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미 7:7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시 147:11, 18
타락하고 부패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재앙을 탄식한다. “재앙이로다.” 하는 표현은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욥 10:15).” 하였던 것과 같이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미 7:1).” 하는 탄식을 듣게 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해 의인을 찾던 아브라함처럼(창 18:23-33), 예레미야와, 에스겔 등과 같이 이스라엘에서 의로운 사람을 찾으나 한 사람도 없다(렘 5:1-5, 겔 22:30).
어쩌다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이 되었을까?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하는 절규는 오늘에도 같지 않을까? 그만큼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는, 자신들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법집행과 같이…. 그리하여 미가는 ‘하나님이 개입하는 날’을 알리고 있다. 그날은 ‘형벌의 날’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에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리로다(미 7:5-6).” 이 악한 세대를 표현하는 가장 극적인 설명이 아닐까? 사회를 구성하는 가정이 파괴되었다. 아이는 엄마와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 거짓을 진술한다. 이때 놓치는 것이 가장 가까운 존재가 해를 가하는 관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은 심지어 한 이불속에서 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까지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조차도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태, 경건한 자가 끊어진 사회는 소망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3).
곧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러므로 오늘 미가는 소리친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즉 사는 동안 하나님이 나의 삶에 개입하시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은 경건하다. 문득 가는 길에 하늘을 우러러, 하던 일을 멈추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아버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해주세요. 어지러운 마음으로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은총뿐입니다. 하는 나의 기도가 ‘파수꾼의 태도’와 연결된다.
파수꾼은 지키는 자이다. 주신 나의 이 몸과 시간과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모든 처지를 두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하고 주가 나의 삶에 개입하시기를 바란다. 의로운 자를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오직 구원자 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미가와 같이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날들을 사는 동안 주를 경외할 때, 오늘 시편은 알려준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47:11, 18).
이를 알면서부터 나는 이른 아침을 기다린다. 누가 뭐라 하든지 나는 이 시간과 이 자리를 지키기를 소망한다. 경추 5, 6번에 퇴행성관절염이라 하여 목을 가누기가 어렵다. 모두는 책을 보고 글을 쓰는 일이 안 좋다고 걱정이다. 특히 오른쪽 어깨가 아프면서부터 나의 불안은 가중되어 나의 신체 중에 이를 못 쓰면 몸이 전체가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걸 안다. 매일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진통제를 먹거나 주사를 맞고… 앉아도 누워도 허리와 목이 아파서 끙끙거리는 육신을 이끌고 이를 지킨다. 나의 몸과 마음을 지키고, 주를 향하는 경건을 사모한다.
누가 어떤 일에 자신들을 소개해달라고 하나 나는 그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교육하겠다고 하는데 나는 뭐라 더는 이를 말이 없었다. 남편 목사는 여전히 파트로 사역을 때우고 남은 시간은 주로 게임을 한다. 그런 실정을 냉정하게 말하여도 저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지, 더는 감당이 안 되는 아이교육을 두고 이내 그리 결정한 모양이다. 앞서 서로가 많은 말을 해서인지 나는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했다. 그러다 불쑥, 친구 분 대안학교에 교사 자리가 나지 않았나 하고 묻는 것을 다른 말로 돌려 세웠다.
