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호 8:1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우리 삶에 경고의 나팔을 불 때가 있다. 건강이나 하던 일에 대하여, 살아왔던 생활반경에서 살고 있는 그 형태에 대하여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경고를 울리도록 하신 것이다. 나팔은 악기이면서 동시에 전쟁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뜻하지 않은 현실은 독수리같이 엄습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앗수르의 살만에셀(B.C. 727-722)과 그의 군대를 함축한다.
이것이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호 8:1).” 여기서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삶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릇된 길로 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곧 우리 자신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우린 하나님의 밭이면서 하나님의 집이다. 또한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는 교회이고 성도들의 모임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자신이며 일반적으로는 우리를 구성하는 교회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서로가 문안함은 안부를 살피고 서로 그 영혼이 어떠한가를 나눔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우린 교회가 되어 교회에 모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 곧 주의 이름으로 일어지는 사람으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렘 7:10).” 하는 것으로, 그 삶이 주 앞에 깨어 근신하도록 나팔을 불어 신호를 한다.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 돌아보아 나의 생활이 어떠한가를 점검하게 하시는 기회. 오늘의 나의 사연은 그러하여서 내가 주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살피게 한다. 그러할 때에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호 8:2).” 부르짖어 기도하게 될 것인데, 기도는 응답에 앞서 합당한 삶을 살게 한다. 일련의 상황에서 나는 새삼 나의 육신과 그 힘겨움에 대하여 돌아보다 그것으로 특별하게 주가 함께 하셨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떤 두려움이나 외로움이 엄습하다 동시에 주의 은총을 바라는 간절함으로 주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로 가장 두려워하게 하시는 말씀 한 구절을 되새기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나는 오늘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있는지. 설마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행여 나의 신앙이 나의 만족에 따른 것은 아니었는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져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삶은 안 믿는 자와 다를 것 없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를. “나의 하나님이여… 아나이다.” 하는 오늘 말씀이 두려움이 다가온다. 내가 아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아시는 내가 서로 다르다면? 앞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설마 우리 스스로는 아니라고 자부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믿음이 신념이라 여겨 자기 멋대로 믿을 때 우린 또한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는 셈이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으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나는 얼마나 그리 여기고 살아왔는지? 오늘 말씀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되묻는 나팔소리 같다. 우리의 죄란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호 8:3).” 나는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고 한들, 수시로 내 안에 이는 온갖 염려와 근심이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는 마음보다 나의 판단과 기준이 우선하며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 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악을 선이라 우기며 대수롭지 않은 듯 안 믿는 자와 다를 것 없이 염려하고 근심하고, 좋아하고 바라며 살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오늘 말씀은 여러 개의 질문으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시는 것 같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저 먼 옛날 가인에게 하셨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였다. 마치 믿음을 무슨 전매특허처럼 의당 믿는다고 여기면 전부인 줄 알고 스스로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시 36:3-4).
설마 나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면 그것부터가 이상할 수 있다. 우린 주 앞에 설 때, 마치 빛에 비추이는 나의 부끄러움으로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지근거리에서 주를 따랐음에도, 우린 모두 주 앞에 서면 세리와 같아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그러니 스스로 나는 아니라 말하는 자는 두려워해야 한다.
오늘의 상황에서, 더욱이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전날에 수면으로 찍은 MRI를 가지고 몇 군데 다른 병원에서 자문을 구했다. 모두가 수술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주 가던 병원에서는 나의 신체를 잘 앎으로 수술밖에는 길이 없으나 다시 끊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저는 나의 신체구조가 비대칭인 것을 알고 난감한 표정으로 설명하였다. 결국 수술을 안 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하였고, 극단적으로 ‘그때 가서’ 처해야 할 상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런 거 보면 나는 늘 간절할 수밖에 없다. 하나를 못 쓰게 되면 전부를 잃는 구조라, 절대적이란 그러한 나의 간절함과 비례한다. 모든 걸 주께 맡기고 사는 수밖에…. 나에게 믿음이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하긴 믿음이란 그 자체로 일심(一心)이어야 온전한 게 아닐까?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나는 달리 붙들 게 없다. 돌이켜 주께로 오면서부터 나는 늘 막다른 길에 선다. 이는 막장과 같아서 포기하고 뒤로 돌아 나오는 게 아니라면 가로막고 있는 벽을 허물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지점이 막장이다. 우리 신앙이 얼마나 절박한지… 하나님은 결국 거기까지 몰아넣으시고 묻는다. 마치 감옥에 갇혀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 바울의 모든 서신은 쓰였다. 그때에 저는 오히려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리고 오늘 나에게도 나팔을 분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자, 그러니 오늘 나의 처한 상황을 두고 약학박사가 수업을 마치고 전화를 하였다. 난 여태 몰랐어. 그럼 그 팔로만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운전을 하고 살았던거야? … 하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우울증 오겠다! 하며 주의를 당부했다. 상대적으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5).” 같은 문제를 놓고 여러 사람의 생각이 제각각이다. 믿는 자들의 생각이라 해도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듣다보니 마음만 어지러워서 서럽기도 하였다. 그때 다시 바울은 이어 말하였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
나에게 목사가 되게 하심은 나로 주 앞에 세우시고자 하심이고, 일련의 나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것을 성경으로 더욱 확실하게 하시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로 행할 것이라.’ 돌이켜 내가 주 앞에 섰을 때 거기는 나의 영혼의 막장이었다. 가로 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길일 것 같은데, 벽을 허물며 앞으로 나아가든가 그대로 물러서 돌아 나오던가…. 행여 누가 들으면 구구한 생의 비루한 변명 같은 인생살이 같겠으나 그것으로 나의 절박함은 이제 주의 은총밖에는 없다. 때로는 앉아 있는 일도, 이처럼 ‘그 팔로’ 자판을 치며 글을 쓰는 일도, 어디 가까운 데를 내 발로 걸어가는 일도, 누구를 만나 저의 사연을 또한 그 영혼을 놓고 기도하는 일도… 나에게는 늘 막장 같다. 더는 어쩔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막힌 담을 허물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끙, 하고 힘겨움에 몸을 가눌 때면 어떤 서러움이 또는 고단함이 천국을 더욱 사모하게도 하는데… 나이 많은 나의 장모는 앞으로도 주의 일을 해야 하는 게 많은데, 하고 날 위해 기도한다. 사는 게 때론 절벽 같고 막장이어서, 나에게 주의 이름이란 내가 부를 수 있는 최선의 나팔이다. 나를 도우소서, 부르짖을 수 있는 유일한 신호다. 하면 말씀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119:122).
하고 주 앞에 하소연할 때,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즉 나로 오늘의 나로 살게 하신 까닭은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마음은 멋대로 여러 갈래 흩어져 아무나 들락거리듯 나를 흔들려하나,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내게 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25-126).
아니면 내가 무슨 증거로 이 막장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막장은 막다른 길이 아니라, 열고 들어가야 하는 문과 같다. 그리하여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부디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것으로 전부인 것을.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29).
나는 이 놀라운 은혜를 더욱 갈급해한다. 그때에,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30-131).
그러다 오히려 나는 나의 일로 누구를 생각하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135-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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