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전봉석 2023. 9. 16. 04:48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암 1: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 127:2

 

 

아모스는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호 1:1).” 오늘 첫 소개 글도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암 1:1).” 여로보암 2세는 남방 유다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 14:25).” 이와 같이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여기서 지진은 거의 2세기가 지난 후 스가랴에 의해 다시 언급되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슥 14:4-5).” 상당히 큰 지진으로,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다 문둥병이 발하였던 시기와 같다(대하 26:16-20). 지진은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쪽 약 19km 떨어진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이다. 넓은 들판이 있어 목양에 좋은 곳이었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대하 20:20).” 그곳에서 목자로 일하던 아모스가 부르심을 얻어 말씀을 받았다. 곧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이 표현은 다양한 사람에게 늘 한결 같이 주어진, 이른 말씀으로,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잠 30:1).” 또는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잠 31:1).” 또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전 1:1).” 또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렘 1:1).”와 같이 말씀으로 전하여졌다.

 

오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짖으심이다.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암 1:2).” 곧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여기서 ‘부르짖는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쉐아그’는 사자의 부르짖음에 주로 사용된 단어이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들의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먹이를 움켜 가져가 버려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사 5:29).” 더욱 강한 우뢰 소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욥 37:4).”

 

느낄 수 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대자연의 현상으로도 그 웅장하며 강렬함을 표현할 길 없다. 그와 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신다고 생각할 때, 이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바로 그 말씀 앞에 앉는 일, 여호와의 부르짖으심을 마주하는 일에 아모스가 섰다. 저는 목자였다. 당대에 학식이나 권위 있는 자가 아니었다.

 

드고아 목자 출신의 아모스는 그 이름의 뜻이 ‘짐을 지는 자’이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이 일만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하게 여느 사람들과 같이 자기 앞가림이나 하며 시적시적 살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하나님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임의로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을 지우신다. 이때 아모스도 그랬던 것 같이 ‘그 짐’을 끝내 지고 선지자로의 사명을 감당한다. 이러한 상황이 더러는 부담되고 힘에 겨워 도망치고만 싶을 때도 있지만…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 12:42).” 이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누구의 연약한 육신과 저에게 맡기신 주의 일을 생각할 때면 때론 불합리한 것 같이 여겨질 때도 있다. 아니면 맡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진 자로 세우시면 더욱 나았을 텐데, 몸과 마음의 시달림으로 힘에 겨워하다가도 주 앞에 고하며 엎드릴 때 비로소 주의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게 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가끔은 목사보다 사모의 고단함에 대하여 숙연해진다. 가령 나의 모친은 다시 산다 해도 사모의 삶이 복되었노라고 자랑하곤 한다. 곁에서 늘 지켜본 자식으로서는 그 말이 탐탁치가 않다. 목사는 어쨌든 주의 부르심으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하나 사모의 경우 싫든 좋든 그 길의 동역자가 된 셈이어서, 어릴 적에 나는 주로 부친을 원망하고 모친을 불쌍히 여기고는 하였다. 주일 식사를 늘 감당하였고, 심방이나 어디 대소사에 항상 동행하였으며, 늘 이런저런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고 그러면서도 목사는 세워지나 사모는 빛도 없이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서 했다. 약한 데 더 손이 간다고 사모의 사명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면서도 그때마다 때론 어머니로, 시녀로 교회의 그늘진 곳에 있어야 했다.

 

신앙의 순수함이란 설령 그 일이 때론 부당한 것 같아도 묵묵히 그 역할, 그 자릴 지키는 것일 텐데.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말씀을 전하는 자보다 이를 뒤에서 받쳐주는 자의 능력이 크다. 목사가 열 일하면 사모는 백 일한다.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늘 주의 종으로 세우심을 받은 목사를 높이고 자신은 낮아지는 자리. 성도들이 목사를 공경하고 위할 때 사모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도, 나의 어머니와 나의 누이와 나의 아내는 그들 남편의 사역을 보조한 게 아니라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작다 할 때,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7).”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 문득 드는 이와 같은 사실 앞에 새삼 감사를 올린다. 사명은 사역자의 것이 아니라 맡기신 자의 것으로 우린 다만 여기에 있는 사람이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사모로든지 목사로든지 집사로든지 평신도로든지… 몇 달란트 맡은 자로 중요도가 갈리는 게 아니라 그것이 둘이었든지 다섯이었든지,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이와 같은 말씀으로 목자였던 이가 갑자기 주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자로 보내심을 받을 때의 난감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이어지는 말씀에서(3절부터 2장 16절까지)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국들 곧 아람,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남유다, 북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심판의 경고는 광범위하였다.

 

소위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게 아니라 심판을 알리는 데 있어 그 심판의 이유가 ‘서너 가지의 이유’ 때문이라는 데서 저들의 대표적인 죄악을 지적하는 일이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서너 가지, 셋이나 넷은 그 자체가 아닌 ‘아주 많은’ 것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18).” 즉 우리의 죄악은 한둘, 서넛의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다못해 작은 거짓말도 이를 위해 줄줄이 더해지는 거짓말로 이어지는 것을 본다. 그처럼 저들 각국 모두 여덟 민족의 ‘서너 가지 이유’를 들어 심판을 예언한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게 틀림없다. 한 사람의 한 가지 잘못을 말하는 데 있어서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일 때 그 한 가지 이유로 숱하게 더해질 이유들이 있을 테니….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일이란 이처럼 굳이, 왜, 하필, 그 일을 감당하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경은 예언의 말씀이다, 심판을 알린다. ‘서너 가지 이유’의 죄악을 지적한다. 누구라도 듣기 좋은 말을 바랄 텐데,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이러한 말씀을 면전에 대고 한다면 누가 좋아라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우린 전해야 하고, 그 말씀을 이고 서야 한다. 굳이, 왜, 하필… 누구의 어떤 일을 생각할 때도 그냥저냥 자기 하나 건사하며 살면 지금처럼 어렵고 고단할 이유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불현듯 부르심에 따른 고단한 여정을 두고도 같이 애통해 한다.

 

이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 139:23-24).

 

이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마음일 텐데,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세 치 혀와 공기 같은 마음의 무게가 어쩜 그리도 간직하기 어려운 것인지. 결국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 그렇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쌓으며 살고 있는지. 누가 다녀가고 저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같이 그 무게를 견뎌야 하는 일이 희한하였다. 우린 때로 싫은 소리라 해도 전해야 한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왕상 21:19).” 누구라도 어떤 지적 앞에서 졸지에 원수처럼 굴기 십상인데, 그 또한 감내해야 하고 담당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7:15-16).

 

하고, 주 앞에 서는 일.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

 

이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는 주가 행하시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1).

 

오늘 시편이 그 중심을 굳건하게 하시는 것 같다. 행여 누가 어찌 듣고 어찌 대할까 하는 두려움보다,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잠 3:24).” 우린 종종 알 수 없는 기쁨과 평안으로 놀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무엇보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신다는 사실, 이 든든하고 분명한 ‘견고한 신뢰’로 우린,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8).

 

고로,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127:2).

 

모든 일이 헛되었다 해도,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내게 더하신 복이 귀하고도 놀라운, 감사하고도 감격스러운 것을,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