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전봉석 2023. 9. 28. 05:16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10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 139:16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후 하나님께서 동일한 내용으로 요나에게 말씀하심을 이행한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욘 3:3).” 이번에는 요나의 행위를 강조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내용을 강조한다. 요나는 철저하게 말씀대로 말씀만을 전할 것을 명령받는다. 요나는 더 이상 말씀을 피해 달아나지 않고 말씀대로 행한다.

 

니느웨는 큰 성읍이었다. 삼 일 길을 돌아야 할 정도였다. 그 둘레가 약 96Km에 달하였고, 1500개의 탑이 있으며, 성벽은 높고 그 위로 3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구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들만 12만 명이었다고 한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4:11).” 그러니 적어도 60만의 인구가 밀집하여 살았을 것이다. 고대 도시로는 엄청난 규모이다.

 

요나는 이전과 달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 선포 기간이 단 하루였으나 요나의 선포를 직접 들은 사람은 성읍 사람의 30%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는 선포만으로 삽시간에 말이 돌아 저들은 돌이켰다.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주로 시험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 7:4, 12).”

 

오늘 본문에서는 일정 기간 심판을 유예한 것을 알 수 있다. 상황의 급박함을 나타낸다. 요나가 회개를 촉구하자, 니느웨 백성은 경고를 받아들였고,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을 믿고” 니느웨 사람들이 신실한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회개했다.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까지 들어갔다. 요나의 선포는 백성들로부터 왕에게 미쳤다. 요나가 왕을 만나 선포하지는 않았다. 백성들의 각성이 시작되자, 왕은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다. 이는 통상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행동이다. 재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극도의 슬픔을 상징한다.

 

당시 니느웨 왕은 상당히 겸허한 태도로 요나의 선포를 받아들였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운명은 성읍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백성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왕이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여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현상이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이로써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7-8).”

 

이 놀라운 상황은 다소 의아하여, “사람이나 짐승이나…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하는 조서 내용으로 보아 급박한 것을 알면서도 금식의 대상에 있어 사람뿐 아니라 짐승까지 확대한 것은, 다만 그 짐승들에게도 음식을 주지 않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얼마나 급진적으로 회개와 슬픔을 더하고 있는가를 알게 한다. 그리고 저들은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는 것으로 봐서 모든 범죄로부터 돌이키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앗수르는 자신들의 범죄뿐 아니라 타국을 향한 죄악상도 악명 높다. 이와 같은 행위를 모두 중단하였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저들은 말씀의 경고에 따라 이를 받아들였고,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9-10).” 곧 ‘그 진노를 그치사’ 또한 ‘뜻을 돌이키사’ 하나님의 변화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눈에 ‘뜻을 돌이킨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즉 하나님이 그 ‘마음을 누그러뜨리셨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근거로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심으로 진노를 유보하셨다.

 

사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은 변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심으로 형벌을 중단하신다. 우리의 회개가 이처럼 귀하다. 하나님은 이를 존중하신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 32:14).” 우리가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면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암 7:3).” 이는 항상 하나님이 참고 또 기다리시는 이유이시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6).”

 

곧 모든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이 선하고 복되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대상 16:8-9).” 그리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2).

 

하나님은 먼저 요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다. 이를 위해 ‘물고기 뱃속’도 준비하셨다. 요나는 돌이켜 주의 뜻 앞에 굴복하였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였다. 그때 다시 요나에게는 기회가 왔다. 이를 시인의 노래로 듣는다면,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0:2-3).

 

어제 아침 일찍 친구가 와서 거의 아홉 시간을 있다 갔다. 서로 밥 먹는 시간 외에 자신이 살았던 날과 이를 돌아보는 고백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말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흘러나왔다. 특히 친구는 자신이 70일간의 성경 읽기를 마친 후에 교회 앞에서 간증하였던 동영상을 보여주었는데, 나는 가슴이 뭉클하고 먹먹할 정도로 감격하고 감사하였다. 우리가 어떠함을 하나님은 다 아신다. 오늘 시편에서도,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2-4).

 

서로의 이 놀라운 시간은 억지로 갖는다고 해서 생겨질 게 아니다. 나의 감사는 내 곁의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들이 하나둘 이와 같이 주를 인정하고 돌이켜 자신들을 주 앞에 고하는 게 놀랍다. 저들에게 나 또한 그럴 테지만 우린 서로 어찌 악을 행하며 주 앞에서 죄인인가를 잘 안다. 늘 곁에서 보았고 이를 같이 행하면서 살아온 사이다. 한데 이와 같이 주를 찬양하며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 회개할 수 있다는 게 복되다. 나는 친구의 변화된 모습에 놀랍다. 내가 한 게 없는데도 저가 나를 주의 종으로 인정하는 데서 송구하기도 하였다.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내가 다시 신대원으로 가고,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이 친구는 한심하다는 듯 현실도피를 운운하며 가소롭다는 듯 반가워하지 않았다. 할 거면 제대로 해! 하는 식으로, 교회도 개인사업이나 장사쯤으로 여기며 궁색한 시작에 있어 그게 뭐냐는 듯 그리 다그치기도 했었다. 그러던 친구가 점점 더 주의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은 놀랍다. 그러했던 자신을 놀라워하며 회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저의 말에 놀라웠고 그와 같이 변화된 삶이 기이하였다. 이는,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33:9-11).

 

주가 하시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모든 만남은 그러하다. 더러 더디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하신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며 서로가 놀라워할 뿐이다. 하여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곧 어떤 이를 두고 여러 생각을 하며 주께 기도한다. 주께 고하고 아뢸 때 주는 주가 하시는 일의 목도하게 하신다. 나는 주의하여 저의 궁금증과 호기심에 답한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알게 하려 중점을 둔다. 내 생각이나 나의 주장이 되지 않기를 주의한다. 우린 모두 주 앞에 허물 많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이는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주가 행하심에서 나는 놀란다. 주를 인정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내가 한 게 없다. 저 친구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고, 말씀을 전한다고 전하였으나 그래봐야 소용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주가 하셨다. 이루어가고 계셨다. 그렇듯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그러므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31:19-20).

 

이 놀라운,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할 따름인… 이를 보면서 주의 인자하심이 오랜 기다림으로 이루어짐을 알게 된다. 억지로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보폭과 우리의 보폭이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당장 멸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돌이켜 주의 경고에 반응했다. 이에 하나님은 하시고자 했던 일을 멈추셨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39:5-6).

 

곧 그렇게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욥 34:21).”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3-24).” 아주 작고 사소한 일, 오늘 아침에도 이른 시간에 올라와 이 자리를 지키는 일에서부터 나의 목격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7).

 

주를 떠나 피할 데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이에,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4).

 

알면 알수록 주를 경외하고 사랑하게 되어서,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6).

 

이를 나는 감당할 수 없다. 곧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이는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8-9).” 우리가 감히 주의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