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욘 1:17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요나 이야기를 읽거나 들을 때면 늘 나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저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바다 위에서 큰 바람을 만나고, 배는 깨지고 사람들은 고통당한다. 결국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알고, 바다에 자신을 던지게 한다. 그때에 이미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요나를 삼키게 하여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게 하셨다.
요나는 엘리사의 죽음과 아모스의 사역 사이 거의 40년 동안 북이스라엘에 기록된 유일한 선지자의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 14:25).” 오늘 본문의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왕하 19:36).” 노아 홍수 직후에도 있었다.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창 10:11).”
니느웨를 큰 성읍이라 하는 것은 성의 규모보다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살았던 것을 염두에 둔다. 니느웨에는 교만하였고 ‘악독’이 가득하였다.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사 10:13)”, 또한 잔인하였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나 3:1, 10, 19).”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요나로서는 그런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외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저들은 극도로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습 2:15).” 이러한 것이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욘 1:2).”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음을 아는데 그런 곳으로 보내시다니!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땅이다. 요나로서는 그러느니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배에 올랐고 …다시스라는 이름을 가진 곳’으로 도망가려 했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는 다시스란 이름의 소도시가 여럿 있었다. 여기서 다시스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과 정반대에 있었다. 그러니까 니느웨는 동쪽이고, 다시스는 서쪽에 있었다. 그저 요나로서는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만 있으면 되었다.
즉 우리 안에 명령하시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정도의 것으로, 마치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였던 것과 같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이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2).” 하신 말씀을 대체하려는 것이다. 굳이 주일을 지키지 않아도, 혼자 묵상하면서… 또는 대면예배 대신 비대면예배로 다소 느슨하게… 명령을 대체할 수 있는 자기만족이면 무엇이든지…. 귀는 가렵고, 진리는 따분하거나 지겹고! 그러니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이것이 오늘 우리들 사이에 팽배한 ‘요나 현상’이라 생각된다. 합리화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편으로 향하는 일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자기 신념에 비춰,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앗수르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심판을 면한다면, 그에 대한 영향은 고스란히 이스라엘에게 미칠 것이 뻔하다. 실제 이스라엘은 몇 차례나 앗수르의 위협을 받았다. 예후가 통치하던 B. C. 841년에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쳤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당시만 해도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4:2).”
합리화와 자기신념은 교묘하게 같이 물린다. 어느 게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의 판단을 두고 누구의 권면이나 충고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정리하면서 그게 ‘요,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님은 자연적인 현상을 동원해서라도 막으시고, 바로잡으신다. 이제와 인정하는 일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땐 그게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하고 억지스럽게만 느껴졌는지 모른다.
또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욘 1:5).” 모두가 누구 때문에 역경을 겪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허탈감 때문인지, 무력감 때문인지, 마치 자신과 무관한 일처럼 무책임하다. 이는 우리 안의 영성이 자신을 깊이 숨기려고 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저는 일부러 배 밑층으로 갔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처럼 모두가 죽을 고생이라 해도 스스로는 잠들었다. 그리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두고 자신들 탓이라 비난한다. 이를 보다 못해 선장이 요나에게 요구한다.
그런 그를 선장이 깨웠는데, 이방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더 많은 신에게, 더 많은 기도’를 하면 좋을 것이라 여긴 까닭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고 유일신 여호와를 의지해서가 아니다. 마치 우리가 기도할 때도,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곧 다신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가능하면 다양한 신에게 또는 많은 양의 다채로운 기도가 더 큰 효험이 있을 것이라 여기는 식이다. 실제 그렇듯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다. 뭔가 더 많이, 더 열심히, 더 정성껏, 더, 더 ‘지나치게’ 교회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섬기면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뤄주실 줄 아는….
우리의 착각은 신앙과 별개다. 진리와 상관없이도 작동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에 맞추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 1:33).”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앞서 하나님이 계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0).
내가 하는 일, 나의 뜻을 도우시라고 고하는 게 아니라,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곧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하나님 절대 신앙이 필요하다. 이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65:4).
우리 만족은 하나님 만족으로만 충만하다. 다른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그러할 때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그러므로 우린 깨어야 한다. 무책임하고 무력하게 자기 문제를 외면하고 돌아누우면 곁에 사람들만 고생이다. 이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스스로 밝혀야 한다. ‘나 때문이다.’ 하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책임을 다해 바다로 던져져야 한다. 이는 포기가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야말로 견고한 신앙의 진수다. 욥의 것처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설령 우릴 죽이신다해도,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정신 차려야 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요구해야 한다. 우린 공식적으로 합심하여 기도하기도 했다. 내달에 집이 이사를 간다. 그곳으로 교회를 옮겨가야 하는지, 이곳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 우린 주의 뜻을 구하기로 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까지 지금과 다를 게 없다면 아파트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이 있어도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가 이곳에 계속 있어야 할 이유를 주께 간구한다. 그것 때문은 아니겠으나 나는 마치 배 밑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잠든 요나와 같이 자꾸 몸이 아프다. 늘 자잘하게 아팠던 사람이라 새삼 아프다는 게 ‘또 그러는 것’ 같은데, 이틀이 멀다하고 진통 주사로 버틴다. 자꾸 눕고만 싶고 기운이 없다.
그런 가운데 아내 혼자 늙으신 노모를 건사하는 일에서부터 이사에 따른 모든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거기에 또 나까지 평소보다 아파하니 안쓰러우면서도 답답한 모양이다. 서로가 미안하고 서로가 눈치를 본다. 나는 오늘 너무 잘 아는 요나 이야기를 다시 묵상하면서, 나의 의기소침함을 주께 아뢴다. 부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를 다시 돌이켜 이 길을 가게 하실 때도 옴짝달싹 못하게 하시며 온 몸을 주체하는 일조차 힘에 겹게 하시더니,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가끔은 아니 아주 자주 내가 잊곤 하는 것은,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하여 오늘 시편과 같이 나는 바벨론 강변에서 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37:1).
어찌 주를 사랑한다 하면서,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4).
그러느니,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2-3).
실은 세상이 좋다. 참 좋은 게 많은 시절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5).
부디 허탄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살지 않기를,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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