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전봉석 2023. 8. 12. 05:29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에스겔 43:4-5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편 99:8-9

 

 

 

성전의 외적인 양식들을 척량하고 그 용도를 설명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이에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4-5).” 곧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이를 위한 모든 전조작업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실 때에야 모든 가치는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한다는 것은, 이를 열납하신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실 때 그 모든 의미는 의미 있다.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하는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한다(1-5). 더는 죄악을 범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약속을 알린다(6-12). 이에 번제단에 대한 설명과 봉헌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13-27).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를 경우 구원은 회복됨을 알게 한다. 특히 2절, 7절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들의 왕들이 음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이 모든 의미를 더한다.

 

성전은 하나님의 보좌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렘 14:21, 17:12).” 이를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셨다.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애 2:1).”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의지다. 우리가 주의 성전이라 하심,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이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그 의미는 새롭다. 우리와 가까이 교제하고 내재하시기를 원한다. 죄는 하나님의 영을 떠나시게 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 곧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이방 나라의 포로로 잡혀갔다.

 

세상에 매여 사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끝내 그 영광을 회복시키심으로,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 2:23).”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성전으로 만드신다. 오늘 말씀에서도 여호와의 영광이 돌아옴을 묘사하고 있다. 회개하면 반드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보여준다(6-9). 하나님은 성전의 형상을 주의깊이 관찰하게 함으로써 올바른 교훈을 발견하기를 촉구하신다.

 

주의 영이 우리 안에 임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알 수 없고 이를 시행할 수도 없다. 돌이켜 더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심도, 회개하여 주의 영광이 임재하심도,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기도와 간구로 아뢸 수 있는 것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때 가능하다.’ 듣고 깨달아 이를 안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린 철학이 아니다. 믿음으로 이 모든 게 가능하였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도 은혜이다. 아무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는 못한다.

 

여호와의 영광은 동문으로 해서 성전을 떠나가셨었다.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겔 10:19).” 그리고 다시 동문으로 들어오신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43:4-5).” 우리 죄가 사하심을 받고 심판에서 벗어났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셔야 했다. 앞서 구약의 숱한 피의 제사는 그 단적인 예다.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이루셨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용서하신다. 우리 자신, 하나님의 성전이 회복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를 머리로는 안다 해도 실제 우리 생활에서 체휼하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어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누구와의 대화에서 아무리 말로, 행함으로 이를 알게 하려 한들 주의 은혜가 아니면 그저 저들에게 십자가는 한낱 허상에 불과한 ‘미련한 것’일 뿐이다.

 

이에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 놀라운 사실, 내 안에 느껴지는 어떤 꿈틀거림 같은 또는 알 수 없는 허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마 19:11).”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그것이 영성이다. 때로는 영성이라 하여 뭔가 허상을 그리듯 어떤 특정한 사람의 점유물로 여기는데, 거기서 이단이 나오고 옳지 않은 사이비가 등장하는 것이다. ‘다윗의 기도’를 연거푸 설교 본문으로 삼고 시편의 그 부분을 다루다 보니 알겠다. 다윗의 영성은 매우 일상적이어서 마치 ‘해가 뜨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그야말로 ‘그것으로’ 주를 바라는 ‘심령의 가난과 궁핍’이었다.

 

가령 어떤 이가 날 위해 기도한다. 한 번 본적도 없으면서 적지 않은 금액을 헌금으로 보낸다. 설마 저가 나에게 측은지심으로 그러하겠나? 누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다. 우린 정해진 시간을 교제하면서 그 시간이 아까워서 도시락을 시켜 먹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저 우리의 대화는 일상적인 이야기다. 그러다 퍽, 하고 눈물이 솟구치며 주의 은혜에 감격한다. 어떤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숙인다. 이러한 만남이 일반적일 수는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을 두고 주 앞에 고하듯 서로 토설한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직면한다. 회개는 동시에 은혜다. 그런 나를 어찌 이처럼 사랑하시는가? 하는 대목에서는 같이 운다. 이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 1:1).” “사도 된 바울”과 같이 오늘 우리가 우리 됨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 계시, 나로 열어 보게 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 예전에는 그저 그럴 수 있는, 그러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건 아는지 모든 죄의 특징은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남모르게 즐긴다. 그 눈빛이 부끄러움으로 가득한데 서로는 묵인하고 서로를 보며 타협하고 회피하였다. 그랬던 것이 더는 숨길 수 없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계시로 인함이다. 나를 열어보이시는데 이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도, 얼굴을 돌려 외면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나는 아침에 묵상하던 말씀이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연관되어 작용하고,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성경과 맞물리면서 또 한 번 역사하심을 느낄 때 소름이 돋는다. 일주일의 일과를 말한다면 월요일에 본문을 읽고 그에 따른 주석이나 어떤 의미를 마구잡이로 수집하듯 모은다. 그러면 수십 장의 내용으로 무질서하다. 화요일에는 그 내용을 분류하고 구성하며 가지치기를 하면서 다른 연관되는 말씀이 떠오를 때마다 덧붙인다. 도로 서너 장이 늘어나기도 한다. 수요일쯤 되면 윤곽이 그려지는가 싶으면서 어떤 느낌, 무언가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다른 각도에서 보인다. 목요일은 거의 벌목꾼처럼 과감하게 여러 장의 자료를 날린다. 가지치기가 많을수록 원고는 응축되고 그 의미는 함축된다. 얼추 여덟 장에서 열 장으로 간추렸다. 주제를 살피면서 금요일에 공개한다.

