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전봉석 2023. 9. 27. 05: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욘 2:1-2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 138:3

 

 

인생이 물고기 뱃속에 갇힌 듯 할 때가 있다. 가령 단지 아이가 내성적인 줄만 알았는데 지능장애로 판명이 났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부모는 각자 물고기 뱃속에 갇혀 이를 알지 못했다. 내적 상태가 어떠한지, 이를 하나님께 그대로 드러내야 할 때가 온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길밖에 달리 구할 곳이 없다. 다른 델 가봐야 할까요? 정식으로 지능검사를 해야 할까요? 장애등록을 받아야 할까요? 이어지는 아이 엄마의 애타는 심정을 나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아이의 우울증일 것 같은데, 별거중인 아이아빠는 감정적으로만 대처해 아일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 한다.

 

오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는 기도 내용을 읽으며, 어제 갑작스러웠던 누구와의 대화를 생각하였다. 살면서 우린 익숙하다. 학습된 고통은 스스로 대처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러나 요나는 이에 기도한다. 절망과 고통의 ‘물고기 뱃속’에서 우린 노력을 한다. 저마다의 아집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때 요나의 외마디 비명 같은,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같은 심정이 아닐까? 오죽하니 아이엄마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 들추기 어려운 이야기를 앞에 앉아 누가 대신 전하는 것이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나는 난감하다. 그러나 적어줄 답은 하나뿐이었다.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그럴 수 있다면 오늘 요나의 ‘물고기 뱃속’은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가 된다. 모세의 ‘가시떨기 나무’가 비로소 자신의 신을 벗을 수 있는 자리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일생 의지하고 살았던 것을 먼저 벗기신다. 

 

우리는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는다. 사는 게 지옥 같다. 사랑해서 결혼하여 아이 낳고 잘 산다 싶었는데, 둘이 싸우는 사이에 아이는 ‘아이의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 우리는 누구에게 부르짖을까?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스올의 뱃속에서’, ‘무덤의 깊은 곳에서’ 사는 게 지옥 같은 날에, 죽은 거나 다름없이 사는 날들 가운데,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욘 2:3).” 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심각한 역경은 그 역경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묻게 한다. 곧 우리가 기도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찾게 된다.

 

다른 델 더 가볼까요? 정신과로 가야 하나요? 신경과로 가야 하나요? 아이엄마는 고등학생 아이의 아이큐가 60이라는 데 충격을 받아서 갈팡질팡한다. 평소 말이 적고 혼자 있길 좋아한다는 데서 나는 그 이상일 것이라 판단했다. 급기야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심지어 학교에도 안 간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런 부분 말고 아이가 어떠한가? 하고 궁금하였다. 오늘 요나는 이 모든 게 주께서 하신 일인 것을 인정한다. 주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여긴다. 요나는 주께서 자기에게 고난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기도하고 있다. 주체를 알아야 하소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요나는 표현한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3).” 오늘의 이 문제는 ‘주의 파도’에 해당한다. 이는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구덩이로 빨려 들어간 고라의 자손들도 알고 있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 42:7-8).

 

하나님을 인정할 때 대책도 생긴다. 아이엄마를 앞에 앉히고 대신 전화하는 누구의 말에, 나는 혹시 집사님이신가? 묻고 기도하면서 서로 어찌해야할지 주께 묻기로 하였다. 주가 하신 일이면 주님만이 답이다. 오늘 요나는 그렇게 접근한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3).” 이를 알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4).” 곧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18:5-6).

 

우리가 하나님을 바랄 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오늘의 암울한 현실이 멸망의 자리가 아니다.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5-6).” 누구라도 교횔 안 다녔다 해도 하나님을 안다. 안 믿는 자로 살았다 해도 하나님은 안다. 이는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 그러므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난데없는 어떤 이의 어떤 일에서 나는 주께서 일하심을 알겠다. 끝없이 이어지던 저의 질문들이 그 영혼의 타는 목마름이다. 자신이 처한 암울한 상태를 ‘주의 언약’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권능이다. 중간에서 전화하는 이에게, 집사님이신가? 하고 물은 것은 그 때문이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는가를 보자, 하고는 우선 끝도 없는 질문을 중단시켰다. 상황 설명은 내게 할 게 아니다.

