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전봉석 2023. 9. 30. 05:28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 1:3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시 141:8-9

 

 

미가의 활동 기간을 나타내는 세 왕의 재위 기간은 63년이다(B. C. 750-687년).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미가는 자그마치 63년에 걸쳐 사역을 감당하였다. 본문 2-7절에 언급되는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사마리아의 멸망 722년 전의 예언이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렘 26:18-19).”

 

여기서 히스기야 왕 때 미가가 예언한 것을 알 수 있다. 미가에게 임한 말씀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묵시다.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을 고소하는 것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범죄 할 경우 심판하심을 알린다.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미 1:3).” ‘땅의 높은 곳’은 저들이 중히 여기는 군사 요충지로써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또한 이방 신전이 있는 곳이다.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물을 부어 드린지라(겔 20:28).” ‘산’과 ‘우상숭배’가 만연하였던 ‘높은 곳’을 하나님이 밟으실 것이다. 이는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미 1:4).” 마치 양초가 불에 녹듯이 녹아내릴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실 때에 세상의 모습은 처참하다.

 

이는 모두 ‘야곱의 허물’로 인함이다.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인함이다. ‘야곱과 사마리아’, ‘유다와 예루살렘’은 선민 이스라엘 그 자체의 의미다. 죄(하타트)는 ‘어긋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기준, 그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죄의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7절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창기로 표현한 데서 분명해진다.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미 1:7).”

 

우리 삶의 ‘음행의 값’은 자기 좋은 방식으로의 선택과 결정이다. 일상에서의 ‘산당’과 ‘죄’는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며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호 10:8).” 곧 영적 행음은 ‘하체를 범한다’는 것으로 오늘 7절에서 언급하는 우상 숭배를 통칭한다. ‘음행의 값’은 사마리아가 우상에게 드린 제물과 시간과 노력이 모두 포함된다. 그렇게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미 1:8).”

 

추석을 쇠며 여러 마음이 들락거렸다. 노구의 장모를 모시고 있는 터라 어제는 가족들이 다녀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인천으로 이사 오고 같이 모여 사는 일에서 나의 마음은 어려워졌다. 굳이 그곳으로 이사를 결정한 것은 그나마 노모의 남은 생에서 자녀들이 자주 왕래할 수 있을 거라 여겼고, 함께 믿음 생활을 하는 데 용이할 거라 생각하여서였다. 한데 노모 앞에서 버킷리스트가 어떻고 하며 자신들의 일정을 말하는데 면구스러웠고, 심지어 교회를 그 앞 가까운 대형교회로 갈까 한다는데 말문이 막혔다. 차라리 섬기던 교회를 한 시간 남짓이면 다닐 텐데, 이런저런 그곳의 문제를 들추는데 안 믿는 가족들 앞에서 민망하였다. 듣다못해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라, 하고 외람되나 어쩔 수 없이 말을 가로막았다.

 

우린 저마다 자신의 선택을 따른다. 같이 일궈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가? 하고 섬기는 본 교회를 빗대어 묻고는 답을 바랄 수 없다는 데서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로 인하여 그 며느님과 자녀들이 그래도 몇 차례 예배에 나오면서 전도가 되지 않을까, 하고 혼자 기대하고 있던 것이 오해였다. 큰 교회, 전통이 있는… 그 이유를 안 믿는 처와 자녀를 위한 선택으로 설명하는데 그 단초를 현재 섬기는 교회의 ‘어떤 문제’를 들추는 것으로 옮겨야 할 명분을 마련하는 것 같아 그것도 듣기 어려웠다. 마치 안 믿는 두 조카들 앞에서 내가 모욕을 당하는 것 같아 말을 제지하고 화제를 바꾸었으나 뭐라 한들. 그런 와중에 ‘기도해보고’, 또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대로’ 하는 말들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자신의 생각과 그에 타당한 합리적인 근거들을 모아두는 곳이 오늘 우리의 ‘산당’이다. ‘기도하고’ 또는 ‘주의 뜻에 따라’ 하면서 자신의 선택을 일삼는 게 오늘의 ‘우상’이다. 결국은 또 큰 교회, 그 근처 대형교회로 눈길을 두었다. 내가 뭐라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오늘 본문 미가 당시의 때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벌거벗은 몸으로 상징적인 행동을 취하여’ 앞으로 있을 앗수르의 포로생활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오늘 우리 선택에 따른 표제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큰 교회를 운운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유 때문이다. 예배가 관람과 공연으로 전락하였다. 사람들과의 교제는 피하면서 자기충족은 구하려는 게 우상이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시고 우리는 그의 지체라 하셨는데, 섬기는 교회에서 지체로의 사명을 다 하셨는가? ‘윗대가리’를 뭐라 할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있어 교회는 어떤 의미인지를 되물었다. 그러다 쓸데없는 말이 길어져 자식들 있는 데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내내 마음이 좋지 않다. 섣불리 이사를 결정한 것 같아 마음까지 무거워졌다. 나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우린 너무 겉으로 사람을 본다. 나 역시 그러해서 말이 길어지면 실수가 따를 것 같아 더는 잇지 못했다. 본디 사람이란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3-4).” 좋은 교회를 찾는 기준이 우선은 눈에 보이고, 들리는 말에 의존하는 일이겠으나 ‘안 믿는 처’를 데리고 가기 위해 그러기로 했다는 데서 나는 더욱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현대사회는 어쨌든 번듯하게 갖추어진 교회를 선호한다. 이를 인정한다. 마치 부모는 좋은 학군으로 이사하고, 저마다 이름 있는 직업과 남들이 인정하는 삶을 추구하는 일과 같이 인지상정이겠으나….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지금으로서 나는 이 말씀에 따라 말을 아끼는 게 상책인 듯하다. 말씀을 전하고 묵상글을 전달하는 마음은 하나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오늘은 다만 나로 일련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생각하고 교회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 사람을 보고 기대하는 것에서 ‘따귀 맞은 영혼’ 같이 얼얼하다. 쓸데없는 기대가 앞섰음을 인정한다.

