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전봉석 2023. 8. 10. 05:13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그 문 벽을 측량하니 이쪽 두께도 여섯 척이요 저쪽 두께도 여섯 척이라 두께가 그와 같으며
에스겔 41:1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편 97:12
 
 
성전 주변의 환상(40장)을 마치고, 오늘은 성전 내부에 대한 묘사이다. 특히 에스겔은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이끌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1). 이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이시고, 이루실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비록 환상이라는 초자연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계시지만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이는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일들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성경은 우리로 이를 분별하라고 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나 이를 드러내어 알리는 데 있어서도 우린 다시 성경으로 점검해야 한다. 이 일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그리 행하심을 느낀다. 또한 일상에서의 일들이 마치 어떤 신호와 같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가 있는데 때론 자기감정에 휩쓸려 응답으로 오해할 때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 곧 우리의 바람이나 기도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바람도 기도도 움직이신다는 사실. 이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곧 알 수 없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사람보다 두려운 것도 없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승리를 외치는 사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마치 바람과 같아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 24:23).”
 
에스겔은 자신에게 보이시는 성전 환상이 매우 구체적으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소의 내부를 묘사하고(1-4), 지성소의 벽과 골방을 기술하고(5-12), 외부에 대한 치수를 기록하고(13-15), 성전 내부 장식에 대해 묘사하고(16-26) 있다. 이는 솔로몬의 성전 모습과 크기나 규모가 비슷하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은 솔로몬 성전이 구체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면, 에스겔의 성전은 바벨론 포로 중에 환상으로 계시된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솔로몬 성전에 관한 언급은 주로 성전 건축의 과정에 집중되었고, 에스겔의 성전은 규모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솔로몬의 성전은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신다는 것의 반증이고, 에스겔의 성전은 믿음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회복에 이른다는 격려의 의도가 크다. 분명히 에스겔은 불경건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다시 회복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오늘 본문은 성전의 내부 즉 성소와 지성소의 몇 부분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제단의 구체적인 치수나 규격을 묘사하기보다 주로 성소와 지성소의 입구와 주변의 방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주변적인 건물들에 대해 먼저 언급하는 것은 나중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한 후(43:1-12)에 제단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묘사함으로 성전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이다.
 
이와 같이 성소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각기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성전의 각 부분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영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나 성전 자체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더욱이 성전의 기능 자체가 하늘의 성소를 지상에 가시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영적인 특성을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천사는 지성소에 혼자 들어갔다(3). 천사는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을 데리고 성소까지는 들어갔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만 들어가는 지성소에는 동행시키지 않았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7-8).”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더는 생명의 희생 없이 산 자의 걸음으로 성소에 들어가듯 믿음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곧 주는 우리의 죄를 단번에 갚으셨고, 죄를 담당하심으로 참된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졌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6, 28).”
 
또한 오늘 본문에서 밝히는 것과 같이 성전에는 많은 골방이 마련되어 있다(6). 골방들은 성전의 남편, 북편, 서편 등을 돌아가며 성전 벽에 대응하여 지어졌다. 3층으로 되어 있으며 각기 30개의 방을 보유하고 있다. 이 방들은 성전의 비품과 제사 때 사용되는 도구를 보관하고, 십일조와 각종 예물을 보관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한편 성전 안에 방이 많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거할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의미도 갖는다. 하나님은 성도들과 교제하며 동거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 골방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넓어지고, 반대로 성전 벽은 점점 얇아졌다(7). 이와 같은 치밀한 건축 방식에 의해 골방의 들보가 성전 벽을 뚫지 않았고, 계단식으로 된 성전 외벽에 골방이 얹혀 있게 하였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성전이 어떤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침범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은 세속과 구분되는 거룩하신 장소이다. 오늘 날 우리 교회에서 이 의미는 분명한 ‘교회의 권징’을 통하여 부패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그런데 실제 교회에서의 권징이 바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성전의 규모나 쓰임이 사람들의 편의를 위주로 이뤄지는 것은 물론 성도 하나하나에 대한 올바른 지도와 양육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본다.
 
특히 교회 목사에 대해서는 망설이는 게 사람들이 저를 중심으로 모이는 경우가 많아 실제 어떤 비리나 불법이 드러나도 올바른 교회 차원의 권징은 어렵다. 그러면서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자신들에게 관대한 기준이 상대를 겨눌 때는 가차 없어서 권징의 의미가 바로 쓰임을 다하지 못한다. 또한 성도에게도 듣기 싫은 말일 테니, 이를 듣고 감정이 상해서 교회를 멀리하거나 다른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것은 다반사다. 언제부터가 교회의 권징은 사문서 같이 되었다. 또한 이를 사회 법정으로 끌고 가 안 믿는 자들의 치리를 받는 일은 이제 비일비재하다. 
 
욥은 아뢰길,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8).” 하며 당시 하나님이 직접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권징하심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일러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4-16).” 그에 따라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딤후 2:25, 딛 3:10).” 분명 진리가 아닌 것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지체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진리에 합당하지 못한 경우에는 징계도 따라야 한다. 훈계하지 않으면 바른 신앙의 양육도 어렵다. 이는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롬 12:4-5, 고전 12:20-21).” 서로가 서로를 위해야 하나 또한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고 건사해야 한다.
 
오늘 본문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의 연합이 없으면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는 곧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3-4).” 나로 오늘 여기에 두신 이유가 있다. 누구는 안 믿는 가정에, 누구는 개척교회에서, 누구는 몸져누워서도 우리에게는 각각의 그 사명이 있음을 안다. 이를 알지 못할 때 지난 것을 붙들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한다.
 
어제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늙으신 장모와 같이 성경을 읽을 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바울은 나이가 많아 늙었고 병들었으며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그런 그가 뒤를 돌아보며 회환에 젖어 그리움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고, 달려갈 길을 다하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9).” 바로 그 의,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하는 데서 우리 모두가 그러함을 강조하였다.
 
나는 ‘잡힌 바 된 자’이다. 잡히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세상 속으로 달려갔으나 결국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위하여 이제는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하는 것이다. 주를 바라며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하심을 붙들고 달려간다. 그리하여 날마다 매순간을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이를 위해 오늘도 우릴 ‘아침마다 권징 하신다.’ 말씀 앞에 앉아 울다 웃다 하면서 자신을 주 앞에 내려놓는다. 그리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 교회 됨을 측량하신다. 이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우리 죄와 허물이 아무리 넓고 깊고 높고 깊다 해도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더 크고 넓고 높고 깊으시다. 하여,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92:12-13).
 
곧 오늘 시편도 이를 우리에게 밝혀주며,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97:1-2).
 
곧 주의 다스리심이 삶에서 느껴지고 일상에서 주어질 때 이를 경험하는 성도로서는 감격할 수밖에 없다. 나의 친구는 성경을 읽는데 자꾸 눈물이 나고 목소리가 떨려서 같이 읽을 수가 없었다며, ‘이상하다’고 하였다. 우리의 그 이상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실전을 산다. 생의 최전방에서 안 믿는 가족들과 또는 직장에서 마치 매일매일 전쟁하는 전사와 같이 매순간이 주의 은혜를 바랄 수밖에 없다. 은혜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그 심정이 은혜이다. 우리 안에 이에 따른 확신이 있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하고 우린 날마다 기도한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22:5).
 
오늘도 우리에게 새 힘을 부여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다. 묵상이 없고 수시로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가 없다면 우린 그야말로 생의 최전방에서 말라비틀어진 가로수와 같다. 그러므로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 5:16-17).” 이는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하면,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97:9-10).
 
이에,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