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전봉석 2023. 8. 30. 04:37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호 1:2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2
 
 
호세아의 사역은 원래 북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도덕 등에 관련된 것이다. 그는 여로보암 2세 말기부터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B. C. 722년까지 약 40여 년 동안 선지자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는 북이스라엘의 번영(B. C. 793-753)과 쇠퇴가 교차되는 때였다. 정치, 종교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그런데 1절은 남유다의 왕이 네 명이나 기록되었다. 반면 북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한 명만 언급되었다. 그것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시리라는 약속대로, 북이스라엘의 구원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7).” 이어서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3:5).”
 
다음은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불안과 혼란을 유다 왕조의 정통성과 대조시킨다. 저들의 배교와 그 죄악을 드러내어 심판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4:1-2).”
 
북이스라엘의 여섯 왕들(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이 기록에서 삭제된 까닭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호세아가 여로보암 2세 이전에 이스라엘 왕조의 쇠퇴를 예고했다는 것과 여로보암 왕만은 반역에 의하지 않고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이다. 즉 호세아는 여로보암을 여호와께서 북이스라엘을 위해 세우신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7).”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로 소개되는데, 호세아의 부친 ‘브에리’의 뜻은 ‘샘’, 또는 ‘설명하는 자’이다. ‘호세아’의 뜻은 ‘구원’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반영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 전달되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사 2: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렘 1:2).” 등 호세아 역시 그의 사역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2절에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여기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라 하시는데, 이는 결혼하라는 의미로 이 같은 명령이 하나님의 도덕적 특성과 신적 거룩함에 맞지 않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를 가상이라 하거나, 영적 불신앙의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거나,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각각 있다. 즉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실제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신성에 어긋난다. 그러나 주의 명령이다. 오히려 영적으로 민감할 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주시하게 한다. 가령 사무엘이 다 늙고 영적으로 퇴색한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삼상 3:2-3).” 때로 하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우릴 몰아가신다. 호세아의 결혼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받을 수 없다.
 
어떤 일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것임을 이해할 수 없어 이해 이상의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한 것도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실 때 아브라함은 누구와 의논하지도, 망설이지도, 기도할 시간을 운운하며 미적거리지도 않았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
 
순종은 견고한 의뢰다. 오직 믿음으로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 의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그러니까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지?’ 하는 때에 그 고통스러운 상황 자체를 주의 선하심으로 붙들어야 한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겔 24:16-17).”
 
때론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를 우린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말씀으로 인하여 곤경에 빠질 때,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8).” 그래서 못하겠다 하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9).” 이러한, 이성적으로는 알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주의 뜻을 따른다는 일은 그야말로 불가항력적인 견인으로 하나님의 이끄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문득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나를 강제집행(?) 하시듯 이끌어오실 때, 모든 게 뒤집어졌다. 그런데 나는 울면서도 신대원으로 갔다. 못하겠다고 하면서도 교수와 나이 어린 동기들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나의 상황을 알렸다. 6학기를 마치기까지 늘 내 안에는 ‘이번 학기만 하고 그만둔다.’고 힘에 겨워 억지로였다. 그래서였을까? 하나님은 그때마다 좋은 동기들의 도움과 교수들의 이해를 이끌어내셨다. 매학기 등록금을 전혀 예상치 못한 손길을 통해 채우실 때는 기이하기까지 했다. 늘 내 속에는 안 할 거야! 하는 마음을 부여쥐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게 뭐지?’ 하는 어떤 어리둥절함이 동시에 있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다. 남들 보기는 하찮을 뿐이겠으나 주가 이루심은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신다. 말로 설명하려 들면 오히려 거짓말 같은 일이 번번이 일어난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하는 선지자의 심정을 나도 알겠다. 오늘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을 맞아 세 아이를 낳는데 첫째 아들인 이스르엘은 ‘죄 값을 치르게 하시는 지역’의 이름이었고, 둘째 딸 로루하마는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을 뜻하고, 셋째는 로암미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지 않으실 것’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고멜을 얻어 결혼을 한 것도 모자라 각각의 자녀가 그러할 때마다 호세아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하나는 하나님의 보복의 대상이라 하고,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더는 기대할 수 없는 대상이라 하고, 심지어 막내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로 여기시는 대상이라 하실 때, 인간적으로 자식들을 두고 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를 단지 글 속의 상징적인 의미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실제 주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하는 삶이었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 치를 떨며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 이스르엘은 갈릴리 호수 남서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의 평원이다. 이곳은 아합 왕 때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지역이다. 훗날 개들이 아합과 왕후 이세벨의 피를 핥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왕상 21:19).”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나니, 죄의 악순환은 거듭될 뿐이다.
 
