 아니어서 외면하려는데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할 때는 부딪친다. 우리가 영적으로 산다는 일, 어쩌면 이 일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면서 엄청난 일이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그런데 이를 흩뜨리는 것은 늘 돈이다. 모두가 내남없이 돈으로 뒤엉킨다. 영적으로 산다는 일도 육적으로 산다는 일도 결국은 사는 데 필요한 그 이상의 돈에서 자빠진다. 마치 우리의 담이 돈인 듯하다. 하긴 보험이나 적금이나 돈으로 안전한 울타리를 보장하려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나 성경은 엄히 경고하여,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그런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가끔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말한다. …내가 어찌 신학학부를 마쳤고, 또 한참을 배회하다 신대원을 다할 수 있었는지…. 그때마다 주의 손길이 생생한데 여전히 어떤 일 앞에서 우린 돈 걱정부터 생각한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시 36:5-6).
 
이처럼 순간적으로 내가 염려에 빠져들 때 말씀은 나를 붙들어 세우신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하고 큰 소리로 야단치시는 것 같다. 누구보다 나는 이를 체험하며 은택으로 살았다.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아등바등, 담을 헐고 사람들을 기웃거리며 저들로 마구 드나들게 하며 살 때 나의 영혼은 얼마나 완고하고 강퍅했었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셨고, 나의 날들을 채워주셨다. 이를 일일이 말하려다 보면 실제 그럴 수 없는 일들이어서 믿기지가 않는다. 서로 그럴 사이도 아니고, 어떤 이해관계도 없는 이가 나를 권하여 신학 학부를 마치게 하는 동안 매 학기 학비와 책값 등을 보냈다. 말이 되나? 신대원 6학기 동안 나는 진짜 내가 학비를 낸 적이 없다. 오늘도 나는 다들 어렵다고 하는 개척교회에서 풍성하고 늘 충만하다. 
 
실제 같이 수학하던 동기가 학비를 충당하지 못해 휴학을 하고 돈을 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나는 가끔 누구에게 이런 말을 고백할 때면 거짓말 같아서 나 역시 믿기 어렵다. 더욱이 내가 어떤 생활을 하며 살았는지를 말한다면 모두가 놀랄 추하고 부끄러운 일들 뿐인데, 말씀은 오늘 내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신다. 14절,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나는 누구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사탄은 나의 더러움을 ‘그슬린 나무’로 빗대어 정죄한다. 그럼 하나님은 보시고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고, 나를 꾸짖으실 줄 알았는데 사탄을 꾸짖으시고, 그런 나의 더러운 옷을 벗기셨다.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셨다(슥 3:1-3).
 
이 놀라운, 말도 안 되게 이상하고 희한하며 믿을 수 없이 분명한 나의 경험으로도 나는 경이롭다. 오늘까지 함께 하신 게 실제로 증명되고 그리 살지 않았던가?!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4-17).”
 
나는 속되나 나로 거룩하다 하신 이가,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0-11).”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도,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하심으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98:1).
 
온통 내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에서 서로의 이야기가 읽히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듣는다. 곧,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2, 4-5).
 
얼마 후면,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