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전봉석 2023. 9. 25. 04:51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옵 1:3-4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에돔이 열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보여준다(2-9절). ‘오바댜의 묵시라’ 곧 오바댜는 ‘하나님의 종’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다른 선지서와 달리 가문이나 출신이 소개되지 않는다. 묵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낸다. 단지 오바댜의 생각에서 유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특별한 계시다.

 

에돔은 야곱의 형제 에서의 별칭이다. 그의 후손을 가리킨다.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과 혈연관계에 있음에도 이스라엘 족속과 적대 관계였다. 에돔에 대한 심판은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되었다(사 34:5-15; 렘 49:7-22; 겔 25:12-14; 35:1-15; 암 1:11,12).

 

때론 두려워도 전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우리로 묵시를 전하게 하신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그러려면 깨어 말씀 앞에 서야 한다. 그러므로 이는 내 자랑이 될 수 없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어느 특정한 계층의 사명이 아니다. 모든 성도의 기본 의무다.

 

이로써 절망과 상심 가운데서 소망을 발견하게 한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 30:6).” 그러므로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하여 오늘 말씀 가운데서 나는 교만이 주는 결과를 묵상하게 된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옵 1:3-4).”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뺏기고 서러워하던 에서를 생각한다. 저는 이를 소홀히 여겨 팥죽 한 그릇에 팔았다. 자기 능력으로 그 부친의 축복을 계승할 수 있을 거라 과신했다. 상대적으로 야곱은 이를 갈망하였고 모친의 귀띔으로 축복을 가로챘다. 교만의 결국은 소홀한 마음으로 팥죽 한 그릇만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시 18:27).

 

하여,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 우리로 존귀하게 함은 스스로 얻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곳은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욥 26:6).” 그런데 교만은 스스로를 가려 이를 돋보이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암 9:2).” 하나님의 눈길은 다 보신다.

 

그럴 때 우리로 두려워하게 하심은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겔 9:10).” 보다시피 하나님이 더는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며 우리의 행위대로 갚으실 때 우린 주의 인자하심을 늦어서야 바란다. 세상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런 식이어서 수치와 허망함은 ‘철들자 노망(老妄)’이라고 뒤늦게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 13:28).”

 

이는 사탄의 계교다. 결국 교만의 결과는,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이는 살면서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세상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0-21).” 어떤 어려움을 두고 주가 물으신다.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결국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오늘 2절 말씀, “보라 내가 너를 나라들 가운데에 매우 작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오늘 ‘에돔의 심판’은 교만에 대한 경고다. 에돔 족속은 사해 남동쪽 바위가 많은 산악 지대였다. 여기는 천혜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 주민들은 자연적인 동굴이나 인공적으로 바위를 깨어 집을 만들고 거주하였다. 이런 조건으로 외부로부터의 보호가 자연적이었다. 또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에돔의 수도 베트라는 약 3Km에 걸쳐 펼쳐지는 좁은 암반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적이라도 적은 수의 군사력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에돔은 이와 같은 좋은 조건을 가지고 교만을 키워갔다. 오늘 말씀은 그리하여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하신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옵 1:3).” 교만은 히브리어로 ‘끓는다’ 의미를 가진다. 마치 물이 끓어 넘치는 듯 한 상태와 같이 어떤 것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구원에 있어 사람의 지혜는 무용하다. 스스로의 만족함으로 들끓는 마음으로는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늘 8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심은 스스로 옳다 여기며 끊는 마음이 자기만족에 겨워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싫어한다. 그 결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 29:14).”

 

자주 느끼고 묵상하게 되는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8-21).” 오늘 날과 같이 모든 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시대에 종교는 단지 마음의 위안을 얻는 정도이지 그 이상으로는 합당하지 않다. 더욱이 주일을 지킨다는 일은 여느 직장인에게 있어 얼마나 불합리한지 모른다.

 

이때에 말씀은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 데 있어 어찌 우리 안에 그와 같은 마음을 두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우리로 주의 길을 가게 한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37:27-28).

 

이와 같은 확실한 말씀 앞에서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 5:15).” 오늘은 나의 교만함과 그로 인해 끓는 마음을 돌아본다. 모든 말씀은 그 정한 때가 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언제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르다. 곧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을 알 때 나의 교만은 부대끼며 헐거워진다. 우리 안의 두려움, 주를 경외하는 마음이 우릴 살린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이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1).

 

교만이 헐거워지면서 감사가 나온다. 감사 곧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할 때,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95:2).

 

결국 교만을 이기는 것은 어떠하여도 감사할 때이다. 나는 자주 이를 경험한다. 내 안의 어떤 염려가 또는 육신의 질병이 나를 흔들 때, 오늘도 이렇듯 주 앞에 올라와 말씀 앞에 앉게 하신 것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는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이는,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 23).

 

그러할 때,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여전한 생활 속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산다. 감사는 또한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한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감히 욥의 인내를 운운하고 노아의 무던함을 흉내 낼 수조차 없지만,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허락하신 이에게 감사하며.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