 

이번 일로 사람 아닌 말씀에 더 의지하게 된다. 다들 그러든 어쩌든 내가 뭐라 할 문제는 아닌 것으로, 다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여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솔직히 고백하자면 다소 의기소침해졌다. 나도 이제 그만 다른 교회로 가서 저들과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의 고질적인 내 안의 질문들… ‘그래도 계속 할래? 이게 교회야?’ 하는 어떤 자격지심과 소심함이 목울대를 치는 것 같았다. 교인은 늘지 않고 가까운 가족들도 규합하지 못하면서… 그러면서도 주가 여태 이루어 오신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지만…

 

다른 말이지만 이번에도 어떤 아이와 그 아이엄마의 말못할 사정을 두고 나는 같이 마음 졸인다. 그래서 어찌 연결이 될지, 어떻게 진행이 되거나 그러고 마는 것일지. 저의 첫 마디가 어디 말할 데가 없어서, 하며 입을 뗀 것으로 저의 ‘상한 심령’을 두고 나는 같이 몰입한다. 그러라고 나를 두셨다. 어제 오후 옆 사무실 아무개 씨가 말을 걸었다. 오늘도 나오셨어요? 하자 나의 대답은 불쑥, 나는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한 후 여운이 길게 남았다. 이 자리, 여기 이 교회, 가족들도 거들떠보지 않고 교회로 여기지 않는 것 같은 곳을 두고 나는 끝끝내 교회로 안다. 그러라고 나에게 맡기셨다는 생각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오늘 미가서를 읽다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하는 대목에서 절망한다.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미 1:9).” 이런 지경의 세상에서 나의 본질, 우리에게 맡기신 신앙과 삶을 사는 데 있어 ‘가드에 고하지 말며’, 곧 블레셋 성읍과 ‘베들레아브라에서’ 곧 ‘먼지의 집’에서 사람들이 먼지 속에 구르는 것을 본다. ‘사빌’ 그 아름답고 순결한 땅의 모욕과 수치를…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사 20:4).” ‘사아난’은 유다의 아래 지역에 위치한 성읍으로 겁에 질려 성읍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성문을 굳게 닫은 것과 ‘벧에셀’이 애곡하여, 예루살렘 근처에 위치한 지명으로 ‘근처의 집’이란 의미인 벧에셀에서 결국 앗수르의 침략으로 파멸될 것을 시사한다.

 

‘마룻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마롯은 ‘고통’ 혹은 ‘수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뜻과는 달리 평안과 축복을 기대하나 여지없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임을. 이에 예루살렘도 예외일 수 없다는.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아무리 무장한 성읍이라 해도 도망을 치게 될 것이다. 딸 시온, 곧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근원은 ‘라기스’에서 왔다. 죄악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말과 병거’를 의지한 것이고, 라기스를 통해 우상들이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이는 ‘악십의 집들’이 메마른 시냇물과 같이 갈증에 허덕이는 때에 이르러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마레사는 정복자로 얻을 자를 뜻한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다. ‘아둘람’은 다윗이 사울의 핍박과 추적을 피해 숨었던 동굴이다.

 

오늘 아침 나는 또한 아둘람에서 주께 애원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141:1-2).

 

결국 내가 의지할 것은 말씀뿐이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러므로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107:19-20).

 

이를 앎으로 나는 그저 ‘지키는 자’로 족하다. 솔직히 확신은 없다. 이러다 나의 아내와 자식들도 모두 다른 어디 ‘큰 교회’로 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나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누굴 뭐라 할 거 없다. 내가 문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3-4).

 

다만,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8).

 

나로 주만 더욱 갈망하게 하시려고…. 일련의 사태는 나로 오히려 정신 차리게 한다.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