 

오늘 요나는,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는 의지를 보인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저력이 아니겠나? 앞에 있으나, 저와 같이 이런저런 염려에 중심을 잃으면 안 된다. 나는 저에게 말하길, 의사가 아니라 환자로서 도움이 될 수는 있겠다. 곧 우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들이다. 비록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쫓겨나 ‘물고기 뱃속’에 갇혔으나 ‘하나님께 기도하겠다’는 의지는 결코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비록 요나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이를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고 표현한다. 즉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으로부터 분리될 때 그 처지가 어떤지를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할 수 있는 저력은, 역시 믿는 자로서의 특권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은혜로우심을 의지하는 태도는 모든 사람의 것이 결코 아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28-31).”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2:2-3).

 

사는 게 고달프고 닥치는 어려움이 힘에 겨울 때, 우리는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3-25).” 그리하여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어제는 누구 이야기에서 저들의 다급함은 알겠으나 그 일이 수면 밖으로 터진 게 복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애의 그동안 어떠했을지, 아이엄마조차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동안은 잘 지냈어요!’ 하는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릴 적 ‘나의 노여움의 시절’에 모두는 내가 잘 지내는 줄 알았다! 철딱서니 없게, 눈치도 없이, 찬방지축으로… 그때 나 혼자 들어앉았던 ‘물고기 뱃속’을 생각하다 지금도 눈에 눈물이 고인다. 혼자 하모니카를 불며 예배당 뒤 이름 없는 이의 무덤에 누워 혼자 하나님을 욕하였던 시절… 부모에게 말하면 열 배 백 배 피곤해지느니 ‘속없는 놈’으로 ‘눈치 없이’ 지내는 게 편했다.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또래집단의 폭력들. 묵인과 침묵과 외면과 무시와 수모에 대하여, 이를 말로 하면 말하는 내가 웃긴다. 그러느니 입을 다물고 생각하기를 멈추기….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내가 이 시를 묵상하고 그 뜻을 헤아리기 시작하면서, 그때 알지 못했던 내 곁의 여러 방책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을 인정한다. 어린 게 뭘 안다고, 잔망스럽게도 소녀는 내게 ‘생각이 많은 손’이란 표현을 썼다. 내가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자꾸 글을 쓰게 되었을까? 처음으로 손을 잡고 걷던 날, 그때도 난 예배당 뒤 무덤가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고, 그 애는 여러 곡의 어설픈 연주가 끝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렸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속엣 얘길 했던 사람. 그때였을까? 물론 동갑이면서 두 학년이 높은 그 애는 당돌하게도 먼저 손을 잡았다. 실은 길이 어두웠고 우린 뒷길로 해서 삼거리 정류장까지 올라가 도로로 천천히 한 바퀴 돌아서 마을로 들어왔었다. 아주 사소한 나의 이 사소함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증거로 삼는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욘 2:6).”

 

죽은 것과 다를 게 없는 나로,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라는 사실과 장차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한다. 이는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7).” 나는 이처럼 말씀 앞에서 묵상 글을 쓰면서, 혹은 돌아누워 주님! 하고 나만이 부를 수 있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9).”

 

오늘 묵상글이 더뎌진 것은 어느 아이를 생각하다, 그 아이엄마를 생각하다, 느닷없이 친구가 ‘지금 간다!’ 하고 새벽 다섯 시, 서울 도봉구에서 출발하며 전화를 하여서다. 몸이 좋으면 낚시를 갔을 텐데, 못 가겠다고 하니까 교회로 온다더니 이 새벽에 출발했다. 나는 기도하듯 오늘 시편을 읊조린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138:2).

 

저들이 나를 찾고 나를 만나려 하는 것은 우리가 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같이 그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3).

 

이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리하여,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