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 146편 / 하나님의 통치

전봉석 2023. 9. 22. 11:50

230924 주일

 

시 146편

하나님의 통치

 

들어가는 말

 

오늘 시는 ‘할렐루야 시편’으로 146-150편으로 마무리 된다.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끝난다 하여 ‘할렐 시편’으로 불리는데, 시편 113-118편과 136편이 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시편들은 아침때마다, 145편에 이어서 낭송되었다. 시편의 결론부분인 145-150편에도 해당하는 오늘 시편은 ‘여호와께 대한 신뢰’를 단순명료한 문체로 표현한다. 지혜 문학의 오랜 전통인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3절).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학개와 스가랴의 시’라고도 하고, 바벨론 포로 이후 지어진 시라고도 한다. 오늘 시편의 운율을 따라 1-4절은 짧은 음절로 쓰였고, 5-10절은 긴 음절로 쓰였다. 전반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평생 동안 찬양하며 살겠다’는 고백과 후반부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여호와에 대한 찬양’으로 드려진다.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누면 첫째, 여호와께 대한 찬양으로 부름(1-2). 둘째, 제사장직을 권하고 명함(3-4). 셋째, 제사장적인 축복을 명시함(5). 넷째, 회중의 신앙고백(6-9). 다섯째, 끝으로 할렐루야 찬송(10).

 

1. 찬양하는 자로 부르심.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1-2).”

 

‘할렐루야’로 연결되는 145편을 필두로 104편, 118편과 유사성을 띈다. 이와 같은 시편은 119편, 150편 등도 후대에 유대 공동체에서 매일 아침 기도서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하고 자기 자신에게 선포하고 서원하는 것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에 참여할 것입니다.’ 하고 확약하는 의미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시 103:1).”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시 104:1).”

 

곧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하는 선언으로 ‘나의 존재가 계속되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하는 서원이고, 선언이고, 선포이다. 이는 하나님을 말로만, 입으로만 찬양하지 않고 지성과 감정과 의지적으로 즉 지정의(知情意)로 하나 된 전인적(全人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결단이고 결의다.

 

시편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요청하는 책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03:1, 22).” 또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104:1, 35).” 하는 의미로 집약된다. 시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압도하고, 우리 영혼이 이에 즐거워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2. 하나님을 의지하라.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3-4).”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은연중에 세상을 기웃거리며 ‘도울 힘이 있는 인생’을 의지하곤 한다. 곧 영향력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탁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선호하며 사는 일은 자연스럽다. 특히 오늘 시편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저작된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그러하겠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 또한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곧 누구나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오늘의 필연적인 도움이란 것도 결국은 소멸된다. 우린 엄연히 땅의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 ‘그 땅’은 인간을 소유할 것이다.

 

왕, 귀족, 군주, 백만 장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불과 한평 남짓한 '그의' 무덤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그의' 무덤은 각 개인 그들의 소유이므로 당분간은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곳 역시 곧 다른 사람의 무덤이 되고 말 것인데, 왜냐하면 묘지 이전이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묘지 자체가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심지어 무덤까지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생각, 계획들은 사라질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계획들은 세상을 떠나는 날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로 어느 부자에게 이르시며,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19-20).” 이는 인생의 허망함을 일깨우시기 위함이다.

 

또한 지혜자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1, 9).” 이에 믿음과 헌신은 이 땅에서의 승부가 아니며, 필연적으로 영원한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 만큼 누릴 영생의 깊이와 너비와 높이도 달라질 것이다. 하여 그날에는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오늘 시편은 그러므로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3). 세상 권력에 도취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무상함과 무력함은 죽어 흙으로 돌아감으로 허무할 뿐이다(4).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영혼의 일로 다윗은 기도하였고,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요한은 간구하였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전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영혼과 영생의 문제에 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0-21).”

 

3. 제사장적 축복.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5).”

 

우리의 복은 그 출처가 하나뿐이다.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것’ 그리하여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였다. “야곱의 하나님”은 ‘시온에 임재하사 백성들을 돕고 보호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46:7, 11).”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84:8).” 할 때 ‘야곱’은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높이는 자’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인생을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리고, 오직 하나님 안에만 참된 ‘축복과 소망’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우리 ‘믿는 자의 하나님’ 곧 주의 백성된 자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만 참된 보호자요, 인도자요, 믿고 신뢰할 자로 삼는 것은, 그와 같은 ‘단호한 태도’ 즉 어릴 때 이미 ‘뜻을 정하여’ 굳건하였던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된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단 1:8).” 곧 신앙의 전통에서 믿음의 확신을 분명히 할 때,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144:2).” 하는 의지적인 믿음으로 굳건할 수 있다.

 

4. 하나님을 신뢰하는 구체적인 이유.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6-9).”

 

실제 이 근거로 우린 확신을 더한다. 그럴 때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66:7).” 곧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욥 26:12-14).”

 

우린 누구도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편적인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하면 이는 우상이다. 하나님이 영원히 진리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린 믿음으로 알 수 있을 뿐이지, 이를 어찌 논리적으로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눌린 자’로 살 때, 이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이 또한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 그럼에도 우린 고백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103:6).”

 

‘눌린 자, 주린 자’란 영육간에 그러하여서 우리로 주를 사모하게 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107:9).” 그렇듯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3).” 이와 같은 체험이 있는 자는 복되다. 또한 ‘갇힌 자’를 해방하신다. 어떤 미움과 시기와 노여움에 갇혔을 때,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이 놀라운 역설이 진리다.

 

우리가 소경되었을 때, 즉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살 때 주는 우리의 눈을 열어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사 29:18-20).” 그러므로 여호와는 진실하시다(6).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다(7-9).

 

5.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시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10).”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적 의지의 틀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오늘 시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마치면서, 오직 하나님의 통치만이 유일하고, 시간을 초월한다고 알려준다.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하심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너머의 시간 속에서 감을 잡을 수 없는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통치는 공정하시고 의로우시다. 죄와 슬픔이 있을 수 없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상적인 형태로 이뤄진다. 하나님의 통치는 창세전부터 모든 종말의 이후에도 여전하시다.

 

그러므로 “시온아” 또는 “야곱아” 하고 우리를 부르신 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하고 선언한다. 이때 우리의 화답과 경배는 “할렐루야”이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 속에서 우리는 영원토록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곧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