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전봉석 2023. 10. 1. 05:23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미 2:1-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142:5

 

 

악이란 ‘자기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앞서는 모든 것이다.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을 바탕으로 주의 이름을 운운하는 것은 악하다. ‘기도해보고’ 하는 말을 우린 서로 대수롭지 않게 하는데 정작 기도해볼 일이면 앞서 무언가 우리 안에 걸리는 게 있다는 소리가 된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것을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그것을 행하는 자’로 규정하고 이는 ‘화 있을진저’ 하고 옳지 않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악은 다음 날 행할 일을 침상에서 꾀하고, 날이 밝으면 이를 실행한다. 다시 말해서 생각이 앞서 가 있고 마음이 뒤 따르며 이내 이를 행함으로 ‘주가 행하심’을 제외한다.

 

그것은 마치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미 2:2).” 곧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행사를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일이다. ‘빼앗은 토지나 재산’은 각 사람에게 보장하신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여 성경은 이르기를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출 22:25-26).”

 

곧 나의 생각이 누군가의 무엇을 취하면 이는 그의 권리를 빼앗는 것으로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단순히 ‘사람의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것’을 취하는 일이다. 그에 따른 결과는 심판뿐이다(미 2:3-5). 재앙 곧 그에 따른 심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뜻을 의미한다.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하실 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믿지 않아도 실행된다.

 

어제는 전날에 있었던 손위처남의 말로 인하여 아내와 딸애와 같이 오전에 대화가 이루어졌다. 주제는 두 가지로 하나는 주일에 그럼 장모님을 처남이 모시고 가까운 교회로 나가는 일이었고, 하나는 ‘섬기는 교회’와 ‘본 교회’에 대한 구분이었다. 본(本)이란 근본(根本)으로 뿌리가 되고 바탕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나는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으로 나눠 이해한다. 천륜은 하나님이 그리 맺으신 관계다. 인륜은 서로의 의지로 그리 맺어진 관계다. 물론 두 관계는 모두 하나님이 그리 맺으신 관계다. 그러나 지금 섬기는 교회가 본 교회는 아닐 수 있다.

 

앞서 요즘 우리가 교회를 어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는 ‘병원’과 같아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념한다. 가령 죄의 문제로 상한 심령을 안고 찾는 것이다. 그런데 낫고자 하는 만큼 어지간해지면 심드렁하니 안 가도 좋을 곳이 된다. 또는 ‘대형쇼핑몰’을 다니듯 한다.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고 양질의 서비스가 제공된다. 말씀을 그리 여겨 지적허영이나 허기를 달래며 영양가 있는 양식을 공급받는 ‘식당’ 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또는 ‘공연장’이나 ‘전시관’ 같이 평소와 다른 연미복으로 차려 입고 교양과 품위를 갖춰 사교를 즐긴다. 배울 게 많고 얻을 게 흡족할수록 ‘좋은 교회’다. 다들 잘 차려진 곳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받고자 하는 셈이다. 아픈 곳도 치료하고 필요에 따른 것도 취하면서 적당한 만족과 사귐이 있는 곳으로….

 

한데 주님은 스스로를 떼어 먹고 마시라 하시면서,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4-26).” 하시고는 우리에게 일러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7).” 하실 때, 이를 교회로 놓고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하신 말씀에 집중하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신 것이다. 천륜은 어머니가 자신의 몸에서 물과 피를 쏟으며 낳은 관계다. 성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 사신 것이다. 이에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셨다. 우린 자신을 살펴야 하고, 주의 몸을 분별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8-29).” 곧 교회는 우리 개개인의 자신으로 앞서 언급한 병원이니 쇼핑몰이니 공연장이니 하는 따위로 ‘어디를 다닌다’는 행위 그 이상의 의미가 남는다.

 

곧 병원이라면 우리가 그에 따른 도구이거나 쓰임을 감당해야 하고, 쇼핑몰이면 필요에 따른 물건이 되어 저를 채워야 하고, 전시장이면 저에게 보이고 읽혀야 할 ‘그리스도의 향기나 편지’이다. 더하여 식당이라면 누구에게 뜯기고 씹히고 먹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교회’란 어쩌다 우연으로 이뤄진 것 같으나 그 바탕이 되는 그리스도 예수에까지 가닿는 말씀이어서 나의 영혼이 거듭난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그러므로 우리의 ‘본 교회’는 나로 말씀 가운데 살게 한 것인데, 이는 지엽적으로 이 땅에 있는 어느 교회를 지칭하기에 앞서 나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 어쩌다 그 지역에서 또는 누구에 의해 정 붙이고 사는 따위의 좋은 곳이 아니다. 내가 뜯기고 씹히고 먹혀 한 알의 밀이 되고 거름이 될 수 있는, ‘내 생명 다 하기까지 늘 사랑하는’, ‘곳’이며 ‘것’이다. 소비자로서가 아닌 생산자로,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주인으로, 내 교회, 내 모든 것이어야 한다.