 

블러그의 장점은 언제든 수정이 가능하다. 병원에서 대기하다, 부분 부분의 내용을 고친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간섭을 느낀다. 토요일에 이를 반복하다 전혀 새로운 의미가 될 때도 있다. 처음 구상하였던 내용이나 주제가 아닐 땐 더더욱 많다. 주일아침이 압권이다. 덧붙이고 떠오르는 말씀을 찾아 메모를 하다보면 설교원고는 어디 수험생 필기노트 같아진다. 그래놓고도 말씀을 전하면서 빠지거나 더해지는 말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 하긴 모든 순간이 통제가 안 된다. 나는 감히 정의하면 한 번도 완성된 설교문이나 설교나, 묵상글이나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아, 이 말은 하지 말 걸. 아, 이 말은 전했어야 하는데… 하면서 혼자 또 끙끙거리다 그것까지도 주가 이루시는 것을 안다.

 

가령 새벽에 나와 묵상을 글로 쓸 때 솔직히 때론 비몽사몽이다. 어쩔 땐 뭔 말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쓰는 것 같다. 채 서너 시간 후에 다시 읽다보면 내가 쓴 게 맞나? 싶은 어떤 내용으로 은혜를 받는다! 웃기는 소린 줄은 알지만 이는 잘 쓴다 못 쓴다 하는 의미의 말이 아니다. 가끔 고백했듯이 나는 한 팔로 자판을 친다. 피로도가 높다. 어깨에 늘 파스가 붙어 있다. 연속적으로 오타가 날 때는 자판을 집어던지고 싶다. 그런 가운데서의 주의 역할, 저의 행하심, 곧 오늘 말씀의 중심이랄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나는 개떡 같은데 주께서 찰떡 같이 이를 빚으신다. 누가 글을 잘 읽었다, 은혜 받았다고 하면 나는 송구스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그저 민망하기만 하다.

 

그러다 문득,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제사는 단번에, 영원히, 완성되었다는 사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곧 오늘 나의 어설프고 엉망진창인 글이나 말이 어찌 은혜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알았다. 우리는 이미 완성을 산다. 나는 그저 흉내만 낼뿐인데, 그런 가운데서 전에 쓴 같은 내용으로 설교문을 사용하지 않고, 어설프고 엉망이라 해도 오늘의 은혜로 묵상글을 쓴다. 한 손으로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려가며 다른 이보다 느린 타자로 오타도 숱하게 고쳐 치느라 피로감이 가중된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그저 엉성한 나의 노력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모든 것을 완성하신다. 누가 주의 은혜로 감사를 말할 때 나는 내가 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 덩달아 감사하고 감격한다.

 

하나님의 임재란 마술 같은 게 아니다. 기적도 무슨 희귀한 능력으로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은 아주 사소한,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사는 ‘해가 뜨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그런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99:1).

 

아, 이 한 구절의 시편으로 모든 의문의 답이 되지 않나? 나는 떤다. 누구의 위로와 격려 앞에서 또는 어떤 이의 헌금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은혜를 느낀다. 그래서였을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나는 이제 바울의 고백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겠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게 마치 그 어떤 보험보다 든든하다. 너무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5).

 

이를 인정한다는 것이 전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나이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33:12).

 

하여 나는 복이 많다. 늘 느끼지만 과분할 정도로 주의 은혜가 충만함을 느낀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충만하다는 것, 어떤 사소한 것에 퍽, 하고 눈물이 쏟아지듯 마치 꽉 찬 물통이 조금만 출렁여도 그 물이 넘치는 것과 같이… 친구가 성경을 읽다 울컥, 하여 더는 소리 내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치는, 어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