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암 2:4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 128:1-2
모압이 에돔 왕의 뼈를 불살랐다. 모압은 암몬의 사촌으로, 롯의 큰 딸이 낳은 아들이다. 모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다. 사사 시대에는 18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사울 왕 때까지도 모압과 이스라엘은 간헐적으로 전투가 계속되었다. 다윗 때에 이르러 모압이 제압되었다. 오늘은 모압이 저지른 비인도적인 범죄를 지적한다. ‘에돔의 뼈를 불살랐다.’ 극단적인 고통을 비유한다. 모압이 저지른 죄악은 에돔의 시체를 불에 태우기까지 최악이었다.
그러한 모압이 요란한 외침과 나팔 소리에서 죽을 것이다. ‘그리욧’은 모압의 수도이다.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는 몰아닥치는 적군의 모습을 묘사한다. 적군의 침략으로 모압 백성은 순식간에 초토화될 것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방백들을 저와 함께 죽이리라. 곧 그 모압의 핵심부를 말한다. 모압은 B. C. 734년에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정복당했다. 그 후 바벨론이 고대 근동 지역의 패권을 잡았을 때 그들에게 조공을 바쳤다. B. C. 598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 진압당했다.
아모스는 주변 국가들의 죄악상을 폭로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였다. 이제 핵심 대상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암 2:4).”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로 가나안 남부를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많은 복을 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언약을 파기하기 하였다.
유다의 죄악은 이방 민족의 죄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다는 엄연히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였다. 주변 국가들은 인간의 법에 근거하여 지적 받았고, 유다는 여호와의 율법으로 질책당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 주신 교훈이다. 율법의 어근은 히브리어로 ‘야라’라 하여 던지다, 쏘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토라’라는 표현 속에는 지시나 교훈의 의미가 내포되었다. 유다 백성은 율법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교훈으로 순종해야 하는 백성이다. 그러나 ‘그 열조가 따라간 <거짓 것>에 미혹되었다.’
아모스 당시 유다 왕 웃시야(아사랴)는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긴 했지만, 산당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왕하 15:3).” 그는 강성해지자 의당 교만해져 제사장의 권위를 빼앗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스스로 향단에 분향하려다 문둥병에 걸렸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대하 26:16, 19).”
이런 악순환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거짓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즈베이헴’은 우상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대한 순결을 상실한 유다는 B. 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로써 아모스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암 2:6).” 곧 의를 추구하다가 정당한 근거로 궁핍하게 된 사람을 신 한 켤레를 받고 팔았다. 즉 뇌물을 받고 불의한 재판을 진행하였다. 죄 없는 자를 노예로 팔았다. 심지어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았다.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7).”
‘밟다, 더럽히다’ 하는 표현은 가진 자들의 탐심을 생생하게 나타낸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즉 성적인 타락 또한 끝 간 데 없이 깊었다. 그녀가 아무리 창기일지라도 근친상간에 해당한다. 또한 바알 신전에 있는 무녀들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8).” 즉 정치적, 도덕적, 인륜적 가치가 파괴되고 하나님의 거룩을 침해하였다. 이는 습관적이고 관례화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상과 혼합 종교와 가난한 자들의 옷을 저당 잡는 일과 무자비함이 모두 폭로된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였던 이스라엘의 과거를 회상한다.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2:10-11).”
말씀은 이를 바탕으로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1).” 이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 2:9-10).” 이와 같은 경고는 오늘 우리로 듣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 곧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시 50:20-21).
하나님의 침묵과 묵인은 돌이켜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일이다. 오죽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모르면 모를까 안다고 하면서 앞을 보지 못함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이는 우리가 악습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누가 그러니까, 하는 식으로 저들 따라 부화뇌동하기 일쑤다. 특히 요즘은 유튜브나 개인방송 등으로 너무 많은 <거짓 것>들이 판친다.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또한 의외로 많다. 이를 우리가 주의할 수 있는 길은,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그런데 이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어려서도 그러해서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그런 거보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듣고 돌이켜 이를 주께 아뢰어 회개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주의 은혜로 가능하다. 스스로 내 자신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바꾼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쩌다 그리 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주의 은혜로 가능하였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니다.
이어서 ‘아모리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전에도 있었다.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았다.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암 2:9).” 저들이 아무리 강하였다 해도 하나님이 이기셨다. 이에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11).”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은 남다르시다. 또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크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산다. 곧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러므로 우리가 책망을 듣는 일은 주께 온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고로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2).” 이러한 말씀 앞에서 나는 다른 마음을 씻는다.
생각이 복잡하고 마음이 어려울 때 오히려 말씀을 더욱 바란다. 그 중심에 서고자 한다. 할 수 없어 설교원고를 작성한다. 묵상글에서도 나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피한다. 어떤 일, 남다른 사연에 관심을 두는 것을 안다. 설교 때도 본문의 말씀보다 예화에들 관심이 많다. 누구 이야기, 어떤 상황이나 새로운 정보를 탐닉한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어려울 때 나의 이야기를 피한다. 어떤 '생각하기'를 멈춘다. 예전에도 이별을 하면 뜻도 모를 어려운 철학책이나 사상집을 읽었다. 일부러 두꺼운 선집 선택했다. 밑줄 그어가며 뜻을 찾아 읽었다. 순전히 내가 내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울 때, 나름의 방식이었다.
이처럼 말씀에만 집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만 바라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어려운 일을 주신다. 육신의 고통이든지 어떤 일로 마음이 어려워 위경련이 올 것 같을 때, 그리하여 나는 주를 바란다. 이러한 공식은 성경의 전개와 같다. 범죄보다 심각한 일은 무뎌지는 회개다. 오늘 13-16절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곧 ‘내가 너희 아래 눌리리니’ 하고, 능동을 수동으로 바꾸어 읽으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37-38).”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이를 위해 구주가 오셨다. 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대하 36:16).” 바울은 이와 같은 자신을 개탄스러워하며,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이에 오늘 시편으로 넘어오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1).
이 간단명료한 진리 앞에서 나는 무장해제당한다. 나의 고통, 어떤 슬픔, 그 마음의 어려운 일들 따위로 말씀을 활용하여 위로 삼으려는 우상화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이다. 간소한 묵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묵살하면서 말씀으로 우선하는 단순한 묵상.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 5:18-19).”
오늘을 살면서 내 생의 나의 몫과 나의 선물을 돌아보며,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2-3).
주신 바, 오늘의 모든 게 복이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4, 18).” 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128: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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