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전봉석 2023. 10. 8. 05:13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나훔 2:1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4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하는 부분에서 한참을 머문다. 나의 신앙과 믿음을 쥐고 흔들려는 것, 때론 상투 잡힌 듯 끌려 다니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파괴하는 자’는 흔드는 자이다.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사 24:1, 6).”

 

당시 바벨론의 나보폴리살과 메대의 카카레스(B. C. 625-585)가 거느린 연합군이 니느웨를 침입함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패역한 니느웨를 멸망시키기 위해 예비하신 심판의 도구들이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의 철퇴 곧 무기라 나는 네가 나라들을 분쇄하며 네가 국가들을 멸하며… 네가 목자와 그 양 떼를 분쇄하며 네가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분쇄하며 네가 도백과 태수들을 분쇄하도록 하리로다(렘 51:20, 23).” 이에 오늘 본문은 경고한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나훔 2:1).”

 

이에 우리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허리를 견고히 묶고,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하는 말씀에 주목하게 된다. 내 신앙의 산성, 믿음을 지키고 서로 왕래하는 교제의 길을 파수하고, 허리를 단단히 묶고, 힘을 굳세게 해야 한다. 이는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0-11).” 하신 말씀에 가닿는다. 오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12).”

 

단지 그런, 다들 그러고 사는 안이한 싸움이 아니다. 우리 영혼을 쥐고 흔들며 믿음의 교제를 끊고 허리를 꺾어 주저앉히려 하는 것들이 있다. 아이 일로 한참 주께 매달리며 신앙으로 굳건히 견디는가했던 이가 무너졌다. 아이는 장애등급을 받았고, 모든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가 않았다. 거기에 코로나가 터지면서 대면예배를 피할 수 있다가 이젠 아예 비대면예배조차 거부감이 들어 마다한다. 삶이란 게 어처구니없는 것은 한 번 어그러진 길이 점점 벌어져 다시 돌아서기란 쉽지 않다. 한 뼘도 안 될 것 같은 자기합리가 결국은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둔갑시켜 스스로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며 산다.

 

임박한 우리 미래의 행동들이다. 하여 오늘 말씀은 ‘여호와께서 지금 곧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하신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나훔 2:2).”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의어다. 전체 선민을 향한 약속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6).”

 

그리하여 저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오늘 우리로 믿음 안에서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시 107:20, 147:18).

 

이에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곧 우리 안에 ‘여호와의 열심’이 나로 굳게 서게 하신다.

 

상대적으로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 하는 오늘 본문에서 심판의 필연성을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사 9:15-16).” 오늘 우리의 실정은 믿음 안에 온전하기가 쉽지 않다. 미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귀가 간지러워’ 저마다 자기 듣는 소릴 좋아한다. 이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개인방송이 활성화되면서 저마다의 콘텐츠로 대중을 마주한다. 성도들은 소비하듯 누구의 설교를 듣고 어떤 이의 간증에 매료된다. 듣고 싶은 찬양도 무제한으로 풀려서 우리의 감성을 흔든다. 은혜와 감동이 분화되었다. 자기감정에 도취되어 사는 성도들이 많다. 묵상보다는 명상을, 설교보다는 자아도취에 따라 살기를 바란다. 묵상은 듣는 것으로 말씀으로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때로는 더디고 느려서 답답하다. 명상은 스스로가 비우려 든다. 비움을 빙자하나 채움을 따른다. 허기진 영혼들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아귀다툼하듯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한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른다. 많은 스승을 두고 산다. 그런데 실은 그 스승이란 게 그저 감각적일 뿐, 소비되는 형태로 ‘구독’은 선택된다.

 

‘니느웨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힘을 가진 침입자들이 우리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른 것을 희화화한다. “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이 피며 교만이 싹이 났도다(겔 7:10).” 이에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어쩌면 우리는 ‘니느웨 사람들’로 살고 있다. 선민의 지휘를 박차고 나온 지 오래다. 더러 누구 이야기를 듣다보면 공통된 모습 중에 하나가 ‘예전에는 교회를 다녔었는데’ 하는 소리다.

 

세상 참 좋아진 것 같지만 영혼마다 병들기 딱 좋은 시절이다. 엘리베이터나 공중화장실에서 이젠 아주 대놓고 게임을 하거나 ‘짤’로 보는 동영상이나 영화를 본다. 사람들의 손에 저마다의 영상이 들렸는데 어떤 이는 개인방송을 들어보란 식으로 크게 틀고 듣는다. 저마다 귓구멍을 막고 입구멍은 열었다. ‘파괴하는 자가 우리를 치러 올라왔다.’ 이때에 우리로 말씀에 붙들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약속하신 바,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욥 34:21-22).” 주가 행하시기를, 아니면 우린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암 9:2-4).” 이에 말씀은 명령하셨다.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수 17:18).”

 

하여 우린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자신을 부여잡고 살아야 한다. 할 때에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두려운 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내가 구원할 것임이라(사 49:25).” 그러므로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계 18:20).”

 

오늘 우리의 일상이 영적전투의 날들이다. 작은 틈으로 연기가 스며들듯 너무 재밌고 즐거운 것들이 손에 들렸다. 언제부턴가 스스로 읽고 묵상하기보다, 듣고 누가 보여주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마저도 중간에 멈추고 다른 일을 겸하면서 한다. 읽기와 묵상은 훈련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더디고 느려 답답하다. 요약본을 찾고, 편히 앉아 즐기듯이 신앙도 거저인 줄 안다. 그러다보니 큰 교회일수록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 열을 올리고, 흥미롭고 자극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모르겠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작은 교회’를 선호한다. 내가 아는 성경과 그 안의 여러 군상이 이뤄내는 역사는 시대마다 몇몇의 활약이다. 사사시대는 물론 앞서 족장시대에도, 훗날의 왕정통치시절에도 ‘의인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져왔다. 결국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사 13:19).” 물질로도 안 된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 1:18).”

 

이에 나는 오늘 시편에서 답을 찾는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언제나 새롭고 활기차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149:1, 98:1).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149:2).

 

나를 지으신 이, 나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곧 오늘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어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나의 여러 생각의 갈피를 놓고 말씀에 기댄다. 내 안의 열망이 주를 찬양하는 데 소용되기를.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3).

 

그러할 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4).

 

나로 주의 백성인 것을.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영으로,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기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이에,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86:12-13)

 

이미 죽었다 살아난 자로, 그야말로 이제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149:5-6).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만큼 이 땅에서의 나의 꿈은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입으로는 찬송을,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을 들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먼저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면서 동시에 세상 즐거움과의 싸움이다.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7-9).

 

궁극적으로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옵 1:15).” 하는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그러므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