오늘 나는 호세아를 인간적으로 생각하며 저가 말씀에 순종하며 사역을 감당하였을, 그 삶의 고통을 짐작하다 숨을 몰아쉰다. 더욱이 요즘 동생의 일로 하나님 앞에서 나는 입을 댓 발 나와 심통이 났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달리 대처할 방법이 없다. 능력도 없고 돈도 없다. 그러니 죽으나 사나 주를 의뢰하는 수밖에 달리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이럴 때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심정으로 붙들렸고, 다른 생각이나 일체의 방법을 포기한 적이 있다. 가령 다른 동기들처럼 나는 전도사 사역을 하지 않았다. 보고서를 필수로 제출해야 하는데, 신대원 1학년 말에 나는 궁여지책으로 글방을 교회로 등록하고, 얼결에 아이 예닐곱과 교회를 세워 주일을 지키기 시작했다. 목사고시 때는 두 번을 떨어졌는데 그것도 ‘인성검사’에서였다. 평균보다 높은 불안심리와 우울감이 원인이었다. 나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떨어지면 다시 오면 된다는 외길이 오히려 당당할 수 있었다. 오죽하니 나는 면접관에게 떨어뜨리셔도 돼요! 하고 저를 호응했다.
 
신대원을 하면서, 목사고시에서, 나의 그런 무대뽀 같은 심정을 진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연거푸 떨어지면서 알았다. 주의 일이란 안 돼도 그만이다. 주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 다만 거기서 그 자리를 지키고,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교회가 꼭 '여느 교회처럼' 번듯하니 어때야 한다는 생각은 버렸다. 주가 세우신 것으로 주가 머리되심이라면 나는 다만 지키는 사람일 뿐이다. 어제도 모 동기와 모처럼 통화를 하면서 ‘여전히 생각 중’인 저의 상태에 내가 더 애가 탔다. 우린 다만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명령에 따를 뿐이다. 뻔뻔하게 나는 그리 알고 간다. 하는 것도 없으면서 그러니 죽어라 하고 새벽에 일어나 말씀 앞에 앉힌다. 듣는 이가 몇이든지 일주일 내내 설교원고를 작성한다. 가끔은 스스로도 한심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은, 호세아의 심정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할 때, 바로 그 '견고한 의뢰'는 우리로 묵묵히 이 길을 가게 한다. 우린 다만 맡기신 일을 수행할 따름이다. 오합지졸 아이들 예닐곱을 두고 교회를 시작한 것은 용기가 아니고, 무모함에 가까운, 선택의 여지기 없었다.  인성검사에서 번번이 낙방할 때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는 소모적인 게 아니라 최선이었다. 나로서는 순종이었다. 그때마다 늘 내 안에 ‘이래도 할래? 계속 이 길을 갈래?’ 하는 속삭임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나 선생은 늘 나를 기다렸다.  뿌리치면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무던히 나무를 패고 무뎌지면 도끼날을 벼리며 다시 또 방주를 지었을 노아 생각을 자주하였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그저 저에게는 말씀뿐이었고, 그러하시니 그리 지킬 따름이었다. 모리아 산으로 아침 일찍 떠나던 아브라함의 심정도, 무모하게 애굽으로 들어가던 모세의 발걸음에도,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을 안다. 
 
로암미, 더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시는 데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심을 붙드는 것,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 마치 나와 내 안의 나와 견주는 싸움과 같아서, 누가 이기든지 괴뢰움뿐이나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말씀으로 승부하는 것.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이것은 궁극적으로,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시 117:1).
 
우리로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오늘의 이 모든 상황은 그러하여서,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2:27-28).
 
하여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기어이 하나님은 이를 증명하시고 우린 그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이에,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곧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1).”
 
곧,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78:38).
 
그리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11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