 

이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이를 위하여,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20-22).”

 

곧 우리로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는 것으로 주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는 곳이다. 교회란 믿는 자에게 소망의 확실함을 준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이는 우리로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향 저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생을 고대하는,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그러므로 우린 교회에서,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그런 가운데 ‘현재의 많은 고통도 그것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곧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이를 오늘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곳이다. 하여 우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이를 믿는 자마다 자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곳이다. 이에,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6, 9).

 

하는 찬송과 경배가 끊이지 않는, 예수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시고 우리로 각각 그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더는 필요 없는, 이것으로 전부인, ‘교회는 그의 몸이다.’ 곧 천국에 모인 자들의 자리다. 교회가 그의 몸인 것은 먼저 ‘머리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머리가 받는 영광’에 동참하는 일이다. ‘머리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일이다. 이는 신화가 아니다. 신화는 범신론적이다. 우리의 교리는 유신론이다. 실제 역사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 또한 누구에게 살과 피로 먹혀서 주의 양을 먹이고, 치고, 먹여야 한다.

 

구약에 의하면 아담을 머리로 하고 그의 안에 포괄된 온 인류를 일체(一體)로 생각하였다. 이를 바울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생각하여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그러므로 우린 하늘에 속한 자들로 모였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48-49).” 우린 둘 다 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속한 하나이다.

 

두어 시간 이와 같은 설명을 하면서 나는 누구도 강요하는 것을 주의하려 기도하였다. 구원은 내가 주는 게 아니다. 선택도 내가 대신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전하는 자로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5, 19).”

 

정리하면 죄란 스스로가 허용하는 범주의 모든 것이고, 의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해하며 오직 주님만으로 하나 되길 바란다. 그렇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 나로 천국 백성이라 거듭나게 한 것이 ‘본 교회’이다. 굳이 지금 ‘섬기는 교회’와 ‘본 교회’를 구분한 것은 우리 의지로 우리가 선택한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인륜에 의한 것이지 천륜이라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또 하나는 개개인의 특수성이다. 가령 딸애와 나는 하나님 앞에서 ‘더 많이 받은 자’이다. 분명히 예수께서 이르시되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하심은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특권에 의해 ‘특별한 축복’으로 우리는 살았다. 가령 믿는 자의 가족으로 때론 지겨울 때도 있었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그만큼 ‘많은 맡은 자’라는 것이다. 안 믿는 가정에서 홀로 믿음을 지키며 사는 자를 볼 때 이 특혜는 참으로 사랑에 빚진 것은 분명하다. 이에 교회는 먼저 우리 개개인 자신으로서 ‘그리스도의 충만케 하시는 은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들을 충만히 보유(保有)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이들이 모여 현실 교회를 이룬다. 병원으로 또는 전시장이나 쇼핑몰로 교회는 각각의 역할이 모두 필요하겠지만 정작 그 쓰임과 팔려나가는 것은 우리의 헌신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사는 것 같이 또한 누구에게 살과 피로 먹혀져야 한다. 오늘 날 ‘교회의 사역’과 ‘구약의 성전 사역’은 그래서 다르다. 신약의 교회 사역은 신자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교회가 된다. 즉 ‘하나님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 은혜와 구원을 나누어주는 사명’이 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그러므로 교인이 하나이든지 열이든지 수백, 수천 명이든지… 그것으로 교회의 권위가 서는 것은 이 땅에서도 그릇되다. 이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3-25).” 이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3:15).”

 

그저 관람객으로 또는 손님이나 환자로 필요를 찾아다닐 뿐, 더는 가담하지 않고 쓰임이 없는 성도는 엄밀하게 교회가 아니다. 나는 오늘 말씀에서 ‘슬픈 애가’를 들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한다. 우린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이며 아들이며 장자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 없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길을 여는 자’이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미 2:13).”

 

이에,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142:3).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5-6).

 

끝없이 주 앞에 아뢰고 고하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으로의 교회가 되는 ‘것’. 그런 ‘곳’으로 충만함으로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므로 교회는 정든 곳도, 편한 곳도, 뜻이 맞는 곳도 아닌 것으로 이는 부담스러워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우리에게 교회란 이런 것이어서, 영광스러우나 부담스럽고, 부담스러워서 영광을 소망하며 나아가는. 그리하여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충만한 그런 곳? 그런 것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