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9:15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시 135:6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통해 악한 지배계층의 심판을 경고한 후(8:1-14), 오늘은 성전파괴와 살육의 환상으로 선민을 향한 심판을 예언한다. 남유다 출신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의 심판에 따른 경고를 예언함은 남유다 역시 타락하여 그 심판의 대상인 것을 알린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구별됨을 알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거룩함을 유지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 멸망의 일차적 원인이 종교적 타락에 있다.
북이스라엘의 벧엘이나 우상 숭배 지역에 세워둔 이방 신들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 내에 있는 번제단까지,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암 9:1).” 하나님께서 이곳, 제단 곁에서 성전을 파멸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백성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심판을 받아야 할 때,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성전을 떠나시는 것을 보인다.
성전문을 받치고 있는 기둥 꼭대기를 쳐서 문이 부서지게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전 자체를 철저히 파괴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이를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곧 백성 모두를 멸하시겠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런 가운데서도 ‘남은 자’가 있으니, 이는 흔히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환난을 피하고 보존되어진 자들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0-21).”
어떤 상황에서도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는 여러 나라 가운데와 많은 백성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그가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미 5:3, 7-8).”
그날이 이르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암 9: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음부’는 죽은 자들이 거치게 될 사후(死後)다. 히브리인들은 우주가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즉 ‘하늘과 땅과 지하’로 이중에 죽은 자들이 가는 ‘지하 세계’가 음부라 보았다. 음부는 곧 스올이다.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욥 14:13).”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아주 깊은 곳’을 뜻한다. 이에 대비되는 ‘하늘’은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초월의 높은 곳’이라 여겼다.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욥 20:6)” 이는 ‘음부’와 함께 산 사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최대한의 높고 낮은 곳을 상징한다. 이를 두고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6-7).” 곧 우리 주는 어디에라도 계신다.
곧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라도 훼파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 7:14-15).” 이와 같이 심판은 두려운 것이고 사후생은 모두가 이를 곳이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5:29).”
오늘의 이와 같은 경고의 메시지는 우리 믿는 자로 온전케 하려 하심에 있다. 오늘 3-4절,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곳은 없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 139:8-10).
‘남은 자’로 이와 같이 우릴 건지시고 지키시는 데서 안심한다. 모든 게 멸망한다 해도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엄청나고 놀라운 진리이며 은혜이다. 이를 알고 확신하고 산다는 게 복이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이와 같은 말씀이 나를 향한 것임을 알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여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이 한 구절의 기도와 찬송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살아온 날의 은총이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특권, 오늘 7-10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으로서 피할 수 없는 ‘체질하는 체’와 같을 것이나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는 데서 주의 구별하신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 산다는 일, 어떤 일이 와도 그와 같은 때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3, 16).” 그러므로 아직은 모른다. 섞여 사는 동안에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요동하겠으나,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3-4).
이 차이, 바람이 불 때는 같이 어디로든 쓸려가는 것 같이 요동할 것이나 우리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뭇가지라! 곧 바람은 자고 온갖 먼지와 겨와 쓸려가 흔적도 없을 것이나 우리 의인은 어제라도 다시 평안하다. 즉 세례요한이 이르되,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이는 필연적으로 모든 끝 날에 누구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믿거나 말거나, 이를 대비하여 준비하거나 농담으로나 듣거나…. 하여 나는 하루의 수고로 하루씩을 산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아야 하네, 운운하지 않고 이를 두고 사람들처럼 헛된 것을 대비하지 않는다.
아내는 가끔 내가 힘들어 할 때 ‘하루씩을 살아내는 것 같다’고 하였다. 어떤 날은 좀 견딜만하였다가 어떤 날은 유독 힘에 겨워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해 안달이다. 아프다는 말, 이는 참 공허한 말이어서 누구라도 같이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그때에 나는 죽음 너머 평안을 사모한다. 이는 우울증이 아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고통도 슬픔도 없음을 그리워하는 일이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소릴 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하여 오늘에 두시는 이 고통, 나의 온 몸이 느끼고 세포들이 발광하는 고통으로 나는 간절하여진다. 주를 사모하는 데 있어 평탄하여 주를 잊고 사느니, 고통하고 힘에 겨워 주를 바라는 게 복이란 것을 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으로 파멸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다. 나의 영혼의 회복과 주를 바라는 마음의 간절함이다. 하여 바울은 감옥에 갇혀도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연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빌 1:20, 딤후 1:12).” 이에 그는 알았다. 믿고 확신하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세상에 누구든 괴로움과 고통을 달가워할까? 말할 수 없는 슬픔 중에도 주를 바라며 주만을 의지하며 남은 생을 다하는 일에 대하여… 어느 사모님은 젊어서 남편을 따라 선교지로 갔다. 그곳에서 세 아들을 낳았으나 막내는 풍토병으로 잃고, 장성한 두 아들은 교통사고로 잃었다. 급기야 남편인 선교사도 과로로 먼저 주의 나라로 갔다. 저이는 본국 총회에서 파송을 취소하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현지에 남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그 맡기신 사명을 다하길 바랐다. 쉰 살이 넘어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불량배들에게 잡혀 끌려 다니며 온갖 성폭력으로 여성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수치와 모진 시간을 보냈다. 보름동안 끌려 다니다 간신히 살아난 그이는 묵묵히 다시 자신의 일을 준행하였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욥과 같이 끔찍한 고난과 노아의 하염없는 기다림과 모세의 무모함과 다니엘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습관을 좇아’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세워가는 일. 맡기신 그 사명, 어떠하든지 그 생을 다하는 일에 있어서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 나는 앞서 말한 저들과 같지 못할 것을 인정한다. 고통 중에 괴로워할 때 만사가 귀찮고 성가시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런데 한 가지 더욱 선명하여지는 것은 주께 의탁하는 것.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52:10).” 그리하여,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2:27-28).
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5).” 하시는 이 말씀을 붙든다. ‘남은 자’로 사는 일이란, 구별되고 영광되나 고통도 염려도 근심도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 주를 바라며 의지하는 것.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135:1, 3).
곧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나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바라게 하실 때,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5).
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14).
이에,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47: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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