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전봉석 2023. 8. 21. 04:49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단 4:2-3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108:1-2

 

 

 

꿈의 해석은 느부갓네살 왕 자신에게도 당시 방백들에게도 크나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하나님의 나라(뜨인 돌)가 궁극적으로 세상 나라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확신을 전달하였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싫어하신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우리 신앙의 동기를 판단하신다. 바울은 서신 속에 무려 164회나 ‘그리스도 안에서’를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 곧 하나님 중심의 사고와 선택과 행함으로의 믿음을 축복하신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를 오늘 말씀은 이방나라 느부갓네살 왕의 입을 열어 증거하신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2-3).”

 

앞서 3장의 내용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이에서 긴박한 상황이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이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 오늘은 다시 그 분위기가 정적이다. 느부갓네살이 두 번째 꿈을 꾸었다. 왕은 다니엘의 해몽대로 7년 동안 미친 자가 되어 들짐승과 같이 생활하다 급기야 회개하고 회복되었다. 그 후 왕은 인생의 섭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찬양한다. 왕의 꿈을 해석하기는 불가능하였다. 다니엘에게 자신의 꿈을 소개한다. 꿈은 그대로 성취되었고, 결국 수치를 당하다 회개와 동시에 회복되었다.

 

오늘 본문은 느부갓네살 개인에게 집중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밝히고 있다. 다니엘은 이에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느부갓네살이 경험한 하나님이 본장에서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이라 그의 간증이 신실하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을 통치하신다. 이를 오늘 본문은 밝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17, 25, 32).”

 

익히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을 황무지가 되게 하려느냐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와 유다의 왕의 궁전에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렘 27:17-18).” 같은 맥락에서 욥의 고백도 보면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욥 12:13-14).” 이를 시편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시 145:3, 6-7).

 

이를 바울의 표현으로 정리하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오늘 말씀을 비롯하여 모든 성경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시요 모든 백성의 통치자이시다. 나는 꿈의 해석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 ‘다니엘의 세 친구와 풀무불’ 사건은 기이한 일로 어찌 설명이 어렵다. 느부갓네살은 알았다. “거룩한 신들의 영”이라 밝힘으로,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역사를 이방나라 왕의 입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계시’ 곧 말씀을 받고, 묵상하고 이를 삶에 적용할 때 지혜를 열어 알게 하신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일련의 상황을 두고 주가 이루시는 뜻을 좇아 시선을 모으려 한다.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을 자꾸 접어두고 말씀이 오늘 드러내시는 세계,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되… 내 꿈에 본 환상의 해석을 내게 말하라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단 4:8-9, 18).”

 

이방나라 왕도 알 수 있는 영의 세계,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 사무엘이 서술하고 다윗이 아는 사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22:32-35).”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말씀이 지목하는 때에 이방나라 느부갓네살 왕의 진술을 듣고, 나의 오늘을 생각하며, 어느 때든지 주의 영이 사람에게 임하시는 사역을 묵상하게 된다.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사 63:14).” 하여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존재하는 나의 한 날을,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나는 여러 생각에 시달리다 말씀이 되묻는 말씀에서 멈추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는 것을.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잠 3:34-35).” 할 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에 주목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교통사고 여파인지, 몸은 어디가 아프고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거기에 이사와 교회 이전을 두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여느 때보다 일찍 눈을 뜨고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주의 전으로 나와 말씀 앞에 앉았다. 고작 몸은 한 근이 육백 그램이니까, 열 근이면 육 킬로그램. 그럼 나의 몸은 백 근하고 열 근이 조금 안 될까 할 텐데, 그럼 천근만근 하는 무게는 마음의 것일 텐데… 주가 다 예비하셨고, 모든 것을 순탄하게 이끄실 것을 알면서도 생각이 많은 것은 신중한 것인지 두려움인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누구의 갑작스런 비보와 산 자들은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오늘도 나의 하루를 연장하심은 주가 아직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일 테고… 생각은 연신 꼬리를 물 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4-1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39:5).

 

이를 인정함으로 더욱 주께 모든 걸 맡기려는 나와 여러 생각으로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으로 염려에 먼저 짓눌리는 나와 다툰다. 나는 어딜 가나 지금의 이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 어떤 일을 도모하든지 주의 나라가 확장되고 복음이 증거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도 주가 미리 예비하신 곳에 대하여 신뢰한다. 주가 다 아신다는 사실 앞에 나는 안도한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139:2-5).

 

그러므로 나는 뜻을 정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108:1-2).

 

‘깨우다. 눈 뜨게 하다’ 하는 것은 ‘고무되다, 분발하다’ 하는 의미를 내포한다. 스스로를 향하여 ‘깨우리로다’ 할 때, 나는 시인의 마음을 사랑하고 사모한다. 이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우선이다. 예배처소를 옮길 몇 곳 장소가 거론되었을 때 나의 선제조건은 새벽에 나와 이처럼 주의 말씀 앞에 앉을 수 있기를 우선하였다. “깰지어다, 깨우리로다” 하는 스스로에 대한 선포가 실현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3-5).

 

앞서도 언급한 바,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고, 나의 우선은 하루의 시작에서 주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솔직히 내가 좀 이상한가? 어떤 거창한 비전으로 교회를 꿈꾸지 않는다. 전도하고, 성도들을 모으고, 날로 부흥하여 큰 교회를 이루는 것에는, 글쎄. 그 일은 여러 교회들로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 영혼’ 저와 깊고 내밀하게 주의 긍휼하심과 은혜와 은총을 나눔으로 저의 ‘상한 영혼’을 주 앞에 바로 세우는 일… 그래서도 나는 내가 주목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묵상글이 재미없고 널리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가령 세 명이 읽고 세 명이 ‘좋아요’ 하며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백 프로이지 않나? 백 명 천 명을 상대하며 한두 명, 십여 명으로 그치느니, ‘나는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마주하고, 주의 사랑으로 사귈 수 있기를’ 목사고시 면접에서 앞으로 목회에 대한 비전을 물었을 때 그리 대답했었다.

 

이번에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알았지만, 교회를 옮기는 일에서도 온통 이 사람 저 사람 거들고 더하는 말이 너무 많다. 저들 말로 더 복잡하고 무거워서 시험에 들 지경이다. 어떤 이는 아예 ‘좀 더 번듯하게’ 교회를 하라 한다. 어떤 이는 ‘뭔가 색다른’ 교회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게, 근데 내가 알기로 교회란 주가 피값으로 사신 것이고 그가 주인이시라면, 나의 생각은 온통 여느 교회들이 그리한다고 덩달아 키우고 늘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도 들어가 살 집보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릴 교회를 두고 생각이 많아 주께 고하는 것도 늘어간다.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말씀하시되

내가 기뻐하리라 …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7, 13).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말씀하시되” 곧 “하나님이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하는 표현은 동격이다. 말씀을 위해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위한 말씀을 위해, ‘나의 대적’ 곧 나의 앞서는 불안과 사람들의 시선과 어떤 희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한다. 이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렇다면,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106: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