내가 나의 어머니를 존경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나를 맡김으로, 나를 세상에 두었다는 것이다. 지금 저 아이 나이 때, 나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성적은 부실했으며 장애가 있는 아이였다. 전학할 때마다 학교는 늘 ‘무료로 운영하는’ 장애인학교, 특수학교를 권했으나 우리 어머니는 그 어떤 말에도 굴하지 않았다. 마치 방치하고 방관하는 사람들처럼 나를 학교에 두고 혼자 갔다. 나의 부모는 뒤늦게 시작한 목회에 전념하였다. 자식들의 일은 주께 맡김으로 무방비 상태였다. 두 살 터울 어린 누나가 살림을 도맡아했고, 나와 두 동생은 들개처럼 밖으로 떠돌다 저녁이면 집에 들어왔다. 나의 부진함과 연약함은 늘 표적이 되는 듯 괴롭힘에 시달렸다. 어린나이에 나는 나의 부모를 빼앗아간 하나님이 참 싫었다.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주가 하신다는 것, 우린 다만 파수꾼 같이 맡긴 바, 우리 사역에 전념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였다. 그럼에도 늘 같은 타령이라…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결국은 아이를 스스로 돌보겠다는 일념으로, ‘그 가정’에서 책임지겠다는 것인데. 나는 저가 숱하게 들려준 그 형편과 사정이 내가 이해한 정도는 아닌가보다 하고 위안을 삼았다. 결국은 지금의 대안학교로 이어지기까지 친구 부부가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하고 자신들의 삶을 쳐서 복종시키며 살았는지를 잘 안다. 오늘도 교장은 학교 일에 지쳐 기도실에서 기도하다 쓰러져 잠이 든다. 친구는 직장에서 돌아오면 밤늦도록 집안일을 대신한다. 가뜩이나 연약한 아내의 육신과 그 형편을 헤아리며 저의 생활은 기도로 산다.
나는 어느 쪽을 두고 뭐라 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무던함이다. 파수꾼의 할 일은 끈기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하는 오늘 미가와 같은 확신 없이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자식들을 어찌 방치하듯 놓아두고 주의 일에 전념하였던 부모로 아이러니 하지만 우리 사 남매가 모두 목회를 한다. 늘 우리 하나님의 반전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치 오늘밖에 남은 날이 없는 사람들처럼 하루에 온 기력을 쏟고 사는 사람들이 주의 길을 간다. 그러니,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
‘엎드러질지라도’,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하나님만을 의뢰하겠다는 의지가 우리의 가장 큰 믿음의 덕목이다.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사 8:22).” 그렇다 해도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하는 오늘 미가의 결연함은 의지다. 마치 욥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나의 어머니는 그러하였다. 내가 아는 두 친구는 그리 기독교 대안학교를 맡기신 과업으로 알고 목숨을 다해 지킨다. 지킨다는 것, 내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다는 것. 그럴 때 오히려 우리 안에 드나드는 회개는,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미 7:9).” 나를 인정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한다.
그때에 말씀을 보내신다는 것,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07:20, 147:18).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11).” 나를 여기에 두셨음으로 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혼자서 이리저리 자리를 정리하고 청소하다 피식, 웃는다. 어제는 하루 일찍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풋, 웃음이 났다. 누가 올까? 하고 하나 더 설교원고를 출력하다 말이다.
나는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오히려 의연하다. 물론 불안으로 약을 먹으면서도 그런 일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교회를 같이 옮겨 가게 될지, 교인들이 늘기는 할지,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어찌 다루실지…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리지만 결국은 나의 자리를 지키는 일. 조금은 어이없는 생각 같지만 오늘도 하루를 맡기셨다. 이 몸을 맡기셨다는 것. 그것으로 이와 같이 묵상글을 쓰게 하셨다 것. …하는 식으로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앉아 기도한다. 목을 가누기 힘들어서 고개를 숙이면서도 되뇐다. 한손으로 자판을 치면서 생각한다. 주가 하신다.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다만 여기에 두신 것으로 오늘 하루를 산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119:34-35).
주를 경외하고 주의 인자하심을 바랄 때 주가 기뻐하신다는 것. 나는 나의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와 상황을 사랑한다. 아파서 짜증스러운데 감사가 나온다. 왜냐하면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6-8).” 이를 인정하는 자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리다. 늘 또한 그러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늘 그렇지 못한 나를 잘 알고 나 자신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여 다시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랄 뿐이어서,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7-8).” 나의 약함과 악함을 인정할 때,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나는 오늘 미가의 기도를 따라 읊조린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시 86:8).
그래서도,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147:10).
이는 마땅하여 명령이다. 우리의 찬양은 오늘을 사는 이유이고 목적이고 명령에 따른 것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148:5).
내가 아는 한,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147:5-6).
우리 하나님, 나의 아버지,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1).
이를 앎으로 주 앞에 엎드려 아뢴다. 그때에,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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