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 140:12-13
요나가 싫어하고 화가 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해주신 사실 때문이다. 요나는 그럴 줄 알았고, 그래서 이 일이 하기 싫었다고 억지를 쓴다. 저에게 니느웨는 단지 적대국이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더하시면 안 되는 상대였다. 결국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 말씀을 전하기는 하였으나 이처럼 구원을 더하실지는 몰랐다. 저가 성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이러한 사실이 감사해야 하는데 상대가 상대인 만큼,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가 부당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앞서도 살핀 것처럼 상대를 적국으로만 보았고,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도 이와 같은 인애와 긍휼하심으로 오늘의 자비하심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해가 간다. 우린 누구나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다. 같은 사실을 두고 남은 비판하고 자신은 두둔하는 게 사람이다. 여기서 요나의 헌신이 진정하지 못한 것이었음을 알겠다. 상대를 대할 때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헛되다. 이는 연민으로도 안 되고 억지 마음으로도 안 된다.
상대적으로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주의 일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곧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내 안의 ‘요나’가 적지 않은 것을 인정하게 된다. 먼저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여 앞서 그리 여기는 마음으로는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려하기보다 하나님을 조종하려하는 마음이 우선 된다. 내 안의 ‘가짜 하나님’이 의외로 크고 많다.
가령 ‘탕자의 형’으로 돌아온 동생을 두고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는 아버지가 큰 아들은 못마땅하였다. 무슨 일인가 묻자,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눅 15:27-28).” 실제 이와 같은 일들이 우리 삶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지 않던가? 나름 교회에서 또는 누구에게 한다고 하며 주의 이름으로 행하였는데 돌아오는 평가가 생각 같지 않을 때, 그런 우리의 속을 아시고 예수님은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우리더러 하라 하신다. 오히려 저를 축복하고 저를 위하여 기도하라시면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하실 때 마음이 어려운데, 이어지는 말씀으로는 할 수 있게 하신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오히려 감사함으로 주께 아뢰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미움은 스스로를 망치게 되어 자신만 괴롭힐 뿐이었다.
오늘 말씀에서 또 하나는 하나님은 저들이 비록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그 백성을 괴롭게 하는 앗수르의 배성들이라 해도, 심지어 저들의 짐승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욘 4:6-7).” 그러니 우리의 감정이란 게 물살 같이 변덕스럽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8).”
화가 나면 순간 앞뒤 분간이 어렵다. 그때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9).” 여기서 요나의 성질머리가 어쩜 그리도 내 것과 다르지 않은지…. 그러면서 또 하나는 그처럼 스스럼없이 하나님께 성내고 자기 생각을 밝히는 사이가 놀랍다. 이어지는 답변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놀랍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0-11).”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화낸다.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도 자주 이와 같은 감정에 빠져든다. 이러려고 나를 기껏 목사로 세우셨나? 싶을 때. 안 하겠다고 그렇게 거부하고 싫어하여 도망치다시피 하였던 나를 붙들어다 기어이 목사로 세우셨으면 뭔가 남다른 일을 행하시던가… 아니면 남들처럼이라도 사역자로 세우시던가… 하는 어떤 불만이 자주 인다. 가령 누가 속도 모르고 왜 이러고 있냐는 듯 뭐라 할 때 그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은 요나의 것과 다르지 않다. 난들 싫어서 이러고 있겠나? 그런 마음일 때 한 친구가 오히려 권면한 게 있다. 그래서 이처럼 묵상 글을 쓰잖아!
어제도 그제도 각각 친구가 다녀갔다. 저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고 명절이라고 뭘 들고, 일부러 서울에서 또는 안양에서 왔다. 설마 저들이 친구라서 그랬겠나? 믿는 자들로 저들에겐 친구 이전에 주의 종이요, 목사였던 것이다. 한 친구는 선물에 봉투까지 건네고 갔다. 일부러 그리 전하는 마음이 주를 인정하는 데서 가능하지 않을까? 돌아서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뭐라고…’ 하는 것인데, 달리 표현하면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일부러 먼 길을 다녀가게 하는 것이다. 모두가 왜 그러고 있냐고 할 때, 그러므로 말씀을 사모하고 더욱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한 것도 어느 친구의 위로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0-11).”
하시는 말씀에서, 나는 내가 모르는 순간에도 날 위해 주가 행하시는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되새긴다. 오늘 요나도 알고 있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할 때 이는 모세도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그러므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3-14).”
우리 앞서 믿음의 선친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자비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요나는 자신 역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뱃속’을 예비하심으로, 구원받은 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저는 불과 며칠 전에도 찬송하였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그런 그의 고백이 오늘은 무색하다. 자신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화가 났다. 이러한 감정 표출은 엘리야도 같았다. 수백명의 가짜 선지자들 앞에서 그처럼 당당하였던 그가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가서, 죽기를 청하였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나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의 행하심이 마뜩치 않을 때가 있다. 애써 원하시는 바를 행하였는데 주는 달리 그 뜻을 나타내실 때, 내 안에도 여러 생각이 반감으로 들어찬다. 그때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나의 생각과 주의 생각이 다를 때,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이에 승복하고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 하고 주 앞에서 무던할 수 있기를.
묵묵히 120년을 방주 짓는 일에 순종하였던 노아도, 도망쳐 나온지 40년이나 지났는데 무모하게 애굽으로 가라하심에 순종하는 모세처럼, 앞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또 어떻고? 저들은 하나님을 그 이상으로 알고 신뢰하였던 것이다. 단지 오늘의 현상으로 왈가왈부하지 않고,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하는 이 무모하고, 답답하고, 어처구니없는…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오늘 요나의 이야기는 늘 나의 일상과 같다. 내 안에 툴툴거리고 칭얼거리는 ‘요나’가 있다. 나름 한다고 한 것을 두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면 성을 낸다. 죽기까지 바라면서 하나님께 화낸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인애가 많으시다. 나 같은 자로 주의 길을 가게 하신다.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시 140:1).
내 안의 요, 나, 내가 제일 문제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두고 주께 구한다. 나의 어리석음과 고약함을 주가 용서하시기를. 이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하여,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119:36, 140:4).
그것이 늘 나 자신인 것을 고한다. 내가 처한 상황이 또는 나의 연약한 육신이 항상 나를 붙들어 넘어뜨리려 할 때,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나는 내 믿음을 강화하려하기보다 주의 사랑을 구하게 된다. 또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하여 기를 쓰고 아침마다 말씀 앞에 세운다. 묵상글이라도(!) 써야 살지, 나로 말씀으로가 아니면 살 수가 없게 하